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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Re: 나는 누구인가?

by 격암(강국진) 2021. 7. 9.

21.7.9

2013년에 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바깥에 어떤 물건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점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우리가 가진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정말 작은 부분밖에 모른다는 것을 절감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지식이 작다는 것을 이미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그건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과소평가한다. 사실 그렇게 되도록 교육되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 뭘 아는가? 무슨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답을 찾으려고 할 것없다. 교과서적인 답, 상식적인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빅뱅 이론이라던가 은하계, 태양계, 지구 따위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적인 그림이 아닌가. 우주의 역사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당신은 또 학교에서 배운 역사를 대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걸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모른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는 도서관에 가면 다 써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라면 또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들이 기록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로 과학과 환원주의가 만든 과장이 포함되어져 있다. 이 세상에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적인 그림을 떠올려 보자.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가? 이제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이 복잡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상을 거의 다 안다고 느끼는 것은 첫째로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들이 본질적으로 결정론적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고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 라플라스는 그래서 초기조건만 주면 미래를 다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다. 이 그림에 따르면 한 시간대의 정적인 현실만 알면 미래와 과거를 모두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법칙의 존재는 현실에 대한 큰 단순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이 따로 따로 떼어내서 이해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우주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우주의 극히 일부분만 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저쪽과 이쪽은 기본적으로 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렇지가 않다. 우리는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들도 다 모를 뿐더러 그들은 결정론적도 아니고 환원주의적으로 따로 따로 떼어내서 나중에 적당히 합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이 출연자가 만명쯤 되는 드라마를 써야 하는 작가라고 해보자. 이 배우들이 모두 다 중요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그 이야기는 얼마나 복잡할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비하면 극히 단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결과로 우리는 무능하다. 경제문제, 환경문제는 물론 개인적인 문제들도 세상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거의 모두를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하며 우리가 몰라도 도서관 어디엔가에는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능동적으로 인식하여 찾아내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당신은 먼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인식의 결과'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누군가가 당신을 칼로 찌른다면 당신은 반격에 나설까? 아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수술하는 의사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죄책감없이 죽일 수 있을까? 그렇다. 전쟁이 나서 전투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그날 처음 본 사이라도 서로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전쟁이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죽일 테니까. 이렇게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펼쳐지며 그에 따라 당신의 행동은 달라지게 된다. 어느 한 순간의 감각적 신호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순간 시공적으로 넓게 넓게 펼쳐진 세계를 다시 인식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대로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므로 우리는 세상을 그냥 인식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대신 선택된 정보를 통해 하나의 간결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시간을 포함하므로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다. 이 선택과정이 바로 능동적 인식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지금 이순간 뭘 해야 할지를 말해준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이란 사실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이렇게 단순화된 이야기다. 우리가 종종 그것을 잊을 뿐이다. 

 

그런데 이쯤되면 사람들은 너무 빨리 허무주의와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삶은 이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다. 심지어 지구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도 우주적 규모로 보면 물거품같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희노애락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우주는 무한정 넓고 우주의 나이도 무한정 기니까 당신의 짧은 인생따위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인가?

 

무한의 경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유한한 인간의 어떤 것이든 다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는 무한의 경지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년이나 한달이 무한정일 수 있다. 그 유한한 시공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일관성있는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또한 우리는 이미 존재해온 이야기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 우리가 그것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잘난 척해봐야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이라던가 어떤 가족의 일원이라던가, 내가 어제까지 어떤 동료들과 함께 추구해온 목표가 있다는 것이 모두 의미가 있다. 남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날마다 과거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어떤 의미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주적 규모에서 보면 무한히 펼쳐진 시공간안에서 버둥거리는 짚신벌레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겨우 주변의 것을 조금 느끼고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는 것과 망원경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인간이 정보를 어떻게 얻고 보존하는가에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고 우리가 우리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내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문자의 사용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바다를 건너서 항해를 하게 되어 지구적 규모로 움직이게 되었다던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같이 일상을 초월하는 과학법칙을 알게 된다던가 하는 일이 생기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시각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야 말로 새사람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경제학이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는 18세기 인물이다. 그리고 17-18세기는 영국에서 사회적 양에 대한 통계적 측정이 시작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통계적 정보가 많아지자 그 정보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고 그 정보안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경제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비극적이었는데 경제학적 법칙은 개인적 윤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인구론은 먹을게 많아지면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법칙이니까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을 낳았다. 지금도 시장의 법칙 운운하면서 잔인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적어도 우리의 일부가 그런 인간이 된 것은 바로 정보가 새로운 인식을 만들었고 그 인식이 새로운 자아와 윤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미 지난 세기와는 비할 수 없는 속력으로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통계확률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고 확률론이라던가 인공지능같은 것이 발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우리의 윤리는 통계확률적 계산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탄 다니엘 카네만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에 대해서 올바른 확률적 추정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추정은 우리의 타고난 본능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발전의 끝에서 다시 새로운 인간, 다른 윤리를 가진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새로운 정보,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 나는 문자로 인해 달라진 인간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르고 현대의 인공지능기술로 인해 달라질 인간을 사이보그 2라고 부른다. 

 

정리해 보자.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 이순간 우리는 뭘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같은 질문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나를 포함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뭘 할까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인식은 그냥 눈뜨고 귀를 열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무한히 펼쳐지는 세상속에서 이야기를 선택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가 뭘 듣고 읽고 기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이야기들은 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선택도 우리의 감정도 윤리도 달라지게 되며 그것은 사회 기술적인 영향을 당연히 받는다. 그러므로 지금 빨리 발달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은 우리의 자아를 바꾸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이들이 노동착취를 당하고, 백신부족문제를 겪고, 여성 차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자아는 바뀌게 된다. 테슬라 주식을 얼마간 사는 것이 우리의 자아를 바꾸게 된다. 무슨 뉴스를 보고, 무슨 글을 읽는가가 우리의 자아를 바꾸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인식이며 선택이다. 그것들은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이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키워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짚신 벌레로 만들고 있는가? 당신의 삶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이 있는가? 그게 아니면 그저 매일 매일을 새로운 날로 사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최근에 고 박이문 선생님의 둥지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글은 그 책의 독후감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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