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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마크 릴라의 분별없는 열정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8. 10. 3.

18.10.3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썼던 콜럼비아 대학의 인문학교수 마크 릴라의 분별없는 열정을 읽었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된 것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과 삶들을 논하고 있는데 이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자연히 20세기 철학 전반에 대한 소개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 거론하는 철학자들을 순서대로 말해보자면, 마틴 하이데거, 카를 슈미트, 발터 벤야민, 알렉상드르 코제브, 미셀 푸코 그리고 자크 데리다이다.  이 사람들은 대개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에 태어나서 유럽에서 세계대전들을 겪었고 프랑스의 68혁명을 겪기도 했다. 이 책에서 마크 릴리가 반복하는 중심적 질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왜 20세기 철학은 그렇게 틀렸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틀렸고 결국 좌절했으며 지적으로 파산했을까? 

 

 

내가 마크 릴라의 질문을 이렇게 고쳐 쓰면 그 질문은 자연스런 질문을 하나 만들어 낸다? 왜 틀렸나고? 그럼 맞을 줄 알았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들의 실패에 놀라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의 실패에 놀란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이 응당 맞을 거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꼭 맞을 것같았던 기상 예보가 틀렸던 일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더구나 그렇게나 뛰어난 지성들이 틀린다면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게 당연할 것이다. 틀리다는게 뭐가 그리 놀라운가?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가지 좋은 방법은 바로 물리학분야와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20세기에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 중의 하나인 독일인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생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하자 그에게 물리학은 이미 거의 끝난 분야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비고전적 이론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출현하기 이전인 19세기 말엽의 물리학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말하자면 물리학의 최종적 이론에 우리가 도달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출현 이후 물리학은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21세기 초인 현재 아직도 사람들은 소위 대통합 이론이니 모든 것의 이론이니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 물리학은 아직도 최종 이론을 찾는 중이다. 

 

철학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물리학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물리학은 정량적인 학문이므로 어떤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인문학 분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물리학자들은 기존 이론과는 다른 예측을 내놓는 이론을 만들고 그 예측이 맞으면 옛날 이론을 포기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기에 뉴튼의 고전역학은 20세기초에 어떤 의미로 포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철학이다. 재미있게도 20세기에 많은 철학자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철학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철학이란 분야는 이제 그 최종적 이론을 만들어 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최종적 이론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의 새로운 사색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자들은 아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고의 끝에 도달하여 그 뒤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자신의 무능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미래가 애초에 더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그래서 그들은 종말론적인 최종 역사의 사고를 펼치고는 했고 폭력과 독재정치에 유혹당했다. 그들은 역사의 종착역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곳으로 빨리 가는 곳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류는 그곳을 향해 갈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물리학과 비교했을 때 철학이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물리학 분야는 최종적 이론이 하나였다. 즉 뉴튼의 고전역학이 최종적 물리 이론으로 믿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되었다. 그런데 철학분야는 많은 철학자들이 다른 종착역에 도달해서는 자신들의 것이 최종점이라고 주장했다. 즉 뭐가 최종철학인지 물리학처럼 합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철학들이 틀렸다는 것은 물리학처럼 간단히 실험으로 판정나지도 않았으므로 사상전쟁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철학자들은 서로 서로 남들이 자신의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21세기 현재에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철학의 연구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는 헤겔철학이 최종적 철학이론이라고 믿었다. 헤겔이후에 헤겔을 극복했다고 주장했던 하이데거나 마르크스같은 다른 철학자들은 헤겔을 오해한 것에 불과하며 그들의 이론은 헤겔의 철학안에서 포용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의 종말은 상상력의 종말이며 이것은 곧 역사의 종말이다. 그래서 냉전종식을 보면서 1992년에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 책에서 코제브를 언급했다고 한다. 즉 인류는 냉전종식과 함께 역사의 최종장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코제브는 37살이 되는 1939년에 철학자로서의 삶을 거의 끝낸다. 이후에 그는 순수히 관료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미래사회는 계급의 구별이 없어지고 이성적으로 조직된 관료사회로 발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의 태도는 철학도 끝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끝났다는 것처럼 보인다. 

 

1889년에 태어난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은 물체의 존재와는 다르게 역사적 자기 구축을 통해서 가능해 진다는 이론을 만들었고 이것을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 1927년에 발표한다. 그리고 4년뒤부터 그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시간과 역사속에서 만들어 지고 펼쳐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역사적 운명에 의해 자신이 세계로 지칭하는 하나의 응집된 활동, 언어, 사상 영역에 던져진 존재이다. 

 

1888년에 태어난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반자유주의 정치학자로 정치의 본질은 누가 누구와 친구이고 누가 누구와 적인가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활동이란 자신을 지켜내는 활동이었고 그 핵심은 그것을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하이데거와 슈미트 모두 나치에 자발적으로 동조했는데 이들의 주장을 보면 결단과 자기 보존내지 창조를 말하는 것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다. 칼 슈미트는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독재를 지지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기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이르는 자유는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의 본질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결단을 내리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공평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지적하자면 우리는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나쁘게만 말할 수는 없었다.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전반의 유럽은 극심한 혼란속에서 사회적 정체성이 마구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즉 질서의 붕괴가 생사를 가르는 문제라는 것이 자명해 보였던 시기였다. 

 

이야기를 약간 돌려서 나는 다시 물리학자와 철학자를 비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앞에서 말했듯이 물리학자는 지금도 모든 것의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대통합이론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런 이론을 완성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우리는 물리학자가 좋은 정치가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여기에는 두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첫째는 왜 물리학자의 지성을 과소평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이란 학문을 하면서 단련된 지성이 왜 현실사회에서는 쓸모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서구보다 한국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한국인은 물리학자나 공학자를 철저한 전문기술자처럼 취급하며 정부는 법학전공자같은 인문계열의 인물로 채우곤 한다. 이공계에서 공부한 사람은 세상을 모른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그렇다면 인문계는 뭘 안다는 뜻일까? 철학?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부분으로 넘어간다. 그럼 왜 우리는 뛰어난 철학자는 뛰어난 정치지도자가 될거라고 쉽게 믿는 경향이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20세기에 가장 뛰어났던 물리학자라도 그 사람이 틀렸었다고 하면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런데 20세기의 유명 철학자가 틀렸었다고 하면 그것 참 놀라운걸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우리는 2천년전의 사람인 플라톤이나 공자가 틀렸던 것도 놀랍게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철학은 시공을 초월한 지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반면 물리학은 바뀔 수도 있으며 어떤 전문분야에 국한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물리학자편을 들자고 계속 물리학자를 거론하는게 아니다. 나는 다만 우리가 철학자를 생각할 때도 물리학자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것이 철학을 구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철학자란 전문가다. 가장 뛰어난 철학자도 그렇다. 불행한 것은 물리학자의 경우에는 어떤 질문이 물리학적인 질문인지 아닌지를 비교적 잘 구분한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영역이 아닌 곳에 가면 물리학자는 자신이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말은 남용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나아가 철학자들 자신도 자신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의 이론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철학은 또 하나의 전문분야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학문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는 그들이 배운 그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거론한 철학자들의 실패의 원인이다. 그들은 모두 현실 세계 전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좁은 분야에서 이성적으로 명쾌한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현실 그 자체와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은 마치 생선장수가 온 세상을 생선시장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바로 전제정치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어떤 독재자라도 좋고 어떤 댓가라도 치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면 우리는 철학적 최종이론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 우리는 역사의 최종답을 아니까 그렇다. 자크 데리다를 빼면 이 책에서 거론한 철학자들중 다수는 정치에 뛰어들었고 크게 실패했거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대개 독재를 찬양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앞에서 말했듯이 카를 슈미트와 마르킨 하이데거는 적극적 나치 지지자였고 미셀 푸코는 이란의 종교적 독재정권을 찬양했다. 

 

최종진리의 유혹에 빠질 때 위대한 철학자는 때로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물론 철학자의 삶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유명한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면 거의 예외없이 그 영광만큼이나 큰 탈선과 좌절이 이어진다.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는 자기보다 17살이나 어릴뿐만 아니라 갓 대학에 들어온 어린 여학생인 한나 아렌트와 사랑에 빠진다. 발터 벤야민은 자기를 후원한 남자의 처제와 사랑의 도피를 벌이고 도무지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공산진영과 어울리는데 그게 알고 보면 남자관계가 복잡했던 러시아 여자 라시스 때문인 것같다. 미셜 푸코의 이론은 결국 동성애자로 괴롭힘을 당하던 스스로를 구하려는 목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고 자크 데리다는 모든 것을 해체한다고 했으면서 말년에는 스스로 해체불가능한 정의라는 개념을 등장시켜서 지적인 파산에 빠져든다. 

 

유명 철학자들의 이름이 주는 무게에 눌려서 그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런 현실에 한탄을 할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 철학따위는 그저 말장난이며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할 법하다. 많은 한국 사람에게는 주자학이나 불교철학에 대한 대안이 서양철학이라고 느껴졌을 법한데 이제는 서구의 20세기 철학조차도 어딘지 공자의 말이나 음양오행설처럼 낡은 냄새가 느껴지는 것같다. 

 

그리고 마크 릴라는 2016년에 쓴 후기에서 현재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상의 시대가 끝이 나자 이제 우리는 틀린 이론들에 대해서 잊고 싶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새 이론도 없고 새 이론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이론이 없다는 사실 이전에 이론의 부재에 대해 문제의식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크 릴라의 다른 책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문제의식의 부재, 비전의 부재가 낳은 문제가 곪아서 나빠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건 다시 한번 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가 고전역학이 틀렸다고 하니까 원시시대로 돌아가지 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냉전의 승리는 역사의 종언인 것같았지만 2001년의 911테러 이후 세계는 어떤 안정되고 최종적인 단계로 수렴해 가기는 커녕 점점 더 복잡하고 이해불가능한 곳이 되어가는 것같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를 묘사할 올바른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마크 릴라는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틀린 것같아 보이는 과거의 여러 철학이론들을 무시해야 할까 아니면 그걸 다시 한번 열정을 다해 공부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사상전쟁이 남긴 상처들이 무서울 때도 있다. 

 

이런 난관을 벗어나는 하나의 탈출구는 아마도 철학자를 물리학자처럼 취급하는 것일 것이다. 물리학자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물리 문제에서 물리학자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위대한 과거의 지성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이고 그것도 단순히 철학이라기 보다는 보다 좁은 분야의 전문가 였던것같다. 즉 모든 철학자가 같은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질문을 추구하고 그 안에서 결과를 얻었다.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사고를 확장하되 다만 그들이 한계 범위를 가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직 대안이 없는 이 시대에는 추천할 만한 길이다.

 

사실 아직 대안이 없다는 것도 낡은 철학자들의 인식능력의 부족일 수도 있다. 후일 우리 시대를 돌아보면 마치 유학이 망하고 서양학문이 퍼지고 있는 시기였는데도 유학자들이 유학의 미래가 없다고 느꼈다고 해서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바람직한 탈출구는 우리가 합리적 행동과 판단을 위해 확고히 과거를 뛰어넘는 다음 세대의 수단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로서는 그것이 과연 확실히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말해온 새로운 철학같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인공지능으로 결합된 집단적 정보처리 방식의 보편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뭐가 답일지는 모르고 심지어 답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고 사실 투자한 만큼의 댓가를 주는지도 알 수 없다. 우선 이 책만 봐도 그렇게 쉽지 않다. 쉬울 수가 없다. 애초에 난해하기로 정평난 철학들을 마크 릴라는 놀라운 명료함과 박식함을 가지고 소개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특히 한국의 독자에게 이 책이 쉽다라고 소개한다면 그건 솔직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는데 처음 읽을 때에는 지루하기만 했었다. 유명 철학자들의 험담집처럼도 읽힌다. 나는 두번째로 읽을 때에서야 이 책이 유익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제 나로서는 이 책을 20세기 유럽철학을 나름대로 쉽게 소개하는 좋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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