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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주 생활

전주 행복의 경제학 국제회의를 참석하고

by 격암(강국진) 2015. 9. 4.

전주에 사시는 한 블로거는 세인트 헬레나라는 이름을 쓴다. 이 분이 감사하게도 나에게 9 4일 금요일에 행복의 경제학이라는 국제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덕분에 오늘은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열린 강연회에 다녀올 수 있었다.

 




전주시와 로컬 퓨쳐스가 주최한 이 행사는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기조연설을 하면서 진행되었고 그밖에도 케이토 오이와, 자넬 오시, 닐 맥인로이등의 외국인 강사가 발표를 진행하였으며 전주시 김승수 시장도 발표했는데 개인적으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와 김승수 시장의 발표를 가장 재미있게 들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이 국제회의는 사실 제대로된 학술회의라고 말할 수는 없고 여러모로 어색하고 무리한 곳이 있었지만 대안적 삶 혹은 대안적 경제 시스템에 대안 관심이 뜨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성공적인 모임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여기서 들은 이야기나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그것들이 내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둘까 한다.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측면에서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이하 헬레나라고 하겠다)의 강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현대문명 혹은 현대 경제시스템의 문제를 생산과 소비간의 거리 문제로 요약하고 그 거리를 줄이는 것이 대안이므로 그 대안은 지역화 즉 로컬화라고 말한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더 강한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건 우리는 행복을 더 크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거대화되어 우리가 그 작은 일부가 되어 생산하고 소비할때 우리는 점점 더 개인적인 느낌이 없이 살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엄마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노력을 거쳐 어떤 느낌을 가지고 그것을 만들었는가를 알고 있다. 엄마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을 아이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아이에게 먹인다. 생산과 소비가 모두 느낌을 가지고 이뤄진다. 그러나 우리가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 때 우리는 맥도널드에서 파는 햄버거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누구의 희생과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지,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생산하는 사람도 소비자를 모른다. 서로 아무 느낌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총생산을 늘리는 것이 좋은 정책이라거나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적 시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거대한 경제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희생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노동을 착취하고 인간을 무의미한 소비에 빠지게 만들고 과로와 지나친 욕망의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 진 것을 소비하면서 경제적 효율성을 막연히 따지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국민총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모두 아프고 교육의 질이 형편없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왜냐면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출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인해 국민소득이 올라간다. 만약 문제가 애초에 없었다면 지출도 없고 국민소득의 증가도 없다. 우리는 결핏하면 국민소득 3만불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증가시키려는 국민소득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불행지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웃이나 가족들이 서로 공유하고 정을 나누는 것도 경제활동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식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국민소득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자식들이 모두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면 그것은 지출로 잡혀서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게 된다. 되도록이면 모든 인간들의 사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문제를 만들고 미친 듯이 노동하여 돈을 벌어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돈을 쓰는 사회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사회인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 헬레나가 말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이번 학회에서 발표한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려고 하는 것의 핵심은 행복이나 인간에 있고 그걸 다른말로 하면 감수성이나 느낌에 있다. 무엇보다 행복은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왜 우리의 경제가 지역화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가를 느끼면서 살기위해서다. 우리가 뭔가를 느끼지 못하면서 생산을 최대화하면 비극이 생긴다. 깨끗한 물이 무한정있다는 가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숲은 무한정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깨끗한 물과 숲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그런 것을 마구 낭비하면서 뭔가를 생산할때 자신이 똑똑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마치 금을 돌과 바꾸는 것이나 엄청나게 빚을 내서 흥청망청 쓰면서 자신이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헬레나는 더 크게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영적인 것이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지역화를 우리가 익숙한 세계화의 논리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경제성이 없는 것같지만 그것은 우리가 뭔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환경이나 인간적인 유대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시스템이 뭔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

 

헬레나는 그것을 거리의 개념으로 그리고 지역화로 표현했지만 우리는 다른 표현에도 익숙하다. 예를 들어 느리게 살기라던가 단순하게 살기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가까운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고 (지역화) 느리게 살고 단순하게 살려고 하는가. 바로 느끼기 위해서다.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을 도대체 내가 뭘 하는 것인지를 느끼면서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것을 대개 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더 큰 틀에서 보는 사람,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이 보면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헬레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지금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에 동의하기는 쉬운 일이다. 좀 더 어려운 것은 대안이 뭔가 하는 것이고 특히 그 대안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가지 생각을 했다. 이 생각들을 쓰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첫째로 대안의 구체화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물론 여러가지 대안의 구체적 예를 보고 그것을 배우려고 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에게 맞는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꼭 맞는 대안의 구체적 예를 찾아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대안의 기본정신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답을 향한 문은 오히려 답을 찾지 않을 때 열리는 것이 아닐까.

 

어디까지나 대안적 삶의 첫번째 원칙은 직접 느끼면서 보면서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습관이나 메뉴얼이나 어떤 고정된 이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독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고독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느끼기 위한 고독이다.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버리려고 할 때 우리는 고독해지고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볼 준비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례를 그대로 따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가치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야 하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시대에는 지방으로 가는게 답입니까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누군가는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것이 답일 수 있고 누군가는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것이 답일 수 있다.

 

대안의 구체적 예는 어떤 의미에서 흉내낼 예를 찾지 않을 때 보이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인생길에 대한 답을 찾고 나면 그 답은 언제나 당신의 바로 앞에 서있었다는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른다. 즉 느낌이 있을 때, 볼 수 있을 때 대안의 구체적 예는 보인다. 그런데 그 느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오히려 예를 찾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느낌을 찾는 것이다. 내가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예는 어디에 있지라는 입장에서 남의 예들을 보면 언제나 그것들은 내가 따라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이 운이 좋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린다. 설사 훌룡한 조언을 들어도 저 사람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행동, 내가 할 수 없는 행동만 하라고 한다면서 불평하게 된다.

 

이것은 대안적 경제건 대안적 시스템이건 그 핵심은 공부에 있다는 것 혹은 인간적 성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특히 현대의 기술적 사회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즉 도구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다.

 

이 인간의 부분을 망각하면 우리는 쉽사리 메뉴얼과 이론화의 함정에 빠져서 지금 비판하고 있는 현대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된다. 공유경제건 마을만들기건 지역화 사업이건 이런 저런 메뉴얼을 따라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대안적 삶의 예들이 보잘 것없다면서 그것들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대안은 애초에 시스템이나 메뉴얼이 아니라 인간이다.

 

둘째로 지역화와 세계화의 공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대안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즉 지역화를 세계화와 싸우는 것으로 파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대 쇼핑몰과 지역화 경제를 서로 싸우는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게 파악할때 오히려 지역화 경제는 실패할지 모른다. 굳이 정반합의 변증법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화와 지역화를 둘중의 하나만 선택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상황은 그 둘의 조화로운 공존일지 모른다.

 

어느 도시에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편의점, 거대 쇼핑몰등이 하나도 없다던가 혹은 반대로 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하나도 없고 그런 가게들만 있다던가 하는 양극적인 상황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서로 양자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시대에 자신들이 가지는 역할이 무엇일까를 고민할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을까.

 

컴퓨터나 핸드폰을 각 지역마다 자기들이 만들어 소비한다는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발이나 음식은 어떨까. 우리는 어떤 이념에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식의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이 지역의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실제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때문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지역화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싸고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 커피숍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관계, 공동체 서비스에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즉 커피숍을 단순히 커피를 소비하는 장소로만 생각하는 선입견을 유지하기 때문에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숍의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육서비스는 인간적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면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가 된다. 만약 배움에 있어서 좋은 강의가 전부라면 인터넷 강의가 모든 학습서비스를 대체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학교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집에서 최고의 강의를 들으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실은 대면접촉과 상호 작용의 효과가 학습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발을 통해 땅을 느끼며 걷고 뛰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탈 필요가 있다. 어떤 이념화를 통해 비행기나 자동차를 거부하는 것은 문명적 퇴화다. 부자들도 종종 기꺼이 땀을 흘리며 걷는 것은 그렇게 하는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지 기술에 반감을 가져서가 아니다. 우리는 좀 더 싸게 물건을 사고 좀 더 빨리 어떤 일을 처리해서 돈과 시간을 아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그렇게 아낀 돈과 시간으로 뭘 하는가를 고민할때 우리는 행복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느끼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뭘 느끼며 살까. 우리는 언제 행복해 지는가. 이것이 애초의 질문이다. 이 질문을 잊지 말고,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주변을 잘 관찰하고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답이 떠오를때까지. 그게 뭐야라고 하면서 서둘러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남의 답을 삼켜서는 안된다.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인내심을 가지고 처음의 질문을 묻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로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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