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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읽으며

by 격암(강국진) 2019. 4. 4.

19.4.4

도시계획분야에 있어서 고전으로 여겨지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제인 제이콥스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사고가 얼마나 사실과 거리가 멀 수 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떤 도시를 설계할 때 마치 우리가 자동차나 자전거를 설계할 때와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지역을 어떤 기능을 가진 부속들의 조합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는 공원을 놓고 여기에는 학교를 여기에는 스포츠 센터를 설치한다는 식으로 생각을 진행시키며 그것은 각각 휴식의 기능, 교육의 기능, 레저의 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해서 그런 기능들이 잘 조합되어진 하나의 지역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도시나 지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옳을까?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반세기 전의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이런 말을 들으면 도대체 여기서 뭐가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설계란 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러가지 기능을 가진 부속품을 조립하는 것이 설계가 아닌가?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도 우리는 무슨 타운이니 단지니 하는 곳의 설명을 들을 때 거의 같은 인상을 받지 않던가? 휴식공간과 상가 그리고 주거지역등으로 구분해서 계획이 세워지지 않는가? 

 

우리의 설계는 대개 완전히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인구가 만명정도쯤 되는 작은 소도시나 전원도시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잘 기능하는 하나의 고립된 마을을 도시의 한구석에 재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설계를 진행한다. 제이콥스는 실제의 마을을 보면 이런 접근은 재앙에 가깝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고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기능을 가진 부속품들의 조합으로 보는 시각은 궁극적으로 인간들을 고립되게 만든다. 놀이기능이 필요하면 놀이를 위한 장소를 따로 마련하고, 교육기능이 필요하면 교육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서 그곳에 좋은 건물을 짓겠다는 생각은 놀고 싶은 사람, 놀아야 하는 사람은 놀이를 위한 공간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로, 어른과 아이로, 직업별로 나뉘어 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공장에서 차를 조립할 때 특정한 부분을 조립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런 관점에 따르면 상가는 상가끼리 모이고 주거지역은 주거지역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모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은 전부 한쪽으로 모여서 공부에 집중하고 어린 아이를 돌볼 사람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한쪽으로 모여서 육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효율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제이콥스는 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바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녀가 중요한 장소로 지목하는 것은 바로 거리다. 기능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은 흔히 길 혹은 거리라고 부르는 곳은 그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지나가는 통로의 기능만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제이콥스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건물들의 출입구가 바라보고 있는 넓은 보도야 말로 그 지역공동체의 중심적 광장이며 핵심적으로 중요한 삶의 현장이라고 말한다.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된 거리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흥미로운 일을 생기게 하고, 그 지역의 윤리적 기준을 지키게 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멋진 건물이나 풀밭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그래서 인간을 잊어버리고 설계된 도시는 매력이 없다. 그런 설계는 인간 자체가 매력의 핵심적 원천이라는 점을 잊고 자꾸 인간들을 고립시키고 분리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도시설계를 하는 사람들은 빈종이를 보면서 아름다운 풀밭과 벤치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거기서 쉬고 싶어할 것이고 그곳을 좋아할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모여들고 좋아하는 곳은 역전앞의 돌계단 같은 곳이다. 그곳에는 녹지가 없고 벤치조차 없어서 사람들이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 앉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한이 있어도 그곳을 흥미롭게 여긴다. 왜냐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는 사실이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우리는 종종 그런 곳에서 스케이드보드를 타거나 아이스크림을 팔거나 공연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숲속의 어두운 녹지보다는 거리의 불빛이 빛나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대도시의 밤거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실은 높은 벽이나 엄격한 출입제한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안전을 제공한다. 제이콥스는 책에서 놀라운 통계를 소개하는데 그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넓은 보도에서 여러 사람들이 섞여서 시간을 보내는 저개발지역은 범죄율이 낮고 생활만족도가 높은데 앞에서 소개한 계획도시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그 이유가 바로 앞에서 말한 분리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른과 아이가 분리된 세계를 생각해 보라. 아이들만 모여 있으면 그 아이들은 위험한 어른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니 안전해 지는가? 그 반대다. 실제로는 아이들중의 나쁜 아이들이 어른의 눈을 피해 다른 아이들을 마음껏 괴롭힐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학교폭력이란 이름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학교 담장이란 구분을 통해 사회와 분리되어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가 거대한 광장에 아무런 질서도 없이 텐트같은 것을 쳐놓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같이 사는 모습을 본다고 해보자. 우리는 흔히 이런 상황을 혼돈으로 여긴다. 그래서 길을 만들고 장벽을 만들어 그것에 질서를 부여했을 때 우리가 문명적으로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흔히 거리의 삶에 대한 비하의 형태로 정리되는데 예를 들어 어린 학생들의 무리가 그들과 나이도 직업도 다른 여러 어른들이 있는 거리에서 섞여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래서 그들의 반응은 어떻게 하던지 그 학생들을 어떤 방안으로, 어떤 담장안으로 집어넣어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주장한다. 이제 아이들은 더 안전하며, 더 교육적으로 우수한 환경에 있고, 더 흥미로운 곳에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제이콥스의 주장은 현실을 보면 그건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도시는 고립된 작은 마을이 아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여러 이방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고립된 전원도시는 그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모두 다 아는 곳이며 말하자면 옛날 한국의 집성촌 같은 곳이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분리가 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시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래서 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작고 외진 전원도시에서는 큰 문제가 안되던 것이 다양한 낯선 사람들이 함께 사는 도시에서는 그 지역을 망치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에서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나 잠시 잠깐 보게 될 뜨내기들과 분리된 공간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분리는 어떤 지역에 존재하는 사람의 다양성을 떨어뜨리고 그러면 거기에 있는 시설의 사용률도 나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공원주변에 사무실만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곳의 사람들은 점심시간에만 공원을 사용할 것이며 낮의 근무시간이나 퇴근후의 시간에는 그 공원이 텅텅비게 될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그 공원은 종종 텅비고 무서운 공간이 된다. 그러면 시설을 파괴하는 사람, 노숙자, 은밀하게 나쁜 짓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유혹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사무원들도 오지 않는 우범지대 같은 곳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그 공원주변에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공원은 모든 시간대에서 일정한 수의 사용자들로 채워질 것이고 공원은 항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공원을 안전한 곳으로 여긴 사람들은 더 많이 공원을 찾게 된다. 이것도 다시 한번 분리가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에는 우리의 오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어떤 시스템이 할 수 있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교육을 부모님과 선생님이,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좋은 건물과 어떤 교육 시스템이 하는 일로 파악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반복해 보자. 우리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메뉴얼로 만들면 그것만으로는 자전거 타기가 어렵다. 우리가 메뉴얼로 만드는 것에는 언제나 뭔가가 빠져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계획을 해서 만든 도시는 뭔가를 빠뜨리기 쉽다. 그런데도 우리가 설계를 할 때는 마치 우리가 모든 부분을 아는 것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는 부품을 조립한다. 그리고 그 빠진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빠뜨린 부분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인간 공동체다. 즉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소통하고 서로를 돕는 인간적인 힘이 공동체와 지역을 살리는 기본적인 힘인데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기 너무 쉽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계나 공장같은 것을 만들고서는 이 안에서 인간은 행복할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히 서로를 포기하고 만다. 서로 안 만나면 최고로 편하고 효율적일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인간의 일을 시스템에게 떠맡기고 인간대신에 시스템이 그 일을 해줄거라고 믿어버린다. 

 

그런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에는 한국의 아파트 촌이 있다. 한국에는 뉴욕의 1960년대 같은 우범지대는 드물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촌에서 자라난 아이들을 보면서 모순을 많이 느낀다. 사람들은 골목을 없애고 아파트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사교육비를 들인다. 그래도 문제는 때로 아주 심각해 지고는 한다. 한번은 친구에게 매춘을 시키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것은 바로 분리와 계획의 결과가 아닐까? 우리가 골목을 버리고 아이들을 고립시킨 결과가 아닐까?

 

한국의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을 계속 그들만의 장소로 돌린다. 학교는 물론이고 학원으로 학원으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삶을 보면 교육은 사실 핑게고 한국의 어른들은 그저 아이들을 어딘가 아이들만의 세계에 보내버리고 싶어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귀찮고 싫은 것이다. 일어나서 잘 때까지 계속 교실에서 교실로 돌아다니는 것이 많은 한국 아이들의 삶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요즘은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외부와 출입을 막고 있다. 어떤 때는 설계 자체가 일종의 성처럼 만들어 져서 외부인들이 드나들기 어렵게 되어 있고 이때문에 택배나 배달서비스도 받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고급 주택으로 부른다. 그래서 지역은 더 많은 작은 지역으로 잘게 나뉘어 진다. 이것은 또 어떤 효과를 낼까?

 

우리는 오래된 동네를 허물고 아파트 촌을 만드는 것을 개발과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골목이 없어지고 오래된 가게들이 없어지고 지역커뮤니티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게 다 뭐란 말인가. 사실 세금을 안내면 돈을 벌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면 나중에는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우리가 분리를 추구하면 처음에는 문제가 안되고 오히려 편하다. 하지만 문제가 누적되면서 나중에는 더 큰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때로는 골목이 유지된 곳에 가서 감탄하면서 그곳을 관광삼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 아파트 찬양론을 펼친다. 고령화된 한국 사회가 노인문제를 겪거나 저출산 문제를 겪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우리가 꾸준히 우리의 주거 환경을 더욱 더 고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교육과 노인문제에 있어서 그 지역에 지역커뮤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다. 우리는 지금 그 문제를 정부보조금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거나 개인적인 비용지출로 메꾸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실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발전이 뭔지, 우리가 뭘 버리고 뭘 얻으며 그것을 횡재한 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때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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