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긱뉴스에 올라온 블로그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천체물리학자인 그는 기계는 괜찮아요, 나는 우리가 걱정됩니다라는 글을 통해 AI를 써서 공부하고 논문을 쓰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걱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AI는 다른 많은 기계들처럼 편리한 기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육의 핵심은 불편함에 있습니다. 연습문제를 풀어보지 않고 답을 보는 사람은 문제푸는 능력을 배울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는 대학원과정을 지내면서 AI의 도움을 받아 더 많은 논문을 쓰는 사람이 과연 계속 학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기억력을 약화시키고 진정한 앎대신 겉보기 지혜만을 줄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논점은 세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로 글은 기억의 외주화이므로 영혼안의 살아있는 앎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둘째로 텍스트는 질문을 받아도 같은 대답만 하므로 대화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글은 아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읽히기 때문에 적절한 청자를 기다려서 말하는 살아있는 로고스보다 열등하다는 겁니다.
이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문자와 AI의 유사성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앎을 외주화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AI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문자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과 겹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자 보편화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AI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요? 그 답은 아마도 AI가 문자다 혹은 AI가 미디어다라는 말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는 것같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글은 말하기와는 달리 기억을 외주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짜로 아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계속 암기해서 마치 같은 책을 백번쯤 읽어 그 내용을 샅샅히 기억하고 그 안의 내용을 깊게 이해한 것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책을 보통 한번 읽고 다음 책으로 갑니다. 심지어 스스로 쓴 글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식의 앎은 말을 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를 만들겁니다.
진짜로 아는 거라면 그 앎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도전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옳은것같은 말을 죽 나열했지만 그 결과가 엉뚱한 논증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데 왜냐면 그 나열속에서 한번만 알아차리기 어려운 비약을 하고 나면 결과가 엉뚱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긴 수학계산도 중간에 한번만 틀리면 결과가 완전히 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종이위에다 길고 긴 논증을 한 것을 기록한 책은 사실 어느 정도 위험한 지식인 셈입니다. 대화가 안되고 그냥 종이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압니다. 같은 것을 말해도 온갖 경험을 통해서 그걸 아는 사람이 하는 말과 그저 아는 사람의 말을 외운 사람의 말은 다릅니다. 뒤집어 말하면 같은 말을 해도 알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는 말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구지선사의 이야기라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그런 말을 하지요. 구지선사는 누가 무슨 말을 묻던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답했다고 합니다. 그걸 본 시종 소년이 그걸흉내내어 질문에 엄지손가락을 답을 하자. 구지선사는 그 손가락을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소년은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선불교에서 구지의 한 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구술문화속에서 컸던 지식인인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퍼지는 상황에서 문자가 가져오는 위험을 느낍니다. 엄청난 정보를 쉽게 기록하고 기억하게 해주는 기술인 문자는 뜻도 모르면서 그저 주절주절 말만 하는 사람을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문자의 위험성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I가 교육에 있어서 독이 될거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자가 나오기 전에 구술로만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적인 수준이 있었다면 이제 문자를 가지고 훨씬 더 어려운 것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시 한번 시행착오의 길일 것이고 종류는 좀 다르지만 훈련의 길일 겁니다. 그래서 교육적 효과가 발생합니다.
실제로 20세기나 21세기 한국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고대 소크라테스가 보았다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뭘 배우면 얼마나 오래배웠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서 유치원부터 치면 거의 20년을 공부하고, 그래도 그게 별게 아니라는 말을 듣습니다. 구술로 고층 빌딩이며 제트로케트며 상대성이론같은 어려운 이론을 만들거나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나 부분과 전체같은 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린 그런 수준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구술만으로는 살기 힘들어 진겁니다. 문자가 가지는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 목표를 더 높게 삼았기 때문에 교육효과가 발생했던 겁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목표를 아주 낮게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AI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지금까지 우리가 하던 일을 기계에게 시키고 자신은 쉴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물론 교육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안하는데 무슨 교육이 되겟습니까. 그건 마치 전근대 시대의 농사꾼이 농사기계를 사는 것이 근대화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근대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문자를 배워서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을 썼듯이 우리는 이제 AI를 배워서 그걸로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 이전 시대의 사람이 보기에는 신적인 존재나 할 수 있을 것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구술문화속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는 문명사회를 만든 문자문화속의 사람이고, 기계문명, 근대문명속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는 AI 시대의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금의 사람들은 대개 AI를 자기 자신과 동떨어진 기계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문자가 지금의 인간들에게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와 떨어질 수가 없고 인간의 언어는 21세기쯤에 이르면 거의 다가 문자로 인해서 생겨난거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즉 문자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화되어 있으며 우리는 문자와 우리 자신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상태정도가 되어야 문자의 진정한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글자를 읽으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읽는 것이 신기한 기술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밀라노에 갔을 때 소리를 내지않고 책을 읽는 암부로시우스 주교를 보고 놀랐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중세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 속력으로 타이핑이 되는 현대인을 보면 또 놀랄 겁니다.
AI 시대의 사람들은 문자가 그렇듯 AI와 함께 일하는 것에 있어서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는것과 AI가 아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수준을 보여줄 것입니다. 사실 AI를 인간의 새로운 전두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미 있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건 왜 이런 수준의 적응이 필요한가 하는 겁니다. 그 레벨이어야 달성할 수 있는 창의력과 생산력의 레벨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20세기의 사람들이 6개월 1년을 낑낑대서 논문 한편쓰던 과거를 아주 미개하게 보이게 만드는 레벨일 겁니다. 수천명이 수천억을 들여서 이룩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몇주일만에 해내는 능력이겠죠. 혼자서 흠잡을데 없는 윈도우OS를 만들어 내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육효과가 발생하기 시작할 겁니다. 뒤집어 말라면 그런 초인간이 되는 길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초인간이 되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이 글의 문맥에서 보면 그게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근대교육은 구술문화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인간이 되는 길이니까요.
이미 AI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근대의 성취를 목적으로 해서는 당연히 교육효과가 없고 인간은 하염없이 무능해지고 배울것도 없고 타락하고 게을러 질거 같습니다. 하지만 근대교육이 구술시대의 교육보다 훨씬 더 길고, 노동자는 강도높게 장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높은 목표를 세우면 아마도 AI 시대의 인간은 지금보다 더 바쁘고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수준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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