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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스크랩] 철학자 김상봉 인터뷰

by 격암(강국진) 2014. 3. 19.

[한겨레]새 길을 여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① '서로주체성' 고안한 철학자 김상봉

새해를 맞아 우리 인문학계에서 남다른 문제의식을 품고 학문의 길을 닦아온 학자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철학·역사학·문학·서지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일곱 명의 학자를 찾아가 연구 현장을 소개하고 이들이 천착해온 학문적 주제와 비전을 직접 들어본다.

'철학의 빈곤'을 탓하긴 쉽지만, 그에 맞서 새로운 철학을 세우긴 어렵다. 서양 정신이 만들어낸 근대적 주체의 한계를 지적하고 '서로주체성'이라 불리는 새로운 주체성을 고안한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을 세우는 데 진력해 온 학자로 꼽힌다. 한동안 열정적으로 간여했던 현실 정치에서 손을 뗀 그는 지난해 9월 연구년을 맞아 제주도로 내려갔다.

4일 김 교수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한 농가를 찾았다. 집주인으로부터 잠시 빌렸다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자그마한 별채가 처소였다. 성인 남자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만한 골방에는 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한국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연구자료가 그득했다. 책장 한편에 있는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들과 책상 절반을 차지한 음악이론에 대한 갖가지 책들, 화장실 앞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그는 여기서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 것일까?

"서양과 우리의 '자기인식', 곧 근대적 주체가 만들어진 시원을 파헤치는 저작을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시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을 각각의 뿌리로 보고 서로 대질시키는 작업입니다. <만해와 르네>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겠네요."

자기인식이란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다. 독일에서 유학하며 서양 정신의 거대한 흐름에 매료됐던 그는 서양의 자기인식을 '자유인'의 그것(자기인식)으로 파악하는 것을 자기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유란 "스스로 자기를 형성할 수 있는 자유"를 일컫는데, 서양 정신은 그처럼 자유로운 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해 온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서양 정신은 오로지 '나'로부터 말미암은 탓에 결국 모든 타자를 나의 지배 아래 놓게 된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 바로 제국주의였다.

"반면 우리에겐 오직 '타자에 의한 자기상실'의 역사만 있습니다. '이 땅에 철학이 있는가' 하는 함석헌 선생의 고민처럼, 우리는 단 한 번도 자생적인 철학, 의미있게 이어져 온 정신적 삶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뒤집어서 보면, 자기상실의 역사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계속 무언가를 임신·잉태해낸 역사이기도 했다. 자생적 생명력은 부족하다고 해도 원효가, 퇴계와 율곡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던가? 이처럼 파국으로 향해가는 서양 문명의 한계에 대한 통찰과 자기상실의 역사로부터 무언가 보편적 정신을 이끌어내려는 몸부림이 합쳐져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을 낳았다. 서로주체성은 1인칭 '나' 이외의 모든 것을 3인칭 타자로 만드는 서양의 '홀로주체성'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2인칭의 '너'를 인식하고, 나와 너의 만남으로부터 새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길을 닦는 시도다. <자기인식과 존재사유>(1998), <나르시스의 꿈>(2002), <서로주체성의 이념>(2007) 등 그의 저작들은 모두 이런 학문적 여정 위에 놓여 있다.

서양 근대정신 출발점은 '나'의 발견
핵심엔 '코기토'로 유명한 데카르트
뿌리 알려고 음악·수학책 함께 살펴
우리는 '나' 아닌 '너'와의 관계 중요
한용운 시는 보편적 진리 탐구 작품
'근대적 주체' 시원 찾아 두 인물 대질
철학의 부재 위에선 세상 못바꿔…
경제학이 가치 심판자 돼버린 요즘
기업을 철학 사유대상으로 삼을 때


김 교수는 "현대 철학자들은 근대적 주체를 비판한다면서도 2인칭과 3인칭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타자를 3인칭으로만 싸잡았다"고 비판했다. 그가 꼽은 어려운 대적 상대는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이었다. 헤겔은 '타자적 자기인식'이란 개념으로 2인칭에 대한 논의를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이론 체계가 워낙 중첩적이고 복잡해 그만큼 세세하고 체계적인 접근을 요구했다. 그래서 헤겔을 섭렵한 뒤에야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써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와 만해에 대한 연구는 어떤 맥락에서 시작됐을까? 사실 이 연구는 2000년께부터 준비했던, 오래된 숙제였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 중심의 이른바 '탈근대' 사유들은 근대를 극복하겠다면서 칸트나 헤겔 같은독일 관념론을 주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대적 상대를 완전히 잘못 고른 거예요. 독일 관념론의 뿌리는 사실상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통해 '나'를 처음 발견한 데카르트입니다."

중세의 '신'에서 벗어나 '나'라는 진리의 장소를 새롭게 정초한 데카르트야말로 근대적 주체의 출발인데, 아무도 그 배경과 과정을 주목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스페인의 후기 중세철학자 프란시스코 수아레스(1548~1617)의 저작들을 포함해, 데카르트가 출현했던 1600년대 사상의 전체 지형도를 읽는 데 주력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어디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등을 라틴어 원전들을 통해 따지고 들어가는 작업이다. 특히 당시 주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자연학·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항하는 흐름으로 플라톤주의가 새롭게 떠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여기에서 음악과 수학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음악은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자기를 표상하기에, '자기동일성'과 연관됩니다. 실제로 데카르트가 처음 쓴 책도 <음악론>이었어요. 또 음악은 수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 사유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밝혀내려면 음악, 수학, 신학 같은 영역에서 더욱 철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먼 제주도 골방에 들어앉아, 고등학교 수학책이나 음악이론 서적들까지 뒤적이는 이유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데카르트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띠는 대상은 만해 한용운이라 한다. 데카르트가 서양의 근대적 주체의 출발점이라면, 우리의 근대적 주체의 출발점인 만해는 그 끝자락에 서 있으면서도 새로운 시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들이 많았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식민지 시기 시인들은 철학자 대신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던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또 그 물음은 대개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했고 자기소외, 만남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만해의 시는, 철학자 눈으로 볼 때 가장 심오한 시예요. 니체는 단지 '신은 죽었다'고만 했지만, 만해는 신과의 '이별'을 말하면서도 '이별이 이별이 아닌 걸 안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심오합니까?"

김 교수는 데카르트와 만해를 통해 서양과 우리의 자기인식의 시원을 각각 '욕망'과 '슬픔'으로 견주어 볼 생각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자기인식의 진리가 나를 찾을 때의 확실성, 동일성에 대한 집착 등으로 드러나는 데 반해, 우리에게서는 자기소외, 만남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만해의 시에 나타나는 '너'는, '나-자연-신'의 관계만 있는 서양 정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편적 진리로서 서로주체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만해와 르네> 집필이 끝난 뒤 김 교수는 서양 정신사를 더욱 거슬러 올라가 중세 신학의 '삼위일체'로부터 중세의 뼈대라 할 수 있는 '페르소나'(인격)와 '공동체성'을 읽어내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2012)로 더욱 날카롭게 드러냈던 '실천학문'에 대한 추구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기업이야말로 가장 큰 삶터인데, 왜 어떤 철학자도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라고 물으며 "그동안 학자들은 공동체·사회에 대해 법칙이나 구조 같은 것만 탐구해왔지 '그것이 뭐냐'는 존재론적 질문은 전혀 던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경제학 그 자체가 '보편학'이 되어 존재의 위계를 결정하는 가치의 심판자가 됐다"며, 정치경제의 철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경제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가 보기에, 이는 근대적 주체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데카르트가 중세 자연철학을 혁신하면서 불러들였던 '수학'은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긴밀하게 결합했고, 이런 흐름은 수학적 방법론이 존재론적 의문보다 앞서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업이 무엇이냐 묻는 철학자의 물음 속에는 이 시대 보편학으로서 철학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고민이 녹아 있는 셈이다.

얼마 전까지 진보신당에서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경험은 '철학의 부재' 위에선 진보정당일지라도 조직활동으로 세상을 바꿀 순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을 줬다고 한다. 또 철학이 없는 상태에선 그 어디에서도 진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고 한다.

"민주노총의 지부장 선거에서, 정파가 다르면 다른 정파가 주도하는 사업장 안에 아예 들어가지 못한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좌우파 막론하고, 철학 없이 권력에 대한 의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이 땅의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김 교수는 "이 모든 건 대중의 탓이 아니라, 철학자인 자신의 탓"이라고 말했다. 이 땅에서 데카르트,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을 만들내지 못한 철학자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세우고자 제주도 골방으로 왔다는 그는 한때 '거리의 철학자'로 불렸던 자신을 이젠 '골방의 철학자'로 불러 달라고 했다.

제주/글·사진 최원형 기자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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