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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웃음의 힘

by 격암(강국진) 2013. 7. 10.

13.7.10

얼마전에 국민티비라는 방송을 구경할 일이 있었다. 기성언론을 비판하면서 대안언론을 꿈꾸며 협동조합식으로 시작한다는 이 방송은 라디오 방송은 이미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움직임을 반기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을 존경하고 칭찬하고 싶지만 거기에는 한가지가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의 힘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을 뜨겁게 했던 것은 나꼼수다. 나꼼수가 성공하자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나꼼수의 출연진을 칭찬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표면적인 메시지나 철학이 아니다. 웃음과 재미다. 그리고 그 웃음과 재미는 표면적이지 않은 그 저변에 깔린 인생철학에서 나온다. 그것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을 보지 못하는 것같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딱딱한 엄숙주의만을 요구한다. 나꼼수에게 야한 이야기나 비키니 이야기같은 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재미도 있어야 겠지만이 아니라 재미와 웃음이 거의 전부다다. 그게 핵심이다. 거리를 채우는 촛불은 분노로 채워지는게 아니라 재미와 웃음으로 채워진다. 분노의 힘은 강하다. 그러나 웃음의 힘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말이 그렇지만 재미와 웃음이 전부다다와 같은 말도 그렇듯이 이 말을 어떤 문맥에서 듣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웃음의 힘과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웃음은 그 저변에 깔린 인생철학에서 나온다는 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왜 웃는가

 

여담이지만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작고하신 노무현 대통령도 여러가지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중에 자주 나오는 것이 바로 말을 막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나 말을 잘한다. 즉 듣는 사람에게 정보를 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표현하는 말을 한다. 말이란 애초에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다. 엄숙한 가면을 쓰고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말들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말같지만 말이 아니다. 한시간을 들어도 이거라는건지 저거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서 정보를 빼앗고 자기를 숨기기 위한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말, 정치인의 말이란 의당 그래야 한다면서 그런 화법을 따라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재미가 없다. 자신의 컨텐츠부족, 생각부족, 철학부족, 소신부족을 가리기 위해 그저 소음을 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웃는다. 왜 웃는가. 웃음은 즐거운 놀라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이 펼쳐지니까 웃는 것이고 개그맨들이나 희극작가들은 적극적으로 이런 점을 이용해서 웃음을 만든다. 시사풍자 코메디는 그 안에서 인간의 바보같음을 폭로하고 우리는 그에 대해 웃는 것이다. '뭐야 간단하게 뼈대만 추리니까 정말 변명할 수 없는 바보짓이군 그래' 하고 말이다. 우리를 웃고 울리는 정치가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정치가다. 

 

놀라움이 같은 것이 아니듯 웃음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놀라움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고 어떤 놀라움은 그저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금새 증발되어 사라진다. 바보를 연기하면서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연기는 재미있지만 항상 지속적인 웃음을 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서운 권력의 탄압을 희화하는 코메디는 그것보다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다. 가장 엄숙한 독재자의 얼굴을 그리고 거기에 누드여인의 몸을 가져다 붙인 그림은 바로 나꼼수의 유명한 메세지처럼 쫄지마 씨발 같은 메세지를 남기는 것이다. 고양이 앞에서 저런 고양이 아무것도 아니야, 저 나쁜 놈의 새끼라고 욕하는 쥐가 용감해 보일까, 아니면 그 고양이를 가르켜 귀여운 자식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자연스럽게 희극을 펼치는 쪽이 용감해 보일까. 이래서 웃음의 힘이 분노의 힘보다 강한 것이다. 

 

웃음에 있어서는 폭소가 미소보다 더 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소리내지 않는 웃음이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보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보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고, 해야할 일을 찾고, 과거의 고질적인 문제를 날릴 길을 발견할 때 웃게 된다. 희망의 웃음은 마구 터져나오는 것이 아닐지라도 훈훈하게 우리의 가슴을 달구는 강한 웃음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의 줄거리가 아니라 문체다. 나꼼수의 가장 중요한 것도 우리가 메세지라던가 개그라던가 하는 어떤 분리되고 분석된 어떤 것이 아니라 김어준이라는 한 인간의 생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인간은 이렇게도 살 수가 있다라는 것을 느끼고 그 폭을 느낀다. 새로움을 느낀다. 우리가 문체에서 작가를 느끼듯이 말이다. 결국 그게 핵심이다.

 

웃음은 새로움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그 새로움의 폭이다. 그 폭이 크고 넓을 때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더 오랫동안 웃을 수 있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폭이 좁을 때 우리는 그저 몇개월간은 숨쉴 틈을 찾을 정도 일 수 있고 그 폭이 더욱 좁다면 잠깐 웃고서 10분도 못되어 현실로 돌아와서는 한숨 쉬는 그런 웃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웃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웃지 못할까. 지겨워서 그렇다. 새로운게 없어서 즐거움도 놀라움도 없으니까 그렇다. 항아리 같이 좁은 세상에 갇혀서는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답답한 세상이 끝도 없이 계속 될거라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 

 

웃음의 힘이란 우리가 보는 세상의 폭에서 나온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끝이 보이지 않게 세상이 보이고 이제 둘러볼 세상이 끝도 없다고 느껴지면 우리는 웃게 된다. 항아리에 갇힌듯 그 날이 그 날같고 정해진 죽음이 다가온다고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새 죽을날만 기다리는 희망없는 사형수가 되고 만다. 웃음이 나올 일이 없다. 

 

사람들은 흔히 항아리속의 진실이나 항아리속의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웃음과 재미가 없다면 삶의 의욕이 없는 것이고 장사를 할 의욕이 없는데 장사를 하는 메뉴얼을 따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리가 없다. 재미가 있으면 일은 어떻게든 해결된다. 반면에 재미가 없으면, 웃음이 없으면 일은 어떻게 해서든 좌초되기 마련이다. 

 

이 점이 우리가 잊기 쉬운 부분이다. 우리는 많은 계산을 한다. 많은 지식을 쌓아올리고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지식과 논리로만은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가 그렇듯 대부분의 학자는 우리를 웃기지 못한다. 그들은 역사를 만든 위대한 학자와는 달리 새로운 것을 찾아 모험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위대한 학자일망정 그저 남일 뿐인 사람의 것을 잘 보고 베끼는데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재수가 좋아서 위대한 학자와 초기에 같이 모험을 시작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삶은 점점 더 작아지고 굳어져왔다. 새로움이란 없고 열정이란 건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학생과 대중앞에 나가서 이게 학문이라고 말한다. 엉터리 정치가가 이게 정치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재미없는 노동이거나 종종 그 반대로 값싼 재미를 위한 서커스 혹은 돈을 벌기위한 돈벌이 수단이 된다. 그러나 열심히 만든 것은 모두 예술이다. 진정으로 열정을 다하는 것은 모두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숙제도 유희도 돈벌이 수단도 아니고 살아가는 의미다. 살아가는 의미란 따지고 보면 결국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장대한 스케일의 모험인 것이다. 안그러면 그걸 왜 그리 오래 하겠는가.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학생과 교수는 마주앉아 그래 알아 결국 취업이 제일 중요하지라고 말한다. 그러니 거기 어디에 재미가 있을까. 그런데 거기 어디 스티브 잡스가 앉아있다는 말인가. 

 

진보주의자나 정치평론가등 대개의 이론가들은 웃음이 없다. 그들은 자기도 항아리에 갇힌 신세다. 그래서 항아리속의 정의만 부르짓지만 실은 본인도 별로 삶에 즐거움이 없다. 자기가 가진 몇개의 지식과 얼마간의 명성 혹은 얼마간의 삶의 일관성 문제때문에 스스로 갇혀서 답답해 하며 그 분노를 터뜨린다. 남들을 돕는 것같지만 그들의 좁은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금새 감옥에 가둘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모두 분노하자고만 한다. 분노도 필요하다. 항아리속의 정의도 중요하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순간 어디로 걸어갈까,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항아리 바깥은 어디일까가 결국 제일 중요하다. 

 

흥미로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지금 자기가 해야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객관적인 조건에 거의 상관없이 흥미로운 삶을 산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주관적으로는 항아리속에 갇힌 듯 답답하고 염증나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남은 건 모두 의무 의무 반복 반복뿐이니까 말이다. 

 

맺는 말

 

웃음과 재미가 중요하다고 하면 이해력 떨어지는 사람들이 뭘할까. 싸구려 포르노 방송을 만들거나 어울리지 않는 개그를 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내가 쓴 말이 있다면 김어준이 아 하는 것과 당신이 아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명한 구지선사의 이야기를 기억하라. 누가 와서 질문하면 엄지손가락을 올리는 것으로 대답하는 구지선사를 보고 시중드는 종자가 그걸 따라했다. 누가 불법의 뜻이 뭐냐고 하면 엄지손가락을 올리는 것으로 답한 것이다. 그걸 본 구지선사는 그 종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린 다음에 울며 도망가는 그 종자에게 불법의 참다운 뜻이 뭐냐고 묻는다. 이제 습관이 되어버린 대로 엄지 손가락을 올리려고 한 종자는 자기는 이제 엄지 손가락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종자는 그 순간 불법을 깨쳤다는 이야기다. 

 

웃음과 재미는 인간에게서 나오고 인간은 자기가 믿고 사는 삶자체다. 자기가 보는 세상의 넓이가 웃음을 만든다. 우리는 포르노를 보고 성적으로 흥분할수 있지만 진정한 연애를 경험 할 수는 없다. 싸구려 자극으로 매일 같이 웃을수 있지만 그런 자극은 더한 허탈감을 남긴다. 그래서 진짜 재미있는 책은 장자같은 고전일 수 있다. 고전과 대화할 여건이 된다면 말이다.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 웃으며 사는 세상을 바란다. 그런 세상은 우리가 들어 앉아 있는 항아리 속의 정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 바깥 쪽의 넓은 세상에 모두가 함께 갈 때만 가능하다. 천천히 살다보면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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