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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론자(부머)와 비관론자(두머) 속의 편견

by 격암(강국진) 2024. 1. 5.

AI에 대해서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로 나뉘어 의견을 낸다는 식으로 언론이 보도하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무슨 공산주의자 사상검증하듯이 이 분은 낙관론자입니다라던가 비관론자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일이 많은 것이다. 학자들도 스스로 낙관론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으므로 나는 경고를 위해 비관론의 목소리를 냅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관행은 중요한 질문에서 눈을 돌리고 있으며 그것은 기득권자들의 시각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가능성이 크다. 

 

우선 한가지 문장에서 시작해 보도록 하자. 기술적 세부 사항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는 AI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I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여기서 문제와 새로운 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친 이유는 물론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AI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풀 문제가 있어야 AI가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장애인에게 티비의 화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듯 문제가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풀어야 할 문제가 있는가 그리고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에 대한 고민없이 막연히 AI가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전세계에서 자동차는 해마다 1-2백만명의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어떤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 자동차 사용을 중지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자동차가 해결해 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동차없이도 행복한데 자동차는 1-2백만명의 사람을 해마다 죽일 것이다라고 예측이 나온다면 당연히 자동차는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왜 AI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시대적 과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가를 잘 보여준다. 

 

새롭다는 것은 이 점을 증폭시킨다. AI는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이제까지 나온 다른 기계와는 다른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차이가 뭔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애초에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언제나 문제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들을 우리가 가진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지금 가진 문제들의 대부분은 이제까지의 방식으로는 해결이 잘 안되던 것이다. 

 

왜냐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있으면 이미 해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 이 글이 던지는 진짜 질문이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단백질 접기 문제같은 과학적 난제가 있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랜동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해결이 안되던 것인데 AI의 방식으로 최근 해결된 바 있다. 이 예는 결국 이제까지 안풀리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을 때 그것이 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AI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도 이런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절대로 풀리지 않던 난제들이 AI의 방식이라면 풀릴 것도 같다는 것이니 갑자기 엄청난 발전들이 쏟아질 것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새로운 약을 만들고, 상온 핵융합기술을 완성한다는 따위의 일에 AI를 쓰는 것도 물론 아주 중요하고 훌룡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들이 그것뿐일까? 대표적인 난제에는 경제가 있다. 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은 복잡하고 빠르게 상호작용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환원주의적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는 결과를 잘 내지 못해 왔다. 그래서 경제학은 우울한 학문이고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가 결코 경제를 살릴 것을 보장할 수 없는 학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AI 방식은 어떨까? AI는 최초로 경제 운용에 있어서 실질적 해법이 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을까? AI는 빈부격차의 축소라던가 출산률 문제같은 것에 대해서 추상적 공약만 남발하고 돈은 나가며 결과는 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을 수 있는 방식을 데이터 속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왜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로 사람을 양분하는 일이 기득권자의 편견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가를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자기 자신은 잘 보지 못하므로 이걸 위해서 과거의 발명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서양에서 천년래 최고의 발명으로 꼽힌다는 금속활자인쇄기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그 기술에 대해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로 사람들을 양분하고 그 기술에 대한 논의를 이끄는 것이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보편화되기 전에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는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낙관론자 : 책을 싸게 대량으로 양산하는 일은 큰 사업이 될 것입니다. 이 기술은 모두가 값싸게 책을 살 수 있고, 출판 사업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술입니다. 

비관론자 : 책의 양산은 지식의 저질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더구나 지식의 대중화는 어리석은 민중들로 하여금 위험한 사상에 물들게 하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며 그것은 국가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금속활자인쇄기술이 만든 혁신의 뒤에 있는 우리는 이런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바로 민중의 시각이다. 위의 논의는 사업을 하는 부자들이나 자신들이 지배해 온 학계나 정부를 더이상 조정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엘리트내지 귀족의 시각인 것이다. 거기에는 책의 대중화가 민중을 어떻게 바꿀까라던가, 지식의 부족으로 민중이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가같은 시각은 없다. 논의 자체를 당대의 기득권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문제에 대한 논의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와 꼭 함께해야 하고 그것이 실종되었을 때 그런 논의가 기득권 중심으로 흘러가기 쉬운 이유다. 우린 이미 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므로 만약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기한 방법이라면 (이건 사실이 아니지만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대중적으로 우리의 문제, 우리의 소원을 찾자면 그 문제는 대중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인구의 몇%도 안되는 사람들의 사업이 커지는 문제나 사회적 안정성 운운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을거라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을 곧잘하고는 한다. 왜냐면 질문이 있으면 답은 찾아질 가능성이 있지만 질문자체가 없으면 답이 나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AI가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게 하고 싶으면 우리는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를 다시 점검하고 AI가 정말 그런 것도 해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거꾸로다. 돈을 벌고 싶은 기업이 비지니스적 태도를 가지고 AI를 개발하고 있다. 그 AI가 풀고 싶은 문제는 다양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통장 잔고를 늘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될 가능성은 아주 크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록 AI의 독점문제가 심각해 질 것이다. 기업가가 공장을 독점하면 노동자의 처지는 나빠진다. AI는 어떤가? 

 

AI는 구글의 데이터 센터에서 전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조절해서 에너지를 절감하고 돈을 벌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것을 국가예산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효율을 높이는데 사용할 수는 없을까? 왜 그런 연구는 없을까? 왜 그런 것부터 안할까? 그것은 국가 예산을 어디에 쓰는가는 권력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라 특히 기득권들이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없앨 것을 고민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AI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을 열심히 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인간과 AI를 경쟁구도로 놓고 공포에만 떠는가? 

 

AI의 방식의 핵심은 데이터의 분석이다. 그래서 이걸 두고 권력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데이터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했을 경우 AI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질서, 이유를 쉽게 찾아낼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감추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어디서 누군가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비결 하나를 가지고 편하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하자. 그런 정보를 온 국민이 다 알게 된다면 그런 불로소득자는 더이상 놀고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판례를 전부 디지털화하고 그걸 전부 읽은 AI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평가를 하게 한다면 파렴치한 행각이 즉각 들어나는 법조계가 되고 그러면 거기서 권력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복잡한 데이터의 뒤에 숨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의 권력이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이다. 언론의 권력, 정치인, 경제인의 권력, 공무원의 권력은 다 어느 정도 이런 구조속에 있다. 그리고 AI 기술의 핵심은 그 구조와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있다. 

 

물론 AI가 세상 문제를 다 풀지는 못한다. 그러나 AI가 푸는 문제를 어딘가에 한정하는 시각은 AI의 진정한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어느 정도 기득권자들이 왜곡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낙관론자라는 말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시대적 문제의식없이 그런 말을 쓸 때는 AI를 일종의 덤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말해 보자. 당신은 한달 후면 죽을 거라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기존의 약은 듣질 않는다. 그런데 새로운 방식의 신약이 나왔다. 시간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한 달안에 다른 새로운 방법이 생길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도 그걸 먹으면 어쩌면 당신이 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단순히 낙관론자인가? 어찌보면 그 약을 안먹는 사람이 바보 아닌가? 

 

나는 이런 비유가 상당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기후와 환경은 내가 젊었던 30년전과 비교해도 이미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나는 세계가 일종의 정보 적체 현상에 빠져서 문명의 붕괴 직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일반 개인은 물론 심지어 교수나 언론사 기자도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정치며 경제가 정상일 리가 없다. 2008년 미국 경제위기때 역사에 없는 돈을 풀면서 이래도 되냐고 미국 사람들은 떨었다. 하지만 지난 번 코로나 위기때는 더한 돈을 풀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했다. 미국만 그런가 유럽 중국 러시아 일본 어디나 다 미쳐 돌아가는 것같다. 환경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선진국 정부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적 빚을 지고 있다. 정말 우리는 시한부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정말 문명이 붕괴하는 거 아닌가? AI의 위험성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좀 더 절박하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AI를 인류의 희망이라고 본다. 왜냐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점점 더 깊어져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문제해결법인 AI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시각만 가지지 말고 우리는 다시 우리가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절대 풀릴 수 없었기 때문에 체념하고 있던 것도 어쩌면 이 새로운 방식으로는 해결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를 명확히 인식할 때 그걸 풀 방법의 가치가 명확해 진다. 그런 것없이 낙관이네 비관이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을 넘어 위험하다. AI를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해야 할 복잡한 무언가로 여기게 만든다. 이해없이 그냥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괴물이 풀려나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언제 AGI가 나오나, 언제 AI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가, 언제 AI는 인간을 능가하는가 같은 질문들은 우리를 진짜 질문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진짜 질문은 우리가 풀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푸는 것이 지능이다. 남의 문제를 푸는 것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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