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청년을 생각하다.

by 격암(강국진) 2020. 9. 19.

20.9.19

오늘은 1회 청년의 날이다. 기념식 중계를 보니 BTS의 자기 소개가 나오고 문재인 대통령이 공정을 강조하는 기념사를 하고 있었다. 청년이란 대개 20대의 젊은 남녀를 뜻하는 말이지만 나는 청년을 이렇게 생각할 때 청년이란 거의 의미가 없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의 20대들은 다들 매우 다른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청년이란 말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청년의 의미는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20대인 사람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김연아나 BTS는 나이로 보면 분명 청년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또한 분명히 청년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기성세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김연아쯤 되면 피겨스케이트계의 지도자이고 BTS도 이제 단순히 일개 가수라고 부르기 어렵게 되었다. 그들의 인기때문에 그들이 속한 빅히트앤터는 한국의 기존 연예기획사 전부를 합친 것 이상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들을 한국 연예계의 지도자중 하나라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싫든 좋든 그들의 선택 하나 하나가 한국 연예계에서 하나의 역사로 남을 만큼 그들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청년의 본질은 가지지 못한 것, 성공하지 못한 것, 찌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폼 안나고 존재감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도무지 뭘 하고 살면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청년의 본질이다. 자기를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청년의 본질이다. 이런 상태를 청년인 것이라고 부른다면 BTS나 김연아는 어떤 의미에서 청년이 아니다.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청년에 우리가 주목할 이유가 없다. 청년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비록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지만 저 청년은 시간이 지나면 뭔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에 대해서 말하며 공정을 말했지만 그 개념은 다소 애매하다. 청년에 대한 공정이란 결국 우리가 상대에 대해 뭘 믿고 있는가에 크게 의존한다.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투자를 할 사람이 만약 회사가 성공하면 99%의 이득은 내가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불공정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만약 그 회사가 망할 확률이 99.999%라면 사실 그런 주장은 매우 너그러운 것이다. 망할 확률이 99%라면 투자자가 이득의 99%를 가지겠다는 주장은 공평한 축에 들테고 망할 확률이 5%라면 그런 주장은 매우 불공정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에 대해 이런 저런 계산을 할 수는 있지만 사실 미래에 대한 확률이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믿음이다. 누구도 미래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청년에게 공정해지자는 말은 결국 우리 청년을 믿어 보자는 말이 되는 것이다. 청년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자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청년에게 일자리를 주고,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 공짜는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가. 단순히 청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적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청년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기성세대가 청년에게 하는 것에서만 그런게 아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가. 기본적으로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는 때로 자신의 청년 시절을 생각하며 서글퍼 한다. 비록 지금 그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훨씬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미 묶여있는 존재다. 자신의 가능성은 이미 소진되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던져버리고 체면이나 찌질해 보일거라는 두려움을 버리고 다시 젊어질 용기가 없다.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자신에 대한 희망이 그리 크지 않다. 이 말은 스스로를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기성세대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 자신에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나 운이 있을거라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가 지금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었을 때는 그저 우연히 시작한 공부나 연애가 인생을 바꿔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때로 그런 경험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정신이 멍멍할 정도로 충격적으로 가르쳐 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기성세대가 되고 나면 이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미지의 존재였던 나라는 사람은 이미 샅샅히 탐구되었다. 이제 숨겨진 재능따위는 없다. 그리고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이미 뭔가가 된 우리가 그걸 깨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만큼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 기성세대는 과거에 묶여있다. 아무 것도 없는 청년처럼 홀가분하지 않다. 

 

하지만 나이가 20대라고 해서 반드시 청년인 것은 아니다. 재벌 3세로 태어나 가진 것은 많지만 실은 집안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알몸의 자신에 대한 믿음은 거의 없는 젊은이가 청년일까? 그나 그녀는 금전적으로 이미 많은 것을 가진데다가 스스로에게 희망도 없다. 그나 그녀는 집안이 물려준 돈에 붙어있는 기생충같은 존재다. 이것이 어떻게 청년일까? 

 

재벌 3세는 세상에 드물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월급 많이 받는 직장, 안정적인 직장이 어딘가만 따지는 사람들은 많다. 이들이 정말 청년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빨리 기계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 빨리 생활을 안정화시키고 나머지 50년 인생은 기계처럼 변화없이 단조롭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이 말이 공무원이 되어서 서둘러 안정을 찾는 젊은이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우선 삶에서 직장이 전부는 아니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동사무소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단순히 공장직원이거나 동사무소 직원에 멈추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적으로 내가 뭘 추구하는가 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런게 없다면, 우리가 정말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죽어있다라고 할 수 있으며 청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장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사람은 자신이 이미 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대개 삶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다. 더이상 미친듯이 달려가는 삶은 아닐지라도 장년이나 노년도 다 정리할 것이 있는 법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노년이 되면 남은 삶이 백년이나 50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노년이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삶을 정리하고 싶어진다. 설사 뭔가를 새로 한다고 해도 자기 삶을 정리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뒤돌아보지 않고 끝내버리면 오히려 아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노년에는 노년대로의 행복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청년인데 이미 청년이 아니라는 것은 외부적인 시선으로나 내부적인 시선으로나 꽤 절망적인 것이다. 삶이 너무 권태롭다. 삶이 마치 이제 시작하나 싶었는데 어느새 이미 다 끝나버린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꼭 청년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나이든 기성세대는 청년이지 않아도 나름대로 살 수 있지만 젊은이가 너무 일찍 청년이기를 포기하면 사는 일은 너무 고통스러워진다. 다시 말해 청년은 새로운 자기를 찾아야 하고, 아무리 쥐어짜도 자신에 대한 믿음따위 더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쥐어짜서라도 자기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내 안의 어딘가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석이 있을 것이다. 청년이 청년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너무 괴로운 일이다. 

 

누군가가 창의적이 되라던가, 야망을 가지라고 말하면 아마도 젊은이들은 대개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미 열심히 살고 있는데 더 열심히 살라고 하는 것같아서 짜증이 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 열심히 사는 것같지만 좌절과 포기가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을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이미 나는 별로 큰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버렸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열심히' 사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보기엔, 형이 보고, 누나가 보고 부모가 보기엔 이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나는 안돼하고 미리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더이상 청년일 수 없는 기성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것은 어린이와 청년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 어쩌면 기성세대가 가지는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가능성일 수 있다. 더 열심히 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이들을 믿는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야망을 가지라고. 넌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왜 미리 포기하냐고. 정작 본인은 이미 자신의 청년시절은 진작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아직 청년이라고 믿는 것이다. 당신을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짜증나게만 들을 일은 아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