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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공부 그리고 낭만의 가치.

by 격암(강국진) 2017. 1. 19.

이번에 막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래서 학교 소집일에 같이 가서 학교의 선생님들이 앞으로 그 아이가 다닐 학교에 대해, 또 앞으로 할 공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전반적으로 교장선생님에서 일반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솔직하고 선량한 분들이라는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한국에 가득한 하나의 현실을 거기서 또다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낭만의 실종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말하는 낭만이라는 것이 뭔지, 그것의 가치가 뭔지 써보고 싶다. 


지식이나 우리의 관점이란 미래에 대한 예측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비를 맞으면 몸이 젖고 그러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라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지식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비를 맞으면서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왜 그 간단한 지식을 몰라서 뻔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가하고 답답해 질 수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개 이런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배운 사람의 눈에는 더 먼 미래가 더 먼 세계가 보이는 것이다. 


다른 부모들도 그렇겠지만 나도 자식을 둔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한치앞을 보지 못하는 것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다. 반드시 미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적당한 때에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더 커져서 울게 되는 일이 생긴다. 적당한 때에 한 한시간 공부가 나중에는 일주일 공부로 변하는 법이다. 그걸 모르거나 그걸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절제를 못해 실천을 못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철이 없다라고 말한다. 마치 대책없이 사채를 써서 거지가 되어가는 바보를 보는 느낌이랄까. 철없는 아이를 보면 부모는 속이 탄다. 


그렇게 속이 타는 부모는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어떤 행동이나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아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같을 수록 우리는 그 댓가의 확실성과 거대함에 대해 강조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이를 협박하는 것이다. 아이가 이런 저런 일을 하면 끔찍한 일이 생긴다고 믿게 만들어서 그 일을 못하게 하거나 어떤 일을 꼭 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어른들의 수법이다. 이런 협박들은 다양하지만 다 따지고 보면 울음을 안그치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협박이나 매한가지인 셈이다. 비를 맞으면 반드시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니고 감기에 걸려도 그 증상이 가벼울 수 있다. 그런데 비를 맞지 말라고 하고 싶은 부모는 말을 하다보면 비맞으면 당장 급살을 맞을 것처럼 과장하게 되기 쉽다. 


지금 한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공포와 과장이다. 물론 그것들이 대부분 좋은 의도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모들은 실은 자신이 그 나이때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한 일을 자기 아이는 왜 안하냐고 펄펄 뛰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공포와 과장을 늘어놓으며 아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유치원 입시에 실패한 아이를 구박하는가 하면 초등학교 3학년에 학원에 갔더니 이렇게 늦게오다니 너무 늦으셨군요 라는 식으로 말하는 학원선생님도 있다.  반에서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에게 네가 창피해서 내가 친구를 못만난다고 말하는 부모도 있다. 요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선행학습도 없이 학원도 안 다녀보고 그렇게 하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 수없이 많은 학부형들은 그 집은 미쳤어를 외칠 것이다. 마치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이미 아무 희망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낭만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내가 말하는 낭만이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 겸손해 지는 것이다. 정말 뭔가가 확실해 보여도 언제나 거기에는 뭐 미래를 어찌 알겠어라는 한박자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성공을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은 순간이 와도 제가 좀 운이 좋았군요, 뭐 내일은 어찌 알겠습니까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고 거꾸로 세상 망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도 그래도 할 수 있는 걸하면서 사는 거지 내가 뭘 어쩌겠습니까, 혹시 로또라도 맞을지 누가 압니까하면서 껄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런 자세를 계속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니 어쩌면 계속 낭만만 찾는 사람은 위선자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러기란 참으로 어렵다. 적어도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는 사람은 말이다. 인간은 예측을 하고 예측된 미래를 두려워 한다. 자신이 예측한 미래를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그게 이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이따금씩은 낭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낭만의 가치는 우리의 눈을 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이 갇힌다. 그래서 비맞으면 몸에 나쁘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한번만 더 비맞고 돌아다니면 내손으로 패죽이겠다같은 이상한 결론으로 나갈 수도 있다. 


선행학습 못하면 고등학교 공부 못따라간다는 말 참 많이 듣지만 못따라간다는 말이 전교일등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과장인가. 30년전에는 지금의 영어, 수학보다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공부하면서도 선행학습 안하고 고등학교 공부한 사람 투성이였다. 나도 그랬고 학원한번 다닌적 없었지만 명문대에 입학했다. 요즘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중력의 법칙이나 빛의 속도처럼 절대적 자연법칙이라도 되나, 다 경우에 따라 상황은 다를 수 있으니 이러면 이제 다 끝장인 것처럼 무리하게 확신할 일은 아니다. 


여유와 낭만은 어렵지만 여유와 낭만이 없으면 대개의 경우 우리는 좌절한다. 여유와 낭만이 없는 미래 예측은 다 비참한 파국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퇴자금 10억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동사할 것처럼 굴고, 직장에서 퇴직하면 목이라도 메달아야 할 것처럼 말하며, 대학떨어지면 이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처럼 이야기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우리가 답을 못찾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 중에 답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는데 여유와 낭만이 없어지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 그러면 답이 없는 곳을 계속 반복해서 보면서 답을 찾는다. 그러면서 답은 없으며 이제 비참한 미래만 남았다는 좌절과 우울은 계속 깊어지는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요즘 창의력 이야기 참 많이 한다. 그런데 창의력은 반드시 공부를 죽도록 하거나 혹은 공부를 전혀 안하거나 하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유와 낭만이 없으면서 창의력이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저런 공식을 따라하면 창의력이 길러진다는 발상은 창의력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창의란 우리가 모르는 무지에 대한 것이다. 


어른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낭만이 필요하다. 낭만따위의 단어를 들으면 현실을 모른다면서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문맥에서는 그런 지적도 옳다. 화재가 나서 집이 홀랑타버린 사람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낭만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조롱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 욕만 먹기 쉽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집이 홀랑 타버렸어도, 내일 지구가 망하는 것같아도 우리는 낭만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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