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
AI 시대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그것이 왜 꼭 와야만 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근대를 알아야 한다. AI 시대에 대한 이해는 근대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뤄지는데다가 지금의 시대가 가지는 문제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특징들은 나중에 AI 시대의 특징들을 설명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근대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 시대와 근대시대의 차이는 많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다양하게 근대의 시작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예술적 철학적 분야에서 어떻게 근대적 정신이 시작되었는가를 우리는 따로 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서 민주주의제도의 발전이나 개인주의라던가 인간 중심적 예술의 시작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우리는 한가지 요소가 근대로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뉴턴의 고전역학이었다.
뉴턴 역학은 다른 무엇보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다. 즉 그것은 과학적 설명을 수학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만큼 분명하게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하게 만드는 특징이 없다. 본래 과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리며 철학과 구분되지 않았지만 뉴턴 역학이 나온 이래 형이상학과 개념적 명확성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철학자로 분류되었고 과학자는 엄밀하게 측정된 양들간의 수학적 관계를 연구해서 새로운 자연법칙을 찾아내거나 그런 법칙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구성해 내는 사람들을 의미하게되었다. 뉴턴이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에 기반해서 케플러의 법칙들을 설명했듯이 말이다.
엄밀하게 측정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학적으로 구성된 과학적 설명은 예술작품이나 철학적 논의같은 인문학적 작품과는 다르다. 과학적 설명은 기본적으로 그 기반이 되는 자연법칙의 수정이 있지 않은 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수천년전 고대 그리스에서도 참이었고 지금 여기서도 참이듯이말이다. 이와는 달리 어떤 예술이나 철학적 주장은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완전히 부정되지 않고 다른 예술과 철학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21세기 철학을 가진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공자의 철학을 잊어도 좋다고 말해지지는 않는다. 이는 과학이 가진 배중률적 특징과는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 두 개의 옳은 과학이 존재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과학 이론이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틀린 것이고 결국은 부정되어 철저히 잊혀지게 된다. 우리는 역사적 관심에서가 아니면 천년전이나 이천년전의 과학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심지어 19세기의 화학에도 관심이 없다.
과학 지식의 이러한 특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감정을 주지만 이것이야 말로 근대로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든 특징이다. 이 특징은 한가지 결과를 낳는다. 한번 발명된 것은 두 번 발명될 필요가 없고 한 번 증명된 것은 두 번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들어진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더 복잡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문명의 발전이 근대과학이 시작된 이래 그토록이나 빨랐던 이유다. 뉴턴 과학이래 지식이 누적되는 속력은 전근대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공장을 통한 상품의 대량생산이나 표준화가 도입된 이후의 산업발전도 결국 뉴턴 과학의 수학적 특징을 반영한 정신에 따른 것이다. 뉴턴이 살았던 계몽주의시대가 산업혁명 시대보다 앞서 존재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정신적 변화가 없이는 산업의 혁명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산업혁명은 결국 대중교육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없이는 산업혁명도 계속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적 결론을 맹신하면서 그 위에 철학적 논리를 쌓아올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은 사소한 해석의 변화로도 무너지는 탑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이것은 수학적 원리들이다. 구구단을 써서 더 복잡한 계산을 할 때마다 구구단이 정말 맞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엄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수학적 법칙은 일상어로 말해지는 철학적 결론과는 달리 그 의미가 명확하고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지식의 탑이 쌓여지는 속도가 전혀 다르다.
뉴턴 역학의 발표이래 분명해 진 것은 또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건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잡한 공식 하나를 외우면 긴 계산을 건너 뛰고 결론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편리한 공식을 증명한다. 즉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과학적 사고는 단순히 과학이론을 만드는 일을 넘어서 근대적 사고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회를 하나의 기계로 보고 사회를 하나의 법칙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보게 되었다. 사회는 이제 원래 그렇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어떤 기계나 시스템이라는 시각이 강화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회계약론이 나왔고 프랑스는 혁명으로 사회를 재설계하려고 했으며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통계적 자료를 통해 사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런 근대 사회에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필요한 시스템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 시스템은 편리한 공식처럼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이제 모두가 다 농사를 짓고, 하수구를 청소하고, 신발을 만드는게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채소를 주고 하수구 청소 서비스를 제공하며 신발도 제공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 일할 것이고, 우리가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 수록 인간은 더 번영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순환하거나 그대로 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점점 더 좋아지는 진보하는 곳이다. 그 미래 시스템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 평등하게 취급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관습적 억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 내부의 구조를 몰라도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면 상품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기계적인 시스템이 된 사회는 우리가 그 구조를 다 몰라도 제대로 된 스위치를 누르면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라는 부분이다. 종종 그 객관적 성질때문에 잊혀지지만 과학적 방법은 인간을 그 핵심으로 한다. 왜냐면 자연을 관찰해서 데이터를 얻고 그 속에서 법칙을 찾아내며 그 법칙을 기반으로 과학적 설명을 구성해 내는 것은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없이 과학이론이 만들어 질 수는 없다. 누군가가 가설을 제출하기 때문에 그 가설을 검증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에게서 온다. 과학적 가설은 몇천년전에 기록된 성스러운 책에서 찾을 수 있는게 아니다. 인간이 상상력을 가졌고, 답이 될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졌기에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중심적이다.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건설하고 구성할 수 없다.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더 좋은 설계도도, 어떻게 하면 체스게임을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더 좋은 답도, 어떤 수학공식을 증명하는 방법도 모두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다. 적어도 AI 시대 이전까지는 그랬다.
과학적 사고가 나아가 그것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가 구성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떤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하게 되면 그 거대한 시스템을 기초부터 다시 구성하는 일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된다. 그것은 너무나 긴 노력끝에 쌓아올린 탑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과학은 점점 더 높은 탑을 쌓는 것처럼 선형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면서 비선형적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이 지적한 것이다. 온갖 과학적 설명들을 만들어 낸 후에 과학적으로 설명을 구성할 수 없는 현상이 생겨도 과학자들은 쉽사리 그들의 과학을 기초부터 수정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정상과학이라고 부르는 이미 쌓아 올려져 있는 과학지식의 시스템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엄밀한 데이터에 기초하며 따라서 본래 매우 혁신적이다. 기존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데이터가 증가함에 따라 결국 어느 순간 정상과학이라고 불리던 기존의 과학은 포기되고 새로운 자연법칙에 기초한 과학이 등장해서 옛 과학을 대체한다. 고전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체되었듯이 말이다.
문제는 과학적 사고의 특징은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 전개되었고 그런 곳에 존재하는 시스템은 과학보다 바꾸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제 시스템을 점점 더 복잡하고 거대하게 쌓아올렸을 때 그 경제시스템을 우리는 언제 그 기초부터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설사 그 경제시스템이 주기적으로 파산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바꾸기 어렵다. 변화는 표면적일 것이다. 왜냐면 너무나 많은 제도를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시스템 안에서 교육받고 직업과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뿌리부터 바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민주적으로 지지받아서 쉽게 일어날 일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개혁하는 일이 힘들다면 사회가 구성된 형식을 기초부터 개혁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것이 당연하다. 설사 의도가 좋다고 해도 제대로 되기 힘들며 공산주의의 역사가 이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근대는 기본적으로 점점 보수적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보수성은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은 방정식이 아니다. 뉴턴 역학을 양자역학으로 바꾸는 것은 종이위의 방정식이 바뀌는 것이지만 거대하게 구성된 자본주의 시스템 같은 것을 원천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어렵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거꾸로 자기가 만든 시스템에 억압되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 번영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스템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떤 시스템이건 시스템은 더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해 혹은 사람들의 비판에 따라서 차차 더 커지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시스템은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어도 개혁하기가 어렵다. 물류시스템이나 대학입시시스템 혹은 의료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만해도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때문에 고통당하면서도 그걸 고치지 못한다.
지식의 시스템이건 사회적 시스템이건 그 시스템이 거대화됨에 따라 이제 위대하다던 인간은 점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식이 너무 많아서 인간이 그걸 다 검토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회적 시스템이 너무 거대해져서 인간이 그걸 개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식의 폭발적 증가와 사회적 복잡성의 폭발적 증가는 점점 더 많은 댓가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지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전문화다. 이제 누구도 모든 걸 공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야를 나눠서 그 분야만 공부한다. 그래도 공부할 것은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적인 질문이 생기면 그 전문가들에게 의존한다. 항공기를 만드는 법에서 케익을 만드는 일까지 현대 사회는 전문가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렇게 전문화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그리고 그렇게 전문화된 지식은 어떻게 다시 합칠 수 있을까? 물리학자와 화가가 만나서 예산 배분을 논한다면 서로의 분야를 모르는 두 사람은 예산을 어떻게 나눠야 할까? 댐을 건설하려면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공학적 분야등 여러 전문 평가가 필요한데 그 전문가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의견들을 합칠까? 게다가 사회가 이렇게 전문화되었는데 정치인을 뽑는 투표는 어떻게 할까? 정치인들은 전문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리학자나 화가를 일반인 투표로 뽑지는 않는다. 핵무기를 만드는 법을 투표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인은 일반인 투표로 뽑을 수 있을까? 어떤 정책이 옳은가를 알아내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이제 세상은 마치 인간이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버튼들을 가진 기계처럼 변했다. 인간을 위한 법인데 법이 너무 복잡하다. 인간을 위한 교육과 의료시스템인데 그것도 너무 복잡하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려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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