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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원근법과 신성모독

원근법과 우리 시대의 신성모독 1

by 격암(강국진) 2017. 4. 16.

원근법과 우리 시대의 신성모독

 

1.     왜 원근법인가.

 

사진을 찍을 때 예뻐 보인다고 해서 굳이 정면과 45도 각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도 우리는 물론 멋지고 의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하는 중요한 방법중의 하나는 2차원의 그림에 3차원의 공간감을 더해주는 원근법을 살리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 달리.

 

15세기초에 원근법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한 것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고 한다. 공간속의 물체는 멀리 있을 수록 작아보이며 평행한 면이나 선들은 먼 곳에서 한 점으로 수렴하는 것같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을 소실점이라고 한다. 소실점의 개념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도 알려져 있었으나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재발견되었고 이후 마사초가 원근법의 원리를 삼위일체라는 프레스코를 그리는데 응용하여 전혀 새로운 그림기법을 탄생시켰다.

 

사진기가 보편화된 이래 현대회화는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현대인들은 원근법에 따라서 그려진 그림에 익숙하다. 그래서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려진 고대 이집트의 그림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리감이 분명하지 않은 조선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그것을 후진적인 그림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근법을 이용한 그림은 서구에서도 르네상스 이후에나 보편화된 것이며 결코 올바른 그림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그림

 

 

예를 들어 건물의 청사진을 생각해 보자 그림은 건축을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원근법을 따라서 가까운 것은 크게  것을 작게 그리지는 않는다. 이 예에 대해서 그거야 당연하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부분이 중요하다. 옳고 그른 것이 당연할까

 

원근법이 정확히 적용되어 그려진 그림을 올바르고 자연스런 그림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관찰점으로부터 세상을 관찰했을 관찰자에게 보이는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관찰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현대 과학 정신의 바탕에 있다. 추상화같은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은 대개 원근법을 지켜서 그림을 그린 것을 정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우리가 관측한대로 세상을 기술한다는 현대과학의 정신에 깊게 젖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된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대적인 회화나 청사진의 경우를 생각하면 있듯이 원근법을 가진 그림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근법을 따르는 것은 그림의 내용에 대해서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에서는 어떤 소년과 관찰자 사이에 나무가 서있다면 소년의 모습은 관찰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는 사실 소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도 그림속에서는 소년의 모습을 그릴 없다. 어떤 꽃의 모양을 아무리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도 꽃이 관찰자로부터 멀리 있다면 화가는 꽃을 그림안에서 희미한 점으로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원칙은 내가 중요한 것으로 느끼는 점을 그림을 통해서 표현한는데 제약을 준다.

 

소설 이름은 빨강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옳고 그름이 뒤집어진 세상을 보여준다. 소설은 요즘은 터키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배경으로 가진다.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올바른 그림이란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그림을 뜻했다. 따라서 그런 사회에서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원근법에 따라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잘못되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일까?  주변의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새로운 그림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져서 그것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의 중대한 범죄가 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열린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올바른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믿건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은 열린 사람이고 옛날 사람들은 닫힌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불공평한 비교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의 상징에 누군가가 오줌을 싼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적인 행위다. 그것을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보고서 사람들은 열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결국 우리가 담담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누군가가 우리의 종교적 상징에 오줌을 싼다면 마찬가지로 매우 화를 내게 될 것이다. 멀리 갈 것없이 지금도 성적으로 노골적인 그림은 그것이 지극히 사실적인 것이라고 해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우리는 흔히 뭔가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관점이나 믿음을 깊은 검토없이 절대시하고 당연시 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종종 놀랄만한 적개심을 보이거나 비웃음을 날리곤 하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은 원근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외국에 한국인은 자연히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과 같다사실 외국인을 모르는 한국인은 정작 한국인이 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낯선 존재로 만드는 기법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거인이나 소인이 나오는 걸리버 여행기나 2차원의 생명체가 나오는 플랫랜드같은 것을 읽어도 비슷한 이유로해서 자기자신에 대해 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 시대의 신성모독은 무엇일까.  원근법에 대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는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 많은 현대인들은 원근법을 알고 있는 스스로를 옛날 사람들보다 현명한 존재로 이해하지만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객관적인 과학적 견해라는 것도 실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원근법이 없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그림과 닮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찰자와 세계의 관계를 최소화한 객관적인 지식만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것은 여러 관점에서 본 그림들을 짜집기 해놓은 것같은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과 닮아있다. 우리도 어떤 측면에서는 원근법 출현 이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근법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고대인들이 원근법없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그들이 먼 곳에 있는 물건이 작게 보인다는 것을 몰랐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건 말이 안된다.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해 놓고는 누구도 멀리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따라 우리를 향해 걸어올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감각신호를 해석하는 아주 기괴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개나 새같은 짐승들과 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세상을 그렇게 볼 것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반면에 원근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한 현대인도 원근법에 혼란을 가져오게 만든 방속에 들어가면 물건이 실제보다 크고 작게 보이는 환각을 경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옛날 사람과 현대인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현대인과 옛 사람의 차이를 너무 쉽게 그들은 멍청했고 우리가 우월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런 해석은 대개 과장이다. 그래봐야 우리는 아직도 플라톤이나 공자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착시를 주는 방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들이 미개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들이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절대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리는 것이 당연하고 옳다고 느꼈다. 즉 올바른 지식을 표현하는 그림이 올바른 그림이라는 태도인 것이다. 문제는 뭐가 올바른 지식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린 그림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세상과 차이가 있다. 그럴 때 옛날 사람들은 틀려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리의 눈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올바르고 적절한 그림이란 원근법따위는 무시한 그림인 것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있는 것이 과거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유령은 존재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실 유령을 보고 있다. 당신도 실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으슥한 골목길 끝에서 소녀가 서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그런 적이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있을 뿐이다. 유령 이야기가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유령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체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에 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유령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유령은 보이지만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감각기관의 오류와 상상력이 만들어 환상이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묘사된 세상에는 유령은 그려지지 않는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과학적으로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 유령은 무시된다. 그것은 올바른 지식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 있지 않다과학에 의해서 그려진 세상은 우리가 아는 대로 그려진 세상이다. 한때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린 그림들이 그렇게 여겨졌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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