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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몇가지 이유들

by 격암(강국진) 2015. 7. 21.

2015.7.21

다른 사람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노력이라던가 성의의 문제만도 아니다. 타고난 재능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자폐증상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이란 돌멩이처럼 무생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화성인이나 유령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보통 사람도 때로 다른 사람들이 무서울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답답하고 밉다. 그것은 어느 정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노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이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에는 뭐가 있을까.

 

당신의 상식 혹은 정신적 게으름, 그건 원래 그렇다는 생각. 

 

이 세상 일들은 실로 수없이 많은 원인들에 의해 일어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것들의 원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실은 그 인과의 고리는 매우 허약한 것인데도 그것을 확신하며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거기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의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이 잊혀지는 것이다. 기계에게는 마음이 없다. 기계적으로 세계가 돌아간다는 설명을 많이 받아들일 수록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니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오늘은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하필 비가 와서 가기로 한 공원에서 산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혹은 그 남자가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은 비가 와서 산책을 할 수 없으니 다음에 만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두사람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비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오니까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라는 설명을 납득하는 순간 우리는 비가 와도 만날 수 있었다라는 우리의 선택을 잊게 된다. 실은 비가 오니까 공원에 가는 대신 영화관에 가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비가 오니까 어딜 돌아다니는 대신 그녀나 그의 아파트에서 같이 요리를 하고 티비나 보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같이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모든 난관은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핑계가 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부모가 그걸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더 크게 불타오를 아주 좋은 핑계가 된다.

 

나는 예전에 사랑하는 커플을 판별하는 한가지 방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두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서 차나 자전거가 와서 길을 비켜줘야할 상황이 벌어졌다. 이 경우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경우 즉 육체적으로 더 가까이 있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경우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두사람이 같이 같은 방향으로 피한다고 한다. 그들은 자동차에게 공간을 내주면서 한쪽으로 같이 비켜서고 공간이 좁다는 것을 핑계로 서로에게 몸을 기댈 기회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는 커플은 훨씬 더 쉽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이 그 두사람의 사이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을까, 그렇게도 좋아하는 동창생들에게 왜 우린 연락하지 않을까, 아내는 항상 집에 혼자 있는데 왜 나는 그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을까? 나는 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우리에게는 이유가 있다. 나는 누군가 두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외적인 이유로 해서 그 마음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문제다. 3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 않고 살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사랑때문에 꿈때문에 왕위를 버리거나 보장된 미래를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당신이 그걸 진짜로 좋아하는가 하는 것이다. 시간적 간격이 길어질 수록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대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인생의 성공은 운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뭔가를 해보았는가 안해보았는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저런 상투적인 핑계를 반복한다. 그러한 반복은 우리가 가진 나와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녹슬게 한다. 우리를 기계로 만들고 타인을 기계로 파악한다. 모든 일이 매일이 무감동하게 똑같이 흘러간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당연하다는 말이 점점 더 많이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어리석어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회피하는 방법은 주어진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 말고, 자꾸 이런 저런 허약한 인과적 설명에 납득하지 말고, 그걸 분석하는 것이다. 이게 정말 그럴까, 정말 그것이 충분한 설명이 되는가.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 분석을 하는 과정은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나와 타인의 마음을 찾아 헤매는 모험이다. 그런게 있는줄도 몰랐지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얇팍한 인과론을 깨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한 선택만 한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럴때 우리는 왜 우리가 우울하고 불행한가에 대해 답을 찾을 지도 모른다. 자기가 스스로의 마음을 모르고,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모를 때 우울과 불행은 그 결과로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불신의 문제

 

우리가 타인의 마음 혹은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기 망원경이 있다고 하자. 이걸로 먼 곳의 물건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망원경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점을 보거나 한 사람을 두사람으로 보게 되거나 한다. 우리는 이 망원경을 얼마나 믿어야 할 것인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망원경이란 우리가 스스로와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말한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볼 때 혹은 타인을 볼 때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악수한번에 인사한번에 당신은 상대방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할 수도 있다. 

 

문제는 설사 당신이 그야말로 초능력같은 독심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믿음이 없으면 이 모든 독심술의 결과를 무시할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자기에게 들리고 보이는 것을 부정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것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머릿속에 똑똑히 들리는 그 독심술의 메세지를 무시하고 눈을 질끈감고 귀를 막는다. 우리는 다시 기계적인 존재로 돌아간다.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도 안되는 상식과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방에서 어떤 작은 소리가 들릴 때 그것을 듣고 싶다면 우리는 숨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서불안환자처럼 쓸데 없는 소리를 하기를 멈추지 않고 1초이상은 집중하지 못한다면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지나치게 빨리 결정하고 행동하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그녀가 눈길 한번 주면 그녀는 나와 사랑에 빠진 것같고 어쩌다가 인사를 했는데 못 듣고 지나가면 그녀는 나를 미워한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판단은 동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불안해지고 결국 우리는 얼어붙는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메세지는 완전히 포기된다. 

 

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스토커나 과대망상증 환자같은 사람들에게서 본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메세지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확신한다. 제 아무리 자신이 읽은 타인의 마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산처럼 쌓여도 자신의 독심술이 보낸 메세지에 의심이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와 타인 사이에는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마음사이에도 불확실성의 벽이 존재한다. 다행한 것은 우리가 그 불확실성을 뚫어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최대한 차분히 집중해서 우리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물론 잊어서는 안된다.

 

겸손과 집중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겸손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든 외적인 적, 지위나 재산이나 유명세따위와 상관없는 나만의 고유한 것에 대한 사랑이나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 자부심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잘나고 못나고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유일한 존재니까. 유한한 존재지만 유일한 존재로서 자신을 파악할 때 우리는 겸손과 자부심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즉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때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보다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탓이 아니다. 애초에 거기에 읽을 마음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정말 공감이 가는 옳은 말이지만 모든 말에는 그것이 진리가 되는 문맥이 있다. 그래서 이 말의 반대말도 옳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한 순간과 어느 한 장소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온 세상과 모든 시간의 한 연장으로서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도 진리다.

 

애초에 나 자신이라는 것은 유령같은 존재다. 과학도 아직 의식이란 것이 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토바이는 이쪽으로 볼 때와 저 쪽으로 볼 때 그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기에 하나의 오토바이가 있어서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어느 부분을 점유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는 이렇게도 행동하고 저렇게도 행동한다. 그게 존재한다는 것은 영원히 완벽히 증명되지 못할 가설이다. 그것은 마치 아직 조각되지 않은 대리석속의 조각품이나 마찬가지다. 멋진 대리석 조각상은 아직 조각되지 않은 대리석 안에 있다. 나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은 벽장 뒤에 숨겨진 완성된 조각상을 찾는게 아니라 대리석안에 있는 그 조각상을 인식하고 선택하여 스스로 조각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무엇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런 내적인 고민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일관성을 가진 인격적 실체를 본다. 그럴 때에야 마음을 읽는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관성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무의미한 잡음을 내는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 거기에 마음이라는게 실제로 존재하는가 자체가 불확실하다. 친구가 되고 싶어도 그 인간의 존재자체가 불확실하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폴로 우주선이나 미사일을 제어하는 공학자들이 쓰는 방법에 칼만필터라는 것이 있다. 이 방법은 뭔가가 시간에 따라서 변해 갈 때 그 상태를 추적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칼만 필터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지금 너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조금 전의 너의 상태를 참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리가 한마리 날고 있다고 해보자. 이 파리는 지그재그로 예측할 수 없게 날아가는 것같지만 그래도 파리가 갑자기 초음속이나 빛의 속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파리의 속력변화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금전에 파리가 어느 부근에 있었다면 어떤 짧은 시간 후에는 파리가 있을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져 있다. 파리는 분명 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둘중의 하나다. 첫째는 조금 전 파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다. 둘째는 파리는 이러저러하게 움직인다라는 것에 대한 우리 생각이 틀린 것이다. 실은 순간이동을 하는 초능력 파리가 있는 것이다.

 

이유가 뭐가 되건 일단 파리의 위치를 놓치게 되면 우리는 그 파리를 다시 보게 되는데 한참 걸린다. 우리의 시각이 파리를 쫒아가고 있었을 때는 선명하게 보이던 것이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가 앵앵 들리는 상황에서도 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파리를 보게 되면 또 파리의 움직임을 쫒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변덕이 심한 사람과 연애를 하는 사람은 이 파리를 쫒는 사람의 심정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아 지금 이 사람이 이걸 마음에 들어하는 구나, 이런 걸 비싸다고 생각하는 구나, 이런 걸 못참아 하는 구나하고 생각한다. 파리의 위치를 쫒아가듯 우리는 그 사람의 현재 마음 상태를 쫒아가려고하고 그걸 우리가 듣고 보는 것에 근거해서 수정해 나간다. 

 

이런 상태에 대한 추적에는 앞에서 말한 정보가 필요하다. 즉 이 사람의 지금 상태는 이렇고, 이 사람의 행동은 이런 식으로 주로 변한다는 기본적 정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유독 일관성이 없을 때가 많다. 마음에 없는 말을 마구 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한다. 

 

일관성이 없으면 타인과 대화를 할 수도 없고 타인의 행동을 해석할 수도 없다. 일관성이 없으면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관성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다. 그 답이 옳건 그르건 어떤 일관적 철학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은 돌멩이가 이리저리 구르듯 살아는 것이어서 거기에서 읽어야 할 마음이 애초에 없다. 마음이 없으므로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자기와 대화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떼를 쓴다. 억지를 부린다.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때로 과거와의 일관성을 포기하고 비약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그렇게 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그것의 해석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순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일탈과 일관성의 포기를 자주 범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무서운 사람이다. 자기도 자기가 뭘 할지 모른다.  

 

폭주하는 마음 읽기

 

이 글에서 말할 마지막 주제다. 이것은 비교적 단순한 오류이며 그 대책도 단순하다. 그러나 물론 실행이 쉬운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꼭 사실이 아닐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해석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불쾌한 마음쓰기의 폭주가 일어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체스경기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체스나 장기를 둘 때 상대방이 이러저러한 의도로 저 한수를 두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도 나의 한수에 대해 그런 것을 생각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이렇게하면 저렇게 생각하겠지라고 생각해서 다시 생각을 한다. 이것이 복잡해지면 무한 폭주가 일어난다. 생각의 생각의 생각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체스경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종종 오해와 서운함이 생기고 얼키고 설킨 계산은 스스로도 설득력있게 말할 수 없어질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에 이 오해와 서운함은 풀기도 쉽지 않다.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한 아들을 사랑하는 할머니가 있다고 하자. 이 할머니는 본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들에게 말하면 아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옆집 남자에게 부탁을 했다. 그것을 본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어머니에게 상냥하게 구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 한다. 아들의 언행이 거칠어지는 것을 본 어머니는 자기가 자기 아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몰라주는 아들이 섭섭하다. 아들이 몹쓸 사람이며 옆집의 청년이 훨씬 더 다정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들에게 이런 저런 일을 시키면 아들이 싫어할 거라고 할머니가 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짐작에 따른 행동이 그것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부자와 가난뱅이로 사람을 나누면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한다. 저쪽 편사람들이 우리 쪽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욕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종국에는 그걸 사실로 만든다. 차별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어 내고 불신은 최악의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이 무한폭주를 막는 방법은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만든다. 보고 싶으면 보고, 뭔가를 하고 싶으면 하자고 하면 된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다라는 생각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기기도 한다. 내가 네마음을 안다라는 확신때문에 미리 짐작하여 행동하는 것이 지나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아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많은 것에 대해서 실제보다 더 많이 확신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기 마음은 모르면서 남의 마음은 또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사 부모가 자기의 어린 아이를 말할 때라도 이 아이는 이렇고 저래요라고 확신하는 것은 큰 실수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날 그런 부모는 놀라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확신하던 아이의 마음에 대해 자신은 전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때문에 때로는 가족이 혹은 부모가 어떤 사람에게 대해 세상에서 가장 모르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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