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당신의 적은 누구인가?

by 격암(강국진) 2020. 1. 17.

20.1.17

우리 스스로를 포함해서 어떤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을 때 가장 빠른 방법 중의 하나는 한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 (혹은 그 사람)의 적은 무엇인가? 

 

이것이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이유는 이것이 어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 혹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다. 돌멩이도 못을 박는데만 쓴다면 그 핵심이 망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혹은 어떤 사람을 적으로 여길 때 우리는 그 적을 무찌르는데 몰두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못을 적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망치가 된다. 

 

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장애나 결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갈증으로 죽을 듯하다면 당신이 가장 결핍한 것은 물일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의 적은 물론 갈증이다.  당신이 짝사랑에 몸살을 앓고 있다면 당신이 가장 결핍한 것은 물론 그 이성의 관심과 사랑이다. 당신의 적은 물론 그나 그녀의 무관심이다. 당신은 그 결핍을 싸워 이기고 싶다. 그것 이외에는 당장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당신이 지금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운동권이 NL (National Liberty, 민족해방)과 PD (People's Democratic, 민중민주)로 나뉘어 싸우는 파벌이 있었다 내지는 지금도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게 뭔가를 찾아보면 긴 설명을 듣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다. NL은 외세를 적으로 둔다. 그래서 흔히 반미 메세지를 많이 낸다. 그리고 PD는 노동자의 적은 자본가라는 마르크스의 본래 메세지에 더 충실하다. 적을 정하면 적이 아닌 것은 통합하고 포용해야 할 상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적을 정하는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다. 

 

모두는 아닐 거라고 믿지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중에는 남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아버지나 형제도 한남운운하며 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 스스로를 보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적을 북한으로 말한다. 남자가 적이건 북한이 적이건 이런 생각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들의 적이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북한의 공작원들이 일으킨 가짜선전이거나 남한파괴공작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보수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위기 뉴스는 가짜선전이고 진보대통령이 집권하면 저 진보대통령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을 파괴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스스로의 사상검증을 위해 의식적으로 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무엇이 나의 적인가? 직장 상사나 같은 학교의 어떤 학생? 출세나 돈을 버는 것을 막는 장애물들? 나를 억압하는 가족들이나 한국 사회의 관습들? 세상이 보여주는 나에 대한 무관심? 허약한 몸이 가진 질병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용모를 포함하는 신체적 문제나 장애? 참을 성없고 탐욕스러운 나 자신? 의식적으로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그것은 더 맹목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 질문의 답이 뭐가 되었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질문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혼란들이 관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답에 대해 혹은 남이 들려주는 답에 대해 유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건 전혀 틀려 있을 수 있다. 

 

첫번째 혼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적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가장 큰 적인지 혹은 유일한 적인지를 잊기 쉽다. 

 

사람은 일단 하나의 문제나 싸움에 빠져들면 너무 쉽게 거기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구체적인 예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우선은 좀 가상적인 예를 들어 그게 어떤 것인지 말해보자. 당신이 좀 잘생겨졌으면 싶어서 성형수술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의 손이 조금 더 잘생겨지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다. 뭐든지 더 좋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그런데 당신이 그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 후속질문들에 빠져든다. 손을 더 예뻐지게 만드는 일곱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첫번째 방법은 이런 비용이 들고 저런 단점이 있고 하는 식이다. 게다가 프로세스가 시작되고 비용이 투자되면 그것이 끝나기 전에는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최초의 질문을 받았을 때 사실은 당신이 가장 불만족이었던 것은 얼굴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손말고 얼굴, 체형, 발등 다른 문제들도 많다고 생각했을 수있다. 그런데 그저 손도 예뻐지면 좋겠지라고 생각해서 당장 싸워야 할 대상을 손의 흉함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거기에 한정없이 빠져들어가고 결코 얼굴이나 발등 다른 문제로 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 쉽다. 

 

이와같은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크고 작게 계속 일어난다. 즐거운 가족여행을 계획했는데 그걸 실행하다가 호텔에 꼭 수영장이 있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이 여행계획의 애초의 목적이 가족의 행복과 단합이었으며 그것이 사소한 문제였다는 것을 잊게 되기 쉽다. 

 

대학에 들어갈 때 전공학과는 어떻게 결정했는가? 취직을 할 때 진로길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집을 살 때 어떤 집을 살지는 어떻게 결정하나? 결혼을 할 때 상대방은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은 당연히 진지하게 숙고해서 결정할 것같지만 순간의 생각이 결정하는 일이 더많다. 

 

그래서 때로는 많이 보는 게 더 해롭다. 결혼하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선을 많이 본 사람이 정말 좋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정보속에서 당신은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가장 사소한 이유에 매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진로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쌓아 올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정보를 모은 사람이 가장 만족스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심리학적으로 그 반대라는 결과가 있다. 우리는 뭔가를 운명적으로 만날 때 현실에 더 만족해 한다. 

 

두번째의 혼란은 이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보이는 것들 안에서 적을 찾는다.

 

이것은 소거법의 논리다. 예를 들어 어떤 폐쇄된 방안에 열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죽었다. 이 사람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분명 살해당했다면 범인은 남아있는 아홉사람중의 하나다. 그 중 하나가 확실히 범인이 아니라면 이젠 남은 여덟명중의 하나가 범인이다. 이런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지 않다. 사실 밀실이 나오는 추리소설에서도 상황은 흔히 위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흔히 여러 증거가 이 아홉사람 모두 무죄라고 말할 때 어떻게 된 것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거나 아예 애초에 밀실에 그 사람이 혼자 있었는데 어떻게 살해 당할 수가 있었을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현실은 바로 이런 추리소설들과 비슷해서 소거법이나 배중률의 논리가 종종 실패한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고 있다. 어떤 때는 더욱 작은데 그것은 우리가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거나 어떤 일에 감정적으로 집착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작아진 시야속에서 인과관계를 소거법을 통해 따져서 우리가 적을 발견했을 때 그렇게 찾은 답은 그다지 신통한 것이 아니기 쉽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은 종종 친구나 가족중에서 그들의 적을 찾는다. 누나나 남동생이 혹은 아빠가 가장 큰 적이라는 식이다. 왜냐면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에게 뭘 받고 있는지, 누가 뭘 희생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어른과 견해가 전혀 다를 수 있다. 어른도 자기세계에 빠져서 좁은 시야를 가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아이의 의견이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경험이 많고 보는 시야가 조금 더 넓은 어른들은 종종 아이가 전혀 엉뚱한 적을 잘못 설정한다는 것을 느낀다. 스스로 어린 시절을 돌아볼 때 누군가가 그때는 엄청나게 미웠는데 지금은 왜 그정도까지 였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우리는 어떨까?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성숙하다고 생각하나. 당신의 시야는 얼마나 넓은가. 그런데 당신은 지금 누가 혹은 무엇이 당신의 적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도 그냥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아주 엉성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안에서 적을 찾는 문제는 어린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의 문제다. 

 

이 혼란들 혹은 문제들에 대처할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는 유한하고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이런 저런 말들을 했던 이유는 그래도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적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의식적으로 질문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다시 검증하게 된다. 답은 언제나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전에 말한대로 질문자체를 던지질 않으면 우리는 맹목적이 되기 쉽다.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 즉 XX가 나의 적이라는 생각에 너무 빠져서 모든 일이 당연히 그것때문인 것처럼만 보인다. 그런데 내가 XX가 나의 적이라고 말하거나 쓰게 되면 우리안에서는 다른 생각들도 생긴다. 정말 그런가하는 생각이 생긴다. 그게 적의 전부가 아니고, 그게 가장 중요한 적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말이다. 그게 우리를 이데올로기 중독에서 탈출 시키는 것이다. 물론 두가지의 혼란도 기억하면 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세뇌하는 사람의 말은 흔히 우리의 적이 누구인가라는 부분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런 방법은 워낙 여러가지가 있고 내가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적이라는 키워드를 기억하면서 남의 말을 들으면 문제점을 눈치채기가 쉽다. 

 

예를 들어 이 문장을 생각해 보자. 

 

저 가난한 사람들을 이 마을에서 쫓아냅시다.

 

이렇게 말하면 여기에 동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통이나 보통이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더 부자들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는 불안에 떨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저 가난한 사람들을 이 마을에서 쫓아냅시다.

 

누가 불안하게 살고 싶겠는가. 그러니 첫번째 문장은 당연히 옳다.  그런데 당연한 문장을 더하면 두번째 문장의 뜻이 달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순서대로 엉성한 논리를 쫒아가는 게 아니라 전체 그림을 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적인가. 이 글은 전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나는 그것에 동의하는가? 

 

우리는 알쏭달쏭한 말의 논리에 빠져들기 전에 뒤로 물러나서 전체 그림을 보고 거기서 누가 적이라고 말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결론은 좀 충격적이지만 중간에 논리적으로 흠이 없다따위의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말로 하는 논증은 수학같은 것이 아니다. 흐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보아 어떤 사상이 설파되고 있는가를 함께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의 문맥을 위해 이 글이 주장하는 적을 한번 생각해 보고 이 글을 끝내자. 이 글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적은 우리가 뭔가를 과신하고 사상검증을 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내가 늘상 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게 나의 이데올로기다. 닭장에 갇힌 닭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가 마는가를 선택 하는 것은 물론 여러분의 몫이다. 

 

 

'주제별 글모음 > 나는 누구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 나는 누구인가?  (0) 2021.07.09
나의 질문, 나의 답  (0) 2020.12.02
나는 누구인가와 허풍  (0) 2020.01.09
나는 작가다.  (0) 2017.10.28
인간의 두번째 탄생  (0) 2016.06.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