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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데니스 노블의 생명의 음악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1. 3. 5.

21.3.5

옥스포드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가상 심장 분야의 선구자인 데니스 노블의 생명의 음악을 읽었다. 이 책은 2008년에 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09년에 출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에 빠져 있는 세상에 대해 뭐가 문제인지를 설명하려고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은유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여러번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환원주의의 반대인 비환원주의 혹은 통합주의는 사물을 나누고 고립시키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언어도 한계를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설명은 진리의 일부분만을 말하는 은유가 되며 이것이 옳으면 그 반대는 틀린 것이 되는 배중률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환원주의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 역시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본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는 것으로 설사 오토바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데니스 노블은 자연스레 그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인 가상심장 분야와 생명을 예로 들면서 이 비환원주의를 설명한다. 덕분에 이 책의 몇장은 아마도 비전공자에게는 따분하고 알아듣기 힘든 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환원주의는 어떻게 비판받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왜 비판받아야 하는가. 환원주의는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과 그것들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어떤 현상은 그 현상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에게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원인이 되는 부분을 찾으려고 하고 일단 찾았다고 믿게 되면 그 부분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사물을 나누고 나눠서 작은 부분을 찾은 후에 그 작은 부분이 어떻게 전체를 지배하는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예가 바로 DNA다. 우리는 지능이나 질병은 어떤 유전자가 결정하는가같은 질문을 던지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마치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이 써져 있는 것이 DNA이며 특정한 유전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고 DNA에만 집중하고 만다. 데니스 노블은 이건 큰 오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이기적인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로보트가 아니다. 같은 DNA를 가진 일란성 쌍동이도 태어난 후에 다른 삶을 산다. 같은 DNA를 가진 몸의 세포도 그 위치에 따라 눈이 되고 심장이 되고 뼈가 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은 과학이 아니라 은유다. 우리는 반대로 DNA를 무력하게 갇혀있는 죄수나 정보를 담은 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기 집에 대한 설계도가 있다고 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이 설계도를 보고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서 집을 만들 것이다. 재료를 구해오고 땅을 구매하며 관계기관에서 허락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설계도가 있으면 그 설계도가 혼자서 마법을 일으켜서 집을 짓는게 아니라는것을 알고 있다. 집은 어찌보면 집을 짓는 사람들이 편의상 정보를 적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집을 짓는 것은 역시 사람이고 인간사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집에 대한 설계도는 집에 대한 모든 지식을 적어 놓을 수도 없다. 모든 지식이란 무한히 많기 때문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은 설계도에 적혀있지 않다. 따라서 지구인의 설계도를 혹시나 있을 수도 있는 화성인이 가지게 된다면 그는 그것만으로는 집을 제대로 짓는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못은 망치로 박는다던가 콘크리트가 뭔지가 설계도에 써져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음악을 담은 CD라던가 생명의 지식을 담은 DNA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CD가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다. DNA가 생명을 만드는게 아니다. 그것은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정보를 써놓은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다. 그것들은 반드시 올바른 해석도구를 요구하므로 음악과 생명을 만드는 시스템의 중요하지만 작은 일부일 뿐이다. 씨뿌리고 농사짓는 농부는 씨가 곧 작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과의 무수한 상호작용끝에 씨는 작물이 된다. 씨가 곧 농사가 아닌데 어째서 DNA가 생명의 전부일까?

 

우리는 환경을 무시하도록 교육되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환원주의의 폐해다. 환원주의는 자꾸 어떤 부분에 집중하게 만든다. 모든 것의 원인이 하나의 부분에 몰려있는 독재적인 구조를 당연시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수 많은 것들의 조화로 말하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게다가 환원주의는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 존재론을 가정한다. 즉 전체의 부분은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없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걸 이렇게 한번 나눠보자라고 간단히 말할 때 우리는 그런 존재론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으로 이뤄져 있고 뇌는 뇌세포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그런 환원주의적 관점은 때로 좋은 근사일 수 있어도 여전히 근사이며 때로는 아주 나쁜 근사일 수 있어서 큰 오해를 만들 수 있다. 

 

데니스 노블은 이 책 전체에서 여러가지 예를 들어 이런 사실들을 보인다. 길게 설명하고 있는 예중의 하나는 가상 심장 네트웍 모델인데 이는 이것이 그가 전공한 문제이기 때문이지만 사실 뇌과학을 전공해서 비슷한 이론에 익숙한 나도 엄청 흥미롭게 읽을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비전공자들은 좀 따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게 핵심은 아니니까. 

 

핵심은 어떤 것들은 그 부분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전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장의 경우 심장의 리듬은 리듬을 만드는 어떤 세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리듬이 없는 부분들이 모여있을 때 리듬은 태어난다. 거의 같은 원리는 근육을 조정할 때도 뇌에서 신호를 보낼때도 작동한다. 골수 환원주의자들은 전체를 진짜 부분으로 나누려고 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처럼 끝없이 작게 세상을 나눈다. 그 작은 세상의 세세한 정보가 전체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나 생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엉성한 모델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엉성한 세포나 엉성한 세포막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엉성한 부분들이 집단적으로 모이고 더 큰 규모의 외부 영향이 있을 때 어떤 사건이 생기는가를 연구한다. 이는 우리가 관심있는 중간부분을 직접 파고드는 연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위에서 말한 집의 예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우주공간에서 서울같은 대도시에 빌딩들이 올라가는 것을 시간을 빠르게 해서 본다고 하면 그건 장관일 것이다. 산이었던 곳이 깍이고 집이 들어서더니 금새 빽빽히 아파트 빌딩들이 들어선다.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사회현상이고 인간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이것은 모두 건물설계도라는 종이 한장이 만들어 내고 있는 장관이라고 하면 말도 안되는 단순화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파도와 같은 현상이다. 생명의 리듬이다. 

 

데니스 노블은 음악이나 리듬이라는 비유를 좋아한다. DNA는 지배적 독재자가 아니라 생명현상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환경안에서 여러가지 현상들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문맥에서 DNA는 절대적이다. DNA는 짧은 시간안에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DNA 절대결정론은 틀리다. 우리는 엄마의 난자가 제공하는 세포질을 가지고 엄마의 자궁안에서 성장해서 인간으로 만들어 진다. 즉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부터 이미 받는다. 그런 환경없이는 DNA란 그저 생명없는 분자조각일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은 단순히 생명이 아니다. 데니스 노블은 그것을 과학하는 일반론으로 펼친다. 과학적 접근방식에 대해서 그는 미들아웃이라고 자신의 접근법을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또한 과학에서 멈추지 않는다. 철학과 가치관으로 그는 비환원주의를 확대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컴퓨터 앞에? 당신의 뇌 안에? 뇌 중에서도 전두엽 어딘가에? 

 

환원주의의 폐해는 어디에나 있다. 환원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우리는 잃어버린 관계를 복원하게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뻔한 곳이며 바뀔 없다는 우리의 지적 오만을 버리고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책을 불교의 십우도나 에카르트의 신비주의에 대한 소개로 끝내는 데니스 노블이 의도한 바는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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