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일본, 다양한 신이 사는 나라.

by 격암(강국진) 2010. 2. 12.

한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친척분이 친구분들과 다녀가셨다. 일본관광을 좀 시켜드리고 싶은데 종교적 이유로 절이나 신사는 싫으시단다. 게다가 나이도 있으시니 젊은이들의 거리에 관심두실 것도 같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놓고 보니 딱히 볼게 없다고 싶을 정도로 일본관광에 있어 절과 일본신사는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신도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는 다르게 여러 개의 신을 가진 일본의 전통적 종교로 흔히 말하는 신사참배의 신사란 이 신도의 성전이다. 신사는 크고 작게 전국에 몇만개나 있다고 한다. 유명한 이세신궁은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위한 것이고 메이지 유신때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 졌으며 메이지 천황을 위해서는 메이지 신궁이 있다. 지금은 다르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은 신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신사는 동네마다 크고 작게 몇 개나 있고 우리 동네에서도 물론 그렇다. 


이제 신도의 신자를 자처하는 일본사람은 별로 없지만 신도는 일본 사람들의 삶속에 깊숙이 파고들어와 있다. 신도는 일본전국에서 수없이 치뤄지는 축제인 마쯔리와도 연관이 있다. 마쯔리에서는 미꼬시라는 가마가 행진을 벌이는데 이 미꼬시라는게 그 지역의 신을 숭배하는 행사다. 그러니 많은 마쯔리는 신을 숭배하는 잔치인 셈이다. 


보통 신사에는 커다란 동아줄이 달려 있는 종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동전을 던지고 종을 흔들고 기도를 한다. 대개 종교적으로 믿음이 있다기 보다는 뭐 좋다니까 하는 것이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신사를 찾은 사람은 점치는 뽑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미쿠지라고 불린다. 종교성이 어떻건 신사는 융성하다. 특히 신년에는 신사에 가서 신년기복을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이 되어 새해 첫날이 되면 신사는 엄청난 인파로 붐빈다. 


천황이 신으로 여겨졌다고 했지만 사실 신도에서는 뭐든지 신이 된다. 곰도 신이고 바위도 신이고 유명한 사람도 신이며 해도 신이고 출산도 신이다. 천황도 신이고 심지어 2차세계대전 전범도 신사에 모셔져 있다. 신사에 모시는데 다수결 투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원하는 신도가 일부 있으면 타종교의 신도 맘대로 가져올수 있다. 일본 신사에서 모셔지는 신에는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한 신도 있다. 


신도라는 종교는 무한히 복잡한 세상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원리를 찾아헤매지 않는다. 신도에는 교리도 없다. 세상을 창조한 원리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대해 설교하지도 않는다. 그냥 신을 존중하고 성실하게 대하면 그신이 나에게 힘과 복을 준다 뭐 이런 식이다. 이런 걸보면 일본 사람은 절대적 진리를 부르짓지 않는 철저한 회의론자인 셈이다. 그들은 절대적 원리나 규칙을 찾지 않는다. 일반화를 피한다. 


인간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윤리를 말하며 그런 사고 방식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말했지만 회의론적인 사고방식 즉 절대 원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고 방식은 큰 장점이 있다. 그것은 적응력이 크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적이다. 애초에 어떤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로 세상의 선악을 명백히 가를 수 있다는 생각은 세상에 선악따위는 없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중세기독교나 조선말기의 유교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 점은 분명하다. 


명백해 보이는 원리도 복잡한 세상에 적용하다보면 어딘가에서 비현실적인 면이 나타난다. 따라서 왜곡하고 숨기고 얼머부리는 일을 해야 한다. 권위주의가 번성하고 사람들이 따지지 못하게 막게 된다. 언뜻보면 모순이 있는 것같지만 그 원리를 잘 탐구하면 이해하게 된다고 말할 뿐이다. 


새로운 것을 보게 되면 이것이 우리가 절대시하는 원리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가 매우 당혹스러워 진다. 자칫하면 기존의 원리적 질서가 교란되고 말것이라는 공포가 번져서 새로운 것들을 막고 폐쇄적으로 바뀐다. 우리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악의 목소리라고 말해서 그것에 귀기울이는 자들은 처벌해야 한다고 할수 있다. 이교도라는 이야기나 사문난적운운하던 소리가 이것 아닌가? 사회를 지키는 정체성이 무너질 것이 겁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리와 충성으로 뭉치고 실용주의적인 일본인들은 어떤 변화를 받아들여도 그들의 정체성이 무너진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이 강조하는 덕은 의리와 충이지 머리모양이나 먹는 음식이나 장례 예절이나 사는 집이나 교회에 가는가 안가는가 따위가 아니다. 무너지면 곤란할 교리가 별로 없다. 뭘 받아들여도 일본인은 일본인이다. 주로 신경쓰는 것은 충과 의리 같은 인간적인 품성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동안에 일본천황의 명령에 따라 미군과 죽도록 싸우는 것이 일본인의 의무였지만 천황이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한 이후엔 미군에게 매우 다정히 대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애초에 미군이 악이라고 생각해서 싸운게 아니다. 의리와 충을 실천했을 뿐이다. 


만약 한국이 프랑스를 배우자고 하면 그것은 정말 뼈속 깊은 정신까지 다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전통은 내팽겨치고 프랑스 전통행사에 몰두하는 것이 한국식이다. 서양을 배우자고 하면 한국의 전통은 악으로 분류되어 밀어내야 할것으로 파악되기 쉽다. 말하자면 하나에 몰두하니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밀어낸다. 시비는 곧 선악이 되기 쉬워 이것이 옳다면,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것이 선한 것이라는 인식으로 혼돈되기 쉽다. 서로 다른 두개가 공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한국은 새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전통적인 것은 전부 낡고 유행이 지나 매력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다. 나라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한국적인 색깔은 점점 엷어져만 간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남의 나라의 것을 마구 들여오는데 그것 때문에 자국문화가 없어지지도 않는다.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를 금방 믿는 것 같은데 알고보면 불상이랑 십자가랑 나란히 놓고 같이 믿는다. 원리에 몰두하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을 수입하여 그냥 섞어버린다. 가장 서구적인 것이 많이 들어온 일본같지만 일본적인 것이 풍부하게 보존되고 즐겨지는 나라다. 한국에서는 한복이며 명절이 희미해지는데 일본에서는 전통명절이며 일본옷, 일본놀이가 지켜지고 인기를 누린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이는 주목할만하다. 한 사회가 발전하자면 항상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한곳에만 투자한 투자가처럼 결국은 한번의 위험에 무너지고 말것이다. 문제는 다양성은 종종 긴장감과 혼돈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사회의 안정성은 해치지 않으면서도 다양성이 존재할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해서 다양성을 유지하는 미국 시스템과 일본은 다르지만 일본도 경직된 사회같으면서도 상당한 다양성을 유지하는 나라다. 어떤 원리에 따라 경직되지 않고 자유롭게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도박이나 호색행위가 나쁘다는 개념도 서양보다 약해보인다. 충이나 의리 같은 것을 제외하면 도덕규칙도 보다 자유로운 것 같다. 미국과는 다른 차원의 방향에서 자유가 있는 셈이다. 사회적 타부가 작다. 이것이 일본이 성공하는 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매우 평등을 강조하고 획일성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게 보일때도 많다. 예를 들어 같은 학교안에서는 획일성을 주장하지만 다른 학교가 우리학교랑 다른 것은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라고 말해질수 있는 테두리안에서 강력한 질서를 주장할 뿐이며 테두리 바깥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관대한 것같다. 이 테두리는 반드시 일본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사람이 일본의 학교 하나를 보면 한국보다도 획일화된 것같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국의 학교를 평준화하고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한 반면 아주 여러종류의 학교가 있는 것이 일본이다. 그래서 국가규모로 보면 일본내의 다양성은 매우 크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과 매우 실용적인 일본이 각각의 방식으로 다양성을 성취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은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지 못한 것같다. 사람들은 사물을 선악의 개념으로 보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단 한가지 사안으로 선악을 갈라 버린다. 예를 들어 정부가 외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나 댐을 건설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찬반이 있을 수있다. 찬과 반으로 갈라져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 금새 많은 사람들이 경계선 저쪽편에 있는 사람을 악으로 파악한다. 바람둥이는 좋은 정치가가 될수 없다는 식의 판단과 같다.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은 파병에 찬성따위를 하는 인간이 제대로된 인간일리 없으니 다른 건 보나마나라고 판단하는 식이다. 다음에 다른 사안이 등장하여 전에는 반대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의견이 있어도 화합이 안된다. 왜냐면 그사람들은 ‘악’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사회적 논란은 하나가 아니고 계속된다. 이러다보면 매우 작은 규모의 조각으로 갈라져서 사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악’으로 낙인찍어야 마땅하고 도저히 이야기해서도 말도 통하지 않는 나쁜 사람으로 파악된다. 사회는 산산히 갈라지고 결국 다양성은 공존하지 못한다. 


모두가 이런다면 결국 패거리끼리 뭉쳐서 뒤를 잘봐주는 집단이 성공할 것이다. 한국사람은 미국처럼 서로 다른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권장하는 태도를 가진것도 아니고 선악의 입장에 잘 빠지지 않는 일본인들의 유연한 자세가 있지도 않다. 한국사람이 성격이 거칠다거나 화를 잘낸다고 말하는 외국 사람이 가끔 있는데 이건 이런것 때문이 아닐까? 다양성을 잘 포용할수 없다면 한국은 계속 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할것이며 선진국이 되기 힘들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