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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원근법과 신성모독

원근법과 우리 시대의 신성모독 2

by 격암(강국진) 2017. 4. 18.

2. 우리의 이론과 그 한계

 

원근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다른 사실은 세상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이론이나 가정때문에 세상을 그렇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크고 작게 보이는 앞의 착시의 예에서 이것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의 이론이나 가정은 틀릴 수 있고 그 결과 어떤 시각적 신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결과는 매우 엉뚱할 수 있다. 우리는 빛은 공간 속을 직진한다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보는 세상은 세상에서 오는 빛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실들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아인쉬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통해 빛은 중력에 의해서 휠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게다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냥 시각신호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의 정보와 조합하여 만들어 지는 결과물이다. 우리의 시각에는 시각신호가 들어오지 않는 맹점이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보는 세상에는 구멍이 없다. 우리 머리는 그 구멍을 적당한 그림으로 채워넣어 버리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맹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불연속하게 조금씩 다른 그림들을 보여주면 그림이 바뀌는 속력이 어느 이상이 될 때 우리는 갑자기 그림 속의 물체가 연속적으로 움직인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도 시각 신호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효과다.  

  

 

 

달리는 말

 

 

우리의 시각이 가지는 특성을 보여주는 예들은 수없이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한가지 예는 바로 아래의 것이다.

 

 

 

 

볼록하고 오목해 보이는 그림

 

 

위의 그림을 보면 2차원의 것인데 두개는 볼록해 보이고 두개는 오목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혹은 바닥에서 빛이 올라온다고 생각하는 가에 있다. 우리는 대개 빛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빛이 어디에서 오는가 따위를 신경쓰지 않아도 그림을 보면서 그런 가정을 하게 되기 쉽지만 의도적으로 빛이 아래에서만 오는 환경에 자신을 익숙하게 만들면 오목과 볼록은 뒤집어 질 수도 있다. 즉 쉽게 바꿀 수 있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우리가 뭘 보게 되는가가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보다 복잡한 그림의 경우에도 그런데 일찌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오리토끼의 예를 강조했다고 한다. 같은 그림인데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인다.

 

 

 

오리와 토끼.

 

 

물론 우리가 이론을 믿는다같은 표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이론을 그냥 무작위로 선택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올바른 이론을 발견한다고 반론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즉 이론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증명과 발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찌기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논리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도입하며 지적했듯이 이런 설명에는 한계가 있으며 엄밀히 말하면  몇가지 이유에서 옳지 않다.

 

우선 인간의 지식이란 순환론적인 데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여자가 아닌 사람을 남자로 말한 후 여자는 남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식이다. 우리가 어떤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이론이나 가정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의 관찰결과는 해석될 수 없다. 현미경으로 뭔가를 관찰한다는 것은 일단 그 현미경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관찰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기 위해 마음이라던가 물질, 공간, 시간같은 여러 개념을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한다. 일단 처음에 어떤 개념이 없으면 관찰도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관찰의 결과에 따라서 우리의 이론이나 개념 혹은 가정을 수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달성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절대적인 옳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일관성이다. A라는 이론을 가정하고 B라는 관찰결과를 얻었는데 이 관찰결과는 A라는 이론이 옳다라는 가정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관찰과 이론의 수정을 반복하는데 이 반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점에 수렴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런 수렴이 절대적인 옳음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사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목격한다. 당신이 이웃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이웃이 미운 점만 보이게 되기 쉽다. 그런 관찰의 결과는 그 이웃이 나쁜 사람이라는 당신의 선입견을 강화하기만 할 것이므로 당신은 당신의 선입견을 관찰에 의해서 확인된 사실로 믿게 되기 쉬운데 우리는 종종 이같은 선입견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는 하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 일상생활과 학문은 서로 다르며 학문을 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여러사람이 주관적 오류를 피하려고한다는 반론을 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에서도 관찰에 대한 기술적 한계는 존재한다. 따라서 기성이론을 검증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게 된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이 20세기나 되어서야 나타난 이유는 양자효과나 상대론적인 효과가 측정가능할 정도로 엄밀한 기술이 그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엽이 되자 이런 문제가 해결되었고 두 이론들이 나오게 만든 실험결과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런 현대적 이론의 성공앞에서 우리의 관찰능력은 이제 과거와는 달리 거의 완벽하다고 자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가진 과학적 이론과 개념들은 약간의 수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부심은 과거에도 지금도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가 뭘 측정하지 못하는지 뭘 관측하지 못하는 지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종종 그렇게 생각하듯이 양자론이 나오기 전의 사람들은 보다 엄밀한 측정기술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정말 사소한 차이이므로 세계에 대한 이해에 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찌기 DNA가 관찰되기 전에 물리학자인 쉬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양자효과는 고체의 존재 나아가 생명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것은 매우 작은 소숫점 끝자리에 해당하는 작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그것 없이는 생명체의 존재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뭘 측정하지 못하는지도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엄밀한 측정을 할 수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거대한 입자가속기같은 것을 만드는데 큰 돈을 쓰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측정의 한계는 보다 엄밀한 측정이라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보다 분명히 존재한다. 뇌과학은 이 새로운 측정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리학 법칙들을 찾아낼 때 뉴튼은 공간속을 움직이는 고립된 입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입자의 움직임을 측정한다는 것이 현대과학을 태동시킨 기본적 아이디어다. 지금도 많은 뇌과학자들은 정성적으로는 이런 뉴튼적인 혹은 환원론적인 방식으로 뇌를 연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체실험은 윤리적으로 보다 더 제약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윤리문제를 우회할 수 있는 동물실험을 한다. 그런데 쥐나 원숭이의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은 진공을 움직여 날아가는 입자의 모습을 측정하는 것과 많은 방면에서 같다. 그들은 어떤 반복가능한 환경을 주고 그 환경안에서 쥐나 원숭이 뇌의 활동을 측정한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환경과 뇌활동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어떤 법칙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전기 충격을 받는 쥐의 뇌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뇌과학자들은 금새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뇌는 진공속을 날아가는 한 개의 질점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입자들, 세포들로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뇌는 외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뇌를 이해한다는 것의 핵심은 이 상호작용을 이해한다는 것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을 고의적으로 축소시켰을 때 우리는 뭔가 문제의 본질이 되는 것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관심있는 뇌는 살아있다. 그런데 죽은 뇌와 살아 있는 뇌의 차이가 바로 환경과의 소통이다. 우리가 환경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뇌를 죽이고 죽은 뇌를 연구할 때 우리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뇌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관인데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하게 된 뇌를 연구하면 정말 뇌를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지적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마취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숭이를 마취시키고 살아있는 뇌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사실 비슷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이번에는 아예 마취도 하지 않은 원숭이나 쥐의 뇌에 센서를 설치하고 뇌의 활동을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 하나의 기술개발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런 기술적 발전을 이뤄내도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물, 심지어 행동하는 인간의 뇌에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뽑아내게 되었지만 그 데이터들은 뭔가 엄청나게 비일관적인 것으로 혹은 많은 노이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환경에서 실험을 해도 거기서 나오는 데이터가 항상 같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몸무게를 저울로 잴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물론 뇌세포 한개를 다룰 때는 우리는 비교적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경세포 하나라던가 신경세포의 시냅스 하나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구할 때는 비교적 물리학적이고 화학적인 연구방식을 따를 수 있고 거기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활동하는 동물의 뇌 전체를 보게 되면 이와는 매우 다르다. 이런 종류의 데이터는 많은 평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똑같은 그림을 보여줘도 당신의 시각피질에 있는 세포의 활동은 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평균을 해야 그 세포가 특정한 그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경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실험에서는 똑같은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상하다. 원숭이는 지금은 바나나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전에는 암컷생각을 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설사 외부환경이 똑같다고 해도 내부적으로 조건이 달라지고 만다.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므로 재현성을 중시하는 현대과학은 이 앞에서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노이즈라니 도대체 뭐가 노이즈란 말인가. 뇌는 이렇게 쓸 데 없는 일을 잔뜩 하는 기관이라는 말인가. 노이즈가 진짜 노이즈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뇌와 컴퓨터의 연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측정의 문제는 고차원성의 문제고 강력한 상호작용의 문제다. 물리학의 발전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뭐든지 측정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실은 우리가 정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된 경우뿐이다. 우리는 오직 작은 차원을 가지는 단순한 시스템이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어져 있을 때만 뭔가를 엄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차원이 높아지고 우리가 관측하는 시스템이 고립계라는 가정을 할 수 없어지면 측정은 어려워지고 설사 측정을 해도 그렇게 나온 데이터가 뭘 의미하는 것인지를 해석하기가 어려워진다.

 

 

애초에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느 것도 완벽히 고립되어져 있지 않다. 고립되어져 있지 않지만 고립된 것으로 생각하자는 것은 하나의 근사다. 그런 근사가 잘 맞아떨어지는 곳에서는 이론과 관측의 순환이라는 현대과학의 기제가 잘 작동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 가면 그게 잘 안된다. 그럴 때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이론이란 바로 이웃 사람에 대한 선입견처럼 되는 것이다. 뇌과학은 그 한가지 예고 경제학이나 역사학 그리고 예술같은 분야가 또다른 예일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질문에 대한 논리적인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체험은 매우 고차원적이고 비고립적인 것이다. 즉 아주 많은 것들이 집단적으로 관여하고 상호작용한다. 때문에 같은 음악도 문화적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감상되며 유행가는 곧잘 큰 인기를 얻었다가도 금방 잊혀지고 만다.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의 이론운운하면서 연구에 몰두하지만 그들은 사실 단 하나의 여자나 남자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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