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도구는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AI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AI란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답이 있으며 세상에서 말하는 흔한 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올바른 AI의 용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있다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자연히 AI를 써서 그걸 풀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AI의 용도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가 가진 가장 큰 문제들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재의 세상은 굉장히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정책이 옳은가를 긴 호흡으로 말할 수 없다. 좋은 예는 트럼프의 보호무역과 코로나 재난이다. 우리는 갑자기 어떤 환경속에 놓이고 위기에 처한다. 그럴 때는 긴 호흡으로 그러니까 10년 20년의 호흡으로 좋은 정책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 재난처럼, 트럼프의 관세 통고처럼 갑작스런 위기가 닥쳐왔을 때 이에 제대로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뭘하는가 이상으로 적응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너무 늦은 대응은 대응하지 않은 것과 같다. 사소한 문제를 엄청난 위기로 만든다.
또 하나는 현재의 세상에서는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성이 너무 높아져서 과잉생산의 문제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점점 더 물건을 소비할 시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정책의 뿌리도 이 과잉생산에 있다. 미국은 더이상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주지 않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선언이다.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생산성을 올리고 그것이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믿음은 무너지고 있다.
사실 이 두 개의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빨리 변할 수록 우리가 생산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소비자와 연결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수박을 생산하는 것보다 수박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이 더 어렵다. 계란이 부족하다고 해서 생산을 늘렸는데 생산이 늘어날 즘에는 계란이 남아돌 수 있다. 이제 세상에는 변하지 않고 상식적인 게 거의 없다.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 보지 않고 나만의 절대적 정의만 따질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세상의 문제가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흔히 AI를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내지 기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AI는 그저 수박을 인형을 영화나 글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AI를 일하는 노예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AI가 노동자를 대체하고 생산을 더 빨리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은 생산보다 소비가 더 문제다. 고립된 나의 능력이 아니라 연결과 소통이 중요하다. AI를 생산성 도구로 사용하면 그건 마치 물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나라에서 우물을 점점 더 빨리 파는 것과 같아진다. 이렇게 AI를 쓰면 세상이 가진 문제는 금새 훨씬 더 심각해질 뿐일 것이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경제불황은 더 심해질 것이다. 실직한 사람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AI의 발전을 멈춰서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AI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AI는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인간이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AI는 연결과 소통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AI는 언어이고 미디어이어야 한다.
최근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영화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다. 성공하기 전에는 누가 봐도 작은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았던 이 영화는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인 영화들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디즈니 영화는 물론 마블 코믹스의 영화도 그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욱 더 주목받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한 영화의 성공이 더 많은 돈을 들였다거나 더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쓰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는 심지어 이런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디즈니의 무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시스템적인 문제이므로 앞으로도 디즈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을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의 애니메이션은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지금의 디즈니 시스템으로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이 공개된 엘리오 같은 작품을 계속 내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AI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AI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단순히 기술력 결과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엔지니어가 새로운 AI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면 그 AI가 세상을 바꾸게 된다. 그러니까 대중이나 사회보다는 뛰어난 천재 엔지니어가 세상을 바꾸는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 효과 기술과 많은 돈으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 영화를 그만큼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나라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AI는 하나의 게임, 하나의 문화적 작품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즉 수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의 설득력이 그 AI의 힘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 많은 것들이 제대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코로나 사태때 미국과 중국은 반대의 이유로 사회적 재난을 키웠다. 미국은 개인주의적 사고로 중앙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고 우기는 개인을 말리지 못해서 재난이 커졌다. 중국은 중앙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정보는 숨기려고만 하다보니 문제가 커졌다. 이 두 나라는 코로나 사태때 큰 피해를 당했지만 그것이 돈과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주의적인 사고도 아니고 중앙집중적인 사고도 아니다.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질서를 창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사고가 필요하다. 그것은 깨어있는 개인도 필요하고 그 깨어있는 개인들이 잘 연결되는 것도 필요하다.
강력한 부품들로는 강력한 힘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공동체 앞에 있는 문제를 빠르게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참여하고 조직되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흘러야 하고 그 정보가 중앙없이 답에 도달해야 한다. 누군가가 중앙에서 정보를 모두 모으고 제대로 개념화해서 결론을 내린 다음 판단을 중앙에서 말단으로 내려주기를 기다리면 너무 느리다.
AI도 마찬가지고 설득력이 있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AI는 개개인의 생산성을 늘리는 기계 노예처럼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을, 개인과 서비스를 연결해 주는 전화기와 미디어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독립된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결, 사람과 기계의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 연결의 방식과 창발적 질서가 중요하다. 미국의 디즈니가 케이팝 데몬헌터스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있는 시스템의 조각들이 각자 자기의 권리와 영역을 고정시키고 변화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연결이 가져올 장점은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그걸 지금까지는 풀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AI라는 새로운 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길이 생기지는 않는가? 그 새로운 가능성은 어떤 기술적 자원을 요구하는가? 그런 질문의 연속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야 한다. 지금하고 있는 걸 단순히 더 잘하는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근대화의 예로 말하자면 농부가 기계를 써서 농사를 짓는게 근대화가 아니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전에는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 근대화이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다가 도시에서 살게 되는 것이 근대화이다. 물류가 바뀌고 소통의 방식이 바뀌면 모든게 바뀐다. 전화기가 발명된 이후에 자동교환기 또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전화가 세상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자동교환기는 연결의 방식을 바꿨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간이 하고 있는 수동적 정보교환의 역할을 AI가 대체할 때 세상을 크게 바뀔 것이다. 연결의 방식이 또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AI는 기계인가 문화인가? 그리고 그 답은 물론 문화다. 농촌의 삶과 도시의 삶이 다르듯 우리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더 강력한 농기계가 근대화가 아니듯 단순히 더 강력한 AI가 AI 시대를 여는 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의 메시지를 AI로 표현해야 한다. 제대로 문제를 구성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새로운 연결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제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으로 채워진 마블 코믹스의 영화도 메시지가 엉망이면 재미가 없다. 기술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그래서 미국의 미래를 좋게만 보지 않는다. 미국의 대중은 변화를 원하지 않고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근대화의 비전을 대표하던 미국은 코로나 사태때처럼 개인주의적 사고 때문에 AI 기술의 선두주자가 될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 기술을 잘 쓰는 첫번째 나라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트럼프같은 지도자가 스스로 AI 기술이 제대로 쓰이게 될 미래를 막아버릴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자가 만들어 졌다고 갑자기 문명이 만들어 지지는 않는다. 그 문자를 가지고 작품을 쓰고, 법전을 기록하고, 발명을 기록할 때 문자의 힘이 진짜로 발휘되고 문명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토판이든 파피루스든 종이든 인쇄술이든 새로운 기술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 문자로 써진 정보고 보존되고 유통된다. 그리고 그럴 때 문자의 진짜 힘이 해방된다.
AI도 마찬가지다. AI는 문화다. AI는 언어다. 우리는 그걸로 어떤 메시지를 쓰려고 하는가? 어떤 것이 정말 우리가 당면한 문제인가? 우리는 어떻게 AI를 대중화시킬 것인가? 이런 문제를 AI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바라볼 때 AI의 진정한 힘이 해방될 것이다. 그때가 진정한 AI의 시대가 열리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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