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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스크랩)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의식과 자유의지의 실체

by 격암(강국진) 2013. 11. 19.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의식과 자유의지의 실체

홍수 2013.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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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뇌과학과 의식의 탐구


의식은, 정신은 오로지 물질 작용의 부산물인가, 물질과 다른 이원론적 존재,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가? 내가 결정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를 둘러싸고 오랜 동안 제기된 철학적인 물음과 이에 대한 뇌과학 분야의 실험적 연구를 정리해본다.

00CW1.jpg» 의식과 육체는 수면에 비친 나의 모습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이 진짜 자신의 것인지를 의심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출처/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2.0



“불과 몇 년 전에 한 사람이 의식이라는 주제를 인지과학의 논의로 제기했을 때만 해도 그 문제는 괴팍한 학문적 취향의 발로 정도로 취급되었고, 이미 학문 세계의 사회적 관습에 물든 대학원생들은 천장에 시선을 둔 채 눈을 굴리면서, 가장 부드럽게 혐오감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 철학자 존 설(John Searle), <놀라운 가설>(프란시스 크릭 지음)에서 발췌.


1990년대 말,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라면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한테 많은 영감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극장판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GHOST IN THE SHELL)>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화려한 영상미와 충격적인 세계관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이 작품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적 질문인 ‘의식(혹은 자아, 자유의지, 영혼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대상에 관한 깊은 고민 때문이다. 

 

몸 전체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고 게다가 뇌까지도 ‘전뇌’라는 기계장치로 대체해 버릴 수 있는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나 있는 것일까? 기계가 정교하게 발전한다면 이런 기계들도 의식을 가질 것인가? 자신이 단순한 기계가 아니고 자유의지를 가진 진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전신을 의체화하여 기계로 바꾼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이러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문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이 진짜 인간의 그것이라는 확신을 얻고자 한다. 이번 ‘의식’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공각기동대에서 묘사하는 방식의 ‘의식’에 대해 그 진실성과 허구성을 이야기하고 현대 신경과학이 접근하고 있는 ‘의식’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기계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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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인형사’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해커가 나타나서 네트에 개입해 주가 조작, 정보 수집, 정치 공작, 테러, 전뇌 윤리 침해 등 각종 범죄를 일으킨다. ‘인형사’라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인간을 해킹해서 조종하는 수법 때문에 붙은 그의 코드 네임. 공안9과는 우연한 기회에 그를 붙잡는 데 성공하지만 그가 실제로는 인간이 아닌 로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형사는 자신을 영혼(Ghost)을 가진 생명체로 인정하고 정치적 망명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공안요원은 인형사가 로봇일 뿐이고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된 행동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망명요청을 거부하려 하지만 인형사는 오히려 자신과 그들을 구분 짓는 생명체의 정의를 사람들은 내릴 수 없다면서 요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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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의 실체를 찾기 위한 전투 과정 중에 공안9과의 리더인 쿠사나기 소령의 의체는 거의 파괴되고 만다. 인형사의 전뇌에서 정보를 찾기 위해 응급으로 자신의 뇌를 연결한 쿠사나기 소령은 인형사한테서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위해 둘의 영혼을 합칠 것을 제안받고는 스스로 예전의 쿠사나기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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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우리의 물질적인 몸 그 자체가 아닌 우리의 몸에 담겨 있는, 혹은 우리의 몸을 조종하는 비물질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종종 ‘영혼’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는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의식’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우리가 깨어있을 때 느끼는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부에서 오는 온갖 감각을 인지하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를 느끼는 주체이며 그야말로 우리 ‘자신’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팔다리나 눈, 코, 입 같은 물질로 구성되는 몸뚱이는 우리 의식이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이용하는 기계장치와 같다. 따라서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기계로 완벽하게 구현하고 뇌까지도 그대로 기계로 구현해 기억까지 심어놓을 수 있더라도 인간의 본질인 의식만은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행동을 그대로 모사하는 인간형 로봇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식의 실체’에 관한 오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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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CW4.jpg» 심신이원론을 주장한 르네 데카르트. 출처/ Wikimedia Commons인간의 의식에 관련한 어렴풋한 의문은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의식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시작은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해, 인간의 의식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육체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리학 법칙을 따르는 물질적인 실체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물질적인 인간의 육체는 비물질적인 정신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 즉, 간단히 이야기하면 정신이 우리 몸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우리 몸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는 정신적 판단이 실제로 팔을 들어올리는 원인이 되고, 또한 뜨거운 커피를 잡았을 때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1]


‘심신이원론’이라고 불리는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은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의식의 실체에 대해 직관적이고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이해되어 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혼’, ‘정신’, ‘사후세계’ 같은 단어들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육체를 뇌까지도 그대로 복제해 내더라고 그것은 단지 껍데기일 뿐 정신의 실체라고 볼 수 있는 ‘고스트’가 깃들지 않으면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물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 의식의 실체가 비물질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어떻게 육체와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 등 더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실제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반성과 더불어 발전하게 된 관점이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이다. 유물론적 관점이란 모든 현상을 ‘물질’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의식을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정신’이라고 하는 대상은 실제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부산물이다.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정신적인 감각, 자아, 느낌, 이 모든 것이 신경세포들 간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떤 부산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관점은 물질적인 뇌와 비물질적인 정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정신적인 부분이 뇌의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작용으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들을 ‘부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우리 뇌가 이러한 특성들을 창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까?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 중에 하나인 ‘부수현상론’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이야기한다. 

 

감각, 자아, 느낌과 같은 것들이 뇌의 작용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뇌가 기능하기 위해서 이런 특성이 필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불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빨리 손을 치우는 행동을 만드는 것은 뇌가 수행해야 하는 기능이지만 왜 데인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일까? 손을 불에 가져다 대면 통각세포가 신경신호를 뇌로 전달해서 바로 손을 치우는 일련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운동신경세포들을 활성화하고 이들은 팔의 근육을 움직여 손을 치우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이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고통’이라는 느낌이 관여돼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인 그런 부분들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부수현상론은 우리의 의식이 뇌 작용에서 파생된 부산물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1]

 

하지만 이런 관점은 우리의 직관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의식이 단지 뇌작용의 부산물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 아닌가? 즉, ‘나’라는 주체의 자유의지를 의심케 하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의 주인이 ‘나’라는 자아의식이 아니라면 나의 행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식에 대한 최신 뇌과학 연구는 언뜻 받아드리기 힘든 이러한 내용이 사실일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 몸의 주인이라는 것은 허구일 수 있으며 우리가 느끼는 자아라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의 연구들을 살펴보자. 

 

 

“내 행동은 내가 생각하기 전에 결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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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독일 베를린의 번스타인 계산신경과학센터의 신경과학자인 존-딜런 하네스(John-DylanHaynes) 박사는 우리의 의식적인 판단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2] 그는 피험자에게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버튼을 주면서 피험자가 어느 한 쪽의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눈 앞의 스크린에서 무작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알파벳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 알파벳들은 계속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피험자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하네스 박사는 피험자의 뇌활성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unctional Magnetic ResonanceImaging)를 이용해 기록해서 버튼을 누르겠다는 피험자의 판단이 나타나는 시각을 기록하였다. 

00CW5.jpg» 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장치를 이용한 하네스 박사의 의식 속도에 대한 실험 개요. 피험자가 왼쪽 혹은 오른쪽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행동을 수행하는 동안 자기공명영상 장치를 이용하여 피험자의 뇌가 실제로 자신이 인지하는 시각보다도 수 초 가까이 먼저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출처/Nature Neuroscience 

하네스 박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스크린에 나타나는 알파벳을 기억함으로써 기록된 피험자의 의식적인 판단 시각과 자기공명영상 장치에 나타난 버튼을 누르는 결정과 연관된 뇌 활성시각을 비교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버튼을 누르겠다는 판단을 나타내는 뇌 활성이 피험자 자신이 자각한 판단 시각보다 수 초 가까이 먼저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 뿐 아니라 뇌 활성 분석은 왼쪽과 오른쪽 버튼 중 어느 버튼을 누를지도 피험자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유의미한 수준으로 예측해 낼 수 있었다. 이 연구결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버튼을 누르는 행동은 나의 의식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을 내린 뇌로부터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실 이런 우리 뇌의 무의식적인 결정을 연구한 사람은 하네스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신경심리학자인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교수가 수행한 비슷한 종류의 실험은 뇌전도검사(Electroencephalogram, EEG)를 통해 피험자가 시계를 보고 있는 동안 뇌파를 측정해서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결정하기 전보다 수백 밀리초 전에 뇌파에는 이미 손가락 움직임을 결정하는 신호가 나타남을 보여줬다.[3] 하지만 당시 연구는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시각과 뇌전도에 기록된 시각의 차이가 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실험의 설계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그에 비해, 하네스 박사팀의 연구는 발전된 뇌영상 도구를 활용하여 둘 간의 좀 더 명확한 차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뒤 201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이자크 프라이드(Itzack Fried) 박사는 기존의 연구에서 더 나아가 전극을 환자의 뇌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으로 우리 뇌의 특정 영역에 있는 개개 신경세포의 활성을 측정했다.[4] 프라이드 박사는 이들 신경세포들의 활성을 관찰해 환자가 버튼을 누르는 의식적인 판단보다 1초 정도 앞서서 이 환자가 버튼을 누를 결심을 할 것이라는 것을, 더욱이 어느 쪽 버튼을 누를 것이라는 것까지도 80% 확률로 예측할 수 있었다. 프라이드 박사는 이런 현상에 대해 “이미 결정된 판단을 우리 의식이 나중에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의사결정 과정에 우리의 의식은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나 통보받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발전된 뇌과학 기술을 이용한 이와 같은 연구들은 의식에 대한 기존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우리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의식은 나중에 그 결과를 통보 받기만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이라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라는 주체라고 생각되던 의식은 단지 뇌 활동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어떤 현상이 아닐까? 그리고 ‘나’라는 의식이 우리 몸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지 착각이 아닐까? 앞의 연구들로도 도저히 이런 이야기들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식의 실체를 엿보게 해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일어난 행동을 나중에 합리화하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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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크게 좌반구와 우반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개의 반구는 뇌량(Corpus callosum)이라는 신경섬유의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좌반구와 우반구는 기능적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둘은 뇌량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으며 서로 소통을 한다. 하지만 중증의 간질환자 가운데에는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뇌량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뇌량을 절단하고 나면 양 반구는 서로 정보소통이 불가능해져 양쪽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절단된 뇌를 갖고 있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을 분리뇌 증후군(Split-brain syndrome)이라고 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나타내는 행동이 우리에게 의식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몇몇 실마리를 제공한다. 

00CW6.jpg» 인간 뇌의 왼쪽 반구와 오른쪽 반구를 연결해 주는 뇌량(붉은 부분, Corpus callosum). 서로 반대편의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대뇌 반구는 뇌량을 통해서 서로 정보를 교류한다. 선천적 기형이나 수술로 인해 뇌량이 손상된 경우 대뇌 반구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뇌 증후군이 발생하게 된다. 출처/Wikimedia Commons 

이런 분리뇌증후군 환자를 통한 의식에 대한 연구는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 박사와 신경생물학자 로저스페리(Roger Sperry)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분리뇌 환자들의 분리된 반구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의식을 갖고 상대방의 영향 없이 별개의 자유의지를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반구들이 행동하는 양상을 관찰하면 눈에 띄는 점을 볼 수 있는데, 우반구가 제공하는 정보가 없을 때 좌반구는 자신이 수행한 행동에 대해 일관된, 그러나 틀린 설명을 지어낸다는 것이다.[5]

 

예를 들어, 앉아 있는 피험자의 우반구만 볼 수 있는 시각영역에 “걸으시오(Walk)”라는 명령어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피험자는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서서는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험자에게 “왜 걸어가고 있느냐”라고 물어보면 피험자는 “모르겠다”거나, “그냥”이라거나, “이유 없는 충동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콜라를 마시러”라고 대답한다. 이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걸으시오”라는 명령에 반응해서 걸어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도 환자는 분명히 “콜라가 마시고 싶어서 걸어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우반구한테서 걷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받지 못한 좌반구 뇌의 의식은 행동에 대해 스스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는 스스로 그런 행동을 지시한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걷는 행위를 지시했다고 ‘착각’한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는 가자니가 박사와 스페서 박사의 어찌 보면 섬뜩해 보이는 분리뇌 환자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의식이 자기 능력에 대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의식은 행동의 주체가 아니라 정말 행동의 부산물이 아닐까?

 

 

아직은 불충분한 연구,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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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직까지 이런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이 의식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꼭 한 가지 방향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에 관한 문제는 그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관점들이 있고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 하려는 얘기는 예전에는 오로지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대상이었던 의식에 대한 연구가 뇌과학의 발전으로 검증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식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박사의 말처럼 과거에는 학술적으로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주제인 의식에 관한 문제가 뇌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도전해 볼 수 있는 실체를 가진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6] 이번 이야기를 통해 뇌과학 연구가 단순히 편리한 삶이나 유용한 기술만을 생산하기 위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공유해 보고 싶었다. 분량의 한계와 미숙한 글 솜씨 탓에, 좀 더 흥미로운 많은 연구를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적어도 이런 시도가 뇌과학을 좀 더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의식에 대한 공부를 하다 인상적이었던 사실 한 가지는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을 이루고 나서는 노년에 의식에 대한 질문에 빠져드는 여러 사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진지한 신경과학적 접근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을 저술한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생물학자로서 디엔에이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하고는 노년에 신경과학자로 탈바꿈하여 의식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다 생을 마쳤다.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신호전달 작용을 연구해 노벨상을 수상한 존 에클스(John Eccles)는 후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와 함께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를 했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인 의식에 관한 문제는 분명 위대한 과학자들의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었던 듯하다. 

 

덧붙여: 

의식에 관한 뇌과학 사례들을 소개하기 위해 글의 서두에 인간 의식에 대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을 소개했지만 이는 의식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에 극히 일부일 뿐이며 이런 관점만이 과학적으로 올바르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유물론적 접근만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며 앞서 소개한 에클스 박사 같은 경우는 이원론을 넘어서 심지어 삼원론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참고 문헌


[1] 데이비드 퍼피뉴, <의식(Consciousness)>, 김영사

[2] Soon CS, Brass M, Heinze HJ & Haynes, JD, Nature Neuroscience. 11, 543-545 (2008).

[3] Libet B, Gleason CA, Wright EW & Pearl DK, Brain 106, 623-642 (1983).

[4] Fried I, Mukamel R &Kreiman G, Neuron 69, 548-562 (2011)

[5] 스티븐 핑거, <빈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사이언스북스

[6] 크리스토프 코흐, <의식의 탐구(Quest for consciousness)>, 시그마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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