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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집단주의적인가?

by 격암(강국진) 2020. 11. 21.

겨울에 들어서면서 코로나의 확산세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유럽도 대단하지만 미국은 11월 20일 기준 하루 확진자 수가 19만 2천명이나 된다. 미국의 인구가 한국보다 6배쯤 크다는 것을 고려해도 엄청나고 더구나 이는 증가중이다. 한국은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면서 난리나는 수준이 3백명이니 인구대비로 백분의 일 수준인 셈이다. 

 

코로나 문제가 시작된 2020년 초이래 한국의 성공적 대처는 끝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왜 한국은 다른가. 이는 어느 정도 한국을 민주진영의 체제 선전 선두에 서게 했고,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을 서두르라는 메세지를 던지게도 만들었으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양자선택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마지막 부분에 대해 좀 더 말해 보자면 다시 말해 그것은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 정부의 통제에 잘 따른다라는 설명을 만들어 내고 그게 올바른 설명인지에 대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면 집단주의와 대비되는 개인주의란 현대 서구 문명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 이래의 근대, 현대 서구 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자주 강조되는 것이 바로 개인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라는 것은 서구 문명이 지배하는 지금의 세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말이다. 이는 두 가지 때문에 더 강조되는데 하나는 전체주의 또는 파시즘에 대한 반감때문이다. 20세기초의 세계대전을 불러 일으킨 이 파시즘은 결국 우리가 주체적인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로 해석된다. 그러니 진정한 개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또 하나는 자본주의다. 서구의 국가는 본래 자본주의적 이유로 해서 기독교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서 세속 권력이 만들어 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핵심중의 핵심은 개인적 소유권이다. 시장이란 물건이 이쪽 소유에서 저쪽 소유로 넘어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가득 찬 세상은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고 자연히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를 통해 개인이라는 개념에 주의하도록 교육될 수 밖에 없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개인이다. 너는 이러저러한 권리와 소유를 가진 존재다라는 것이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된 사회의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는 말은 한국인에 대한 비하를 온건히 표현한 것이다. 서구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봉건주의가 극복되어 공화국이 생길 수 있었던 것처럼 낡고 비효율적인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 전체주의다. 즉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는 말은 그래도 한국인은 아직 서구인들처럼 충분히 진화한 사회의 시민이 못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한국인을 그다지 높게 평가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가 인간보다 빠르게 뛴다고 해서 인간이 개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어떤 상황에서 좀 더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해서 서구가 한국의 체제와 사회를 부러워 할 필요는 없으며 역시 서구 사회의 우월성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코로나 상황이 워낙 장기화되고 지금 서구 사회가 문제를 워낙 심각하게 겪고 있기 때문에 이런 체제우월의 자신감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으로서 보수화된 선진국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란 말뿐인 거라고 느낀다. 그들은 스스로를 강력한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파시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전체주의적이라거나 집단주의적이라고 비난 까지 한다. 서구인들은 자기 자신을 바깥의 시선으로 보는 일이 드물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국가의 오래된 시스템에 적응하고 그것으로부터 변화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록 전통이니 시대를 초월한 가치니 하고 좋게 표현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시대를 진짜 초월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워싱톤이나 링컨 시대의 미국인들이 추구했던 가치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해도 그들이 만들어 낸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21세기를 살아 본 적이 없고 단지 당대의 사회가 필요한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든 시스템 예를 들어 미국 대선 시스템같은 것을 전통 운운하면서 21세기에도 반복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없겠는가. 이번 트럼프-바이든 미국 대선은 이 낡은 시스템이 얼마나 바보같은 것인지를 전세계에 중계하고 있다. 선거는 엉망으로 진행되고 집계도 엉망이어서 중복투표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나마 선거가 끝나도 당선자가 결정도 되지 않고 싸움만 한다. 여러가지 변명과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선거에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선거만 해도 클린턴도 고어도 상대방보다 받은 표가 많았는데 선거에 졌다. 나라는 코로나 문제나 중국과의 경쟁으로 급한 일이 하나둘이 아닌데 이렇게 느리고 부정확한 시스템으로 어떻게 문제에 대처하겠는가? 문제는 뛰어가고 날아가는데 해결책은 기어가는 것같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 파시즘적인 것이다. 파시즘은 나쁜 것이고 우리의 시스템, 우리의 가치는 올바른 것이므로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가치는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걸 바꿔보기 위한 자기 성찰은 필요가 없다고 하는 생각, 바로 이런 보수적 생각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행동은 다 거기서 거기다. 

 

물론 모든 보수적 사고가 악일 수는 없다. 다만 말이란 애매한 경계선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속도라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보다 너무 느려지면 보수적이라는 말과 파시즘적이라는 말은 구분이 어려워 진다. 시대는 앞으로 뛰어가는데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시대라면서 그 시대를 파괴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진핑이 집단주의적이나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하면 동의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 시진핑과 트럼프는 다른가? 트럼프는 진보적인가? 사실 바이든은 진보적인가하는 질문도 우리는 던질 수 있다. 진보냐 보수냐, 집단주의적이냐 개인주의이냐라는 말의 의미는 이 글의 문맥상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그냥 말을 붙이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한 개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말을 할 수도 있고 이 시대에는 집단주의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닌 제 3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을 한 후에 그것에 망속의 인간이란 이름을 따로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랜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선진국의 시민들은 보수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진보조차 이제는 관습적 진보가 되었고 낡은 진보가 되었다. 그래서 본래는 자기 성찰과 진보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 개인주의라는 사상조차 보수적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나는 개인주의자라고 말하는 파시스트를 가지게 된다. 자기들의 시스템을 당연시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자신의 집단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다른 사회의 시민들에게 너희는 집단주의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매우 모순적이다.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학자에게서 조언을 받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요즘은 그런 조언들조차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의 진보는 낡고 관습화된 진보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 진보는 그 자신의 나라도 구원하지 못한 진보다.

 

내가 망속의 인간이라고 부르는 개인은 마치 망의 그물매듭들 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집단으로 움직여야 힘을 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진보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한국과 다른 선진국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성장한 나라다. 그래서 한국인은 변화와 위기와 위협에 익숙하다. 한국의 10년전과 지금은 언제나 크게 달랐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은 계속 그렇게 바뀐다고 생각한다. 시대에 뒤쳐지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 진보적 지식인이나 사업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반인들이 그렇다. 역사와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을 그렇게 교육시킨 것이다. 옛날일도 아니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혁명이 불과 몇년전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르켜 한국사회의 역동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게 반드시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언제나 쫒기듯이 산다. 멈추면 세상이 한국을 삼켜버릴 거라는 근거있는 불안증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을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 말이 가지는 자명한 결론이 있다. 어느 나라의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냐는 것이다. 배부른 선진국의 시민들은 전쟁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 코로나 상황을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사람이 죽는다고 난리를 쳐도 엉덩이를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기민하게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을 보면 집단주의적이라고 비아냥거릴 뿐이다. 매일 몇천명이 죽는다는 뉴스를 봐도 저거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자체가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는 선진국의 보수화 문제는 단순히 코로나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퇴조를 의미한다. 그들은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허약하다. 우리는 이미 음악과 영화, 드라마 같은 문화 분야에서 이런 걸 느끼기 시작했다. 질을 떠나 그들은 전반적으로 너무 게으르다. BTS는 여러가지를 의미하지만 그 중 하나는 피와 땀과 눈물의 양은 결국 댓가를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서양가수의 것을 보면 가수 참 대충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식으로 재능만으로 경쟁이 될까? 한국 가수들 연습하는 걸 학대니 뭐니 말하면 춤이 좋아지고 노래가 좋아지나? 한때는 그들도 그들의 발레단 같은 곳의 엄청난 경쟁과 연습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과거의 시스템에 안주해 있는데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문제에서 선진국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트럼프는 이미 선진국의 보수화가 세계적 위기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계 보건위기를 앞장서서 해결해 나가는 선진국이 아니라 WHO나 세계 기후 협약을 탈퇴하고 WTO를 탈퇴하겠다고 위협하며 한국에게 미군주둔비를 단번에 5배 올리겠다고 요구하는 선진국이다. 이런 문제의 뿌리에는 미래를 만드는 변화를 가로 막으려는 보수적 인간들이 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백년이상전부터 존재해왔던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고 똑같은 노동을 해도 미국 청소부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청소부보다 훨씬 유복하게 사는 현실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서구인들 수준의 소비를 하려고 노력 할 때 어떻게 지금의 선진국 국민들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숫자들 그리고 한국과 서구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는 숫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뭔가를 억누르려고 한다. 시대를 따라가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모든 것은 자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모여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결국 싸움뿐이다. 그것은 이 국가와 저 국가의 싸움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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