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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미국 이야기 1 : 쌍동이 빌딩 테러의 기억

by 격암(강국진) 2010. 2. 16.

911의 기억


2001년 여름, 나는 뉴욕대학의 신경과학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한가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가족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스라엘 생활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예나에게도 뉴욕이 보다 좋은 환경일 듯 싶었다. 뉴욕대학은 우리에게 맨하탄의 워싱톤 스퀘어 빌리지라는 아파트 단지에 아파트를 구해 주었다. 


한여름의 맨하탄은 무더웠고 뉴욕에 사는 내내 나를 괴롭혔던 아파트 창문으로 울리는 맨하탄의 소음은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맨하탄의 집세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아파트는 낡고 좁았다. 아파트에는 내 나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 시끄럽고 성능나쁜 에어컨이 방에 붙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성능나쁜 진공청소기는 거의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뉴욕사람들도 항상 마음에 드는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뉴욕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쳐서 때로 좀 건방져보인다. 심지어 웨이터도 그랬다. 


이와 같은 점을 제외하면 뉴욕은 매우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테러의 공포와 검색의 번잡함에서 벗어날수 있어서 좋았다. 집근처에는 악세서리가게며 전자상가며 희귀한 비디오가 있는 비디오대여점이며 재미있는 가게가 넘쳐났다. 길거리농구를 하는 흑인들을 보거나 브로드웨이에 있는 빵집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예루살렘에서의 시간이 언제 있었나 싶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기는 뉴욕사람들은 내 영어에 유태인 억양이 있다면서 웃기는 했다. 예루살렘의 흔적은 남아있었던 셈이다. 한인거리나 한인슈퍼가 있기 때문에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있다는 점도 좋았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로 맨하탄의 여기저기를 사진 찍었다. 브로드웨이와 42번가를 돌아다녔다. 뉴욕에는 볼곳은 무궁무진하다. 센트럴 팍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도 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있다. 차이나 타운과 월스트리트도 구경할 수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소호거리를 산책하면서 옷과 가구와 그림들을 구경할수도 있다. 볼곳이 많기 때문에 유명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내버려 둔곳도 많다. 가장 유명한 쌍둥이 빌딩의 전망대 같은 곳이 그렇다. 사실 맨하탄에 사는 우리가 유명한 곳에 모두 급하게 다 가볼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사니까 언젠가는 가보게 되지 않겠는가. 쌍둥이 빌딩이 설마 어느날 사라지기라도 하겠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뉴욕에 도착한지 한달쯤 되는 9월 11일의 아침 이었다. 뉴욕대학의 연구실로 출근하기 위해 나는 집을 나섰다. 나는 길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길한편으로 붙어서서 엄청나게 길게 줄을 서있는 것이었다. 다가가보니 줄을 선 게 아니다. 저 멀리 맨하탄 끝쪽 고층빌딩에 불이 나서 한쪽벽에 기대어 그걸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수학과 빌딩으로 돌렸다. 그런데 학과내부의 사람들도 불구경에 바빴다. 주변의 사무실 사람들이 맨 윗층 커피 라운지에 몰려 있었다. 알고보니 쌍둥이 빌딩에 불이 난 것이다. 처음엔 사람들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불구경을 했다. 불이야 언제나 나는 거니까, 사람이 죽기도 하겠지만 대도시에서 사람이 사고로 죽는다는 이야기 들을 때 마다 심각해져야 살수가 없다. 사고는 언제나 나니까.  


그런데 쌍둥이 건물 중 하나가 마술처럼 훅하고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곧 여자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시 남은 건물도 사라졌다. 아무도 눈으로 본걸 잘 믿지 못했다. 그날 오후쯤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영화 시나리오라고 써서 할리우드에 가져간다면 너무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서 재미가 없다고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현실이 영화적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면서 뭔가 말해보라는 듯이 눈빛을 나눴다. 그러나 한동안은 누구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쌍둥이 빌딩이,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날 911사건으로 알려진 쌍둥이빌딩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은 4대의 여객기를 납치했고 그 중 두 대가 쌍둥이 빌딩에 자살공격을 감행했다. 무너지는 건물이 남긴 침묵과 당황 속에서 나는 그제야 만삭의 몸으로 쌍둥이 빌딩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 예나와 놀러 간다고 말하던 아내가 생각났다. 황급히 전화를 돌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집으로 뛰어갔지만 아내와 예나는 찾을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는 불통이 되어버렸다. 나같이 안부를 묻는 전화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둘은 버스를 타지 못해서 그날 아침 쌍둥이 빌딩으로 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버스가 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힌 직후 버스운행이 멈춘 것이다. 역사적 테러의 희생자로 우리 가족의 이름이 명단에 오르는 운명은 아슬아슬하게 우리 가족을 피해나갔다. 


맨하탄은 사고현장에서 나오는 먼지로 덮혔다. 이 먼지는 유해할거라는 이야기, 남쪽에서 도망 온 쥐떼가 어느 대학 실험동 지하에 가득 차버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맨하탄을 떠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브로드웨이는 월가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으로 가득찼다. 모두 먼지를 뒤집어 쓰고 하얗게 된 머리를 하고서 묵직한 가방을 끌고 있었다.  


맨하탄 남쪽의 출입은 즉시 통제되었다. 그 통제선은 우리집에서 남쪽으로 불과 서너블럭 아래였다. 차이나 타운은 그 통제선 안쪽에 있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뉴욕대학에서 구호물품을 모았다. 나는 잡화점에 가서 양말을 잔뜩사서 구호물품 모으는 곳에 가져다 주었다. 일부 자원자가 그 짐을 가지고 간다기에 자원하려고 했으나 자원자는 충분해서 내가 그 장소에 갔을 때는 이미 짐이 떠난 뒤였다. 


후일 집계에 따르면 이 쌍둥이빌딩 테러 혹은 911 사건으로 2999명의 사람이 죽었고 24명이 실종되었다. 특히 많은 소방관들이 죽어서 사람들은 소방관들을 추모하며 꽃을 소방서에 바쳤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포함한 맨하탄의 많은 공터에서는 추모의 촛불 켜기 행사가 있었다. 우리집 근처의 소방서 앞에도 꽃이며 촛불이 놓여졌다.  


역사적인 테러는 많은 미국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공항에서는 검색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에서 내가 지긋지긋해 했던 그 검색이 미국에 온지 두달이 안되어 시작된 것이다. 신문방송은 연일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아프카니스탄 공격이 왜 비윤리적인가 혹은 왜 피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조심하는 것같았다. 


나와 사무실을 공유하던 한 교수의 부인은 아프카니스탄 출신이었다. 어떤 논리를 가졌더라도 그 부인 앞에서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해야 하고 그녀의 친인척 머리위에 폭탄을 퍼부어야만 한다고는 말하지 못할것이다. 911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은 우리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런 의견들은 소용이 없었다. 


전쟁은 시작 되었다. 911이 터지고 한달이 조금 안되는 10월 7일 미국은 아프칸을 공격했다. 아프칸에서 죽은 일반시민의 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으나 그 다음해 2002년까지 수천명의 아프칸 시민이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고통받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2009년 현재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프칸 전쟁의 상징이었던 빈라덴은 아직도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지나칠 만큼 겁에 질려있었다. 하루는 한 뉴욕대학의 여직원이 분필가루를 바닥에서 발견했다. 그녀는 생화학 테러물질이 아니냐면서 경찰을 불렀다. 테러리스트가 테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으며 그 건물에는 수백 명의 박사가 있었고 그 중의 얼마간은 의학박사인데도 그들은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 경찰을 불렀다. 마침내 경찰이 와서 슥 둘러봤을 때 물론 결론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건물을 탈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나는 내게 온 우편물들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탓다. 편지내용을 보려고 봉투를 열려고 하는 순간 한 미국인은 나에게 편지를 집에 가서 보라고 부탁했다. 그 봉투안에서 생화학테러 물질이 나오는 것이 겁난다는 것이다. 내가 테러리스트처럼 보였거나 생화학 테러를 당할 만큼 중요한 사람처럼 보인 것 같다. 몇몇 사람들이 가지는 공포의 정도는 내 상식으로는 좀 너무 심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 천명이 압살당했고 쌍둥이 빌딩처럼 엄청난 건물이 무너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911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911이 터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을 이해한 것과 현실이 상당히 차이가 있으며 특히 안보의 문제에서 자신들이 더 이상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또 다른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또 일어날수도 있지 않겠는가. 단 하나의 사건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크게 바꿨다. 이런 공포앞에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한 것이라던가 인간은 평등하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매우 허약한 신념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도 한동안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는 햇볕 잘드는 우리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귀여운 아이들과 노는 것이 대단히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 테러나 집단 학살 같은 것을 잊어버릴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란 본래 꽤 괜찮은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이 괜찮은 존재라면 세상은 별일 없을 것이다. 세상엔 악한 사람,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예외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귀여운 아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튼 테러리스트도 한때는 저런 아이들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때는 저런 아이들이었다. 사람은 본래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항상 이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의 뉴스들은 매우 유해한 것 같다. 뉴스는 대개 흉악한 나쁜 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세계에서 정보가 모이는 요즘은 별별 상상조차 할수 없는 흉악범죄에 대해 뉴스가 올라온다. 우리는 날마다 인간이란 이렇게까지 흉악해질수 있다는 설득을 보고 듣는 거나 마찬가지다. 


911이 터지자 맨하탄의 병원들을 예약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분만예정일이 다가온 아내를 위해 사방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겨우 병원을 잡았다. 2001년 10월, 911 사건이 터지고 한달이 조금 넘은 날. 우리집의 둘째인 남자아이, 경호가 태어났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분만실 안에서 아이의 탄생을 목격했다. 경호는 본래 여자아이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우리 부부를 놀라게 했다. 내가 수술실 안에 있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바뀐 줄 알았을 것이다. 산모도 아기도 건강했다. 예나도 새로 같이 살게된 아기를 좋아하는 것같았다. 


그 해가 끝나도록 맨하탄은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구실의 친구는 아프칸의 탈레반 정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프칸의 현실이 어떤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프칸에도 미국에도 도시의 거리에도 사람들 마음속에도 평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테러와 몸검색으로부터 멀리 떠나왔다고 믿었던 시간은 한달이 조금 넘어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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