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인공지능과 새 시대를 사는 법

by 격암(강국진) 2023. 2. 10.

23.2.29

나심 탈렙은 그의 책 블랙스완의 결론부분에서 불확실성이 가득하고 복잡한 현대에서 투자를 하는 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투자는 정답을 맞추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확률에 대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지식의 힘을 과신하고 있으며 매번 선택을 할 때마다 최대한 자세한 계산과 예측을 하려고 한다.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정확한 수학계산 결과를 뽑아내듯 논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예측은 지나치게 최적화할 때 오히려 더 나빠진다. 우리는 투자가 실패도 전략의 일부인 확률게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럴듯한 가설뿐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좋은 투자를 더 자주 시도해야 한다. 이같은 그의 조언은 요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도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투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서 의미를 가진다.

 

요즘은 chatGPT같은 새로운 거대 언어 처리 인공지능이 구글의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가지 중요한 측면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chatGPT를 만든 openAI가 대단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들만이 가진 신비한 기술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진작에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chatGPT같은 제품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이는 기술이상으로 우리가 원하는 인공지능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때문이다. 

 

chatGPT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지만 사실 터무니 없는 실수를 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영어에 비해서 한국어가 부정확하다고는 하지만 한국말로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그 결과가 엉망진창이다. 조선의 역대 왕의 이름을 물어봐도 그렇다. chatGPT는 자신있게 엉터리답을 준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chatGPT가 실망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프로그램은 분명 할 때는 또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3차방정식의 해도 잘 구하고 논문 파일을 올려놓고 그 논문에 대해 질문을 하면 답을 말해줄 수도 있다. 내가 읽지도 않은 책을 대신 읽게 하고 그 내용을 물어 볼 수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chatGPT는 수학문제도 풀고,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시나 에세이도 잘 쓰며 영어의 경우 변호사 시험이나 의사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뛰어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좋지는 않고 특정 과제를 시키면 더 잘하고 다른 과제는 잘 못한다. 

 

이게 문제였던 것이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다른 회사들은 오답을 내기도 하는 기계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든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주는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답률은 앞으로 줄어들테고 그러면 더 좋겠지만 지금의 오답률을 가지고도 사람들은 그걸 쓸모 있게 쓸 수가 있다.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그래서 chatGPT의 사용자수가 이미 1억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비슷한 다른 예를 들어보자.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바로 반자율운전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반자율운전 프로그램이 나오기 시작한 이래 많은 사람들은 계속 완벽한 자율운전은 언제 나오냐고 묻고 있다. 사람들은 자율운전의 레벨을 나누고,  진짜 자율운전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며 어쩌다가 자율운전 상태에 있는 전기차가 사고를 내면 대서특필을 하면서 자율운전은 매우 위험하고 절대 신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그 나름의 의도와 의미가 있지만 또한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많은 인간들보다 인공지능이 더 운전을 잘해도 인간이 사고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인공지능이 내는 사고는 단 하나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자율운전 프로그램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능동적 태도대신 수동적으로 그저 그 프로그램이 모든 걸 완벽히 잘하기를 바란다. 사실 지금의 반자율운전도 매우 대단하다. 그걸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전기차의 선두주자 회사인 테슬라 사용자 카페에 가보면 이 반자율운전을 사용해서 장거리를 운전하는 피로도가 10분의 1정도로 줄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으며 자신은 이제 옛날 차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 주행중에 복통으로 죽을 뻔 했는데 자율운전 프로그램덕분에 겨우 다음 휴계소까지 가서 정차하고 수술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반자율주행 프로그램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뛰어난 것은 나름대로 활용을 잘하면 실제로 굉장히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운전이 이미 완전히 새로운 레벨로 바뀌어졌다. 그런데도 '완벽한 프로그램', '사고가 전혀 나지 않는 프로그램' 따위를 계속 찾고 있으면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의 본질을 놓쳐버리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완벽을 정의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더 쉽게 받아들여질 거라는 것을 예고한다. 예를 들어 작곡이나 그림그리기나 글쓰기가 그렇다. 완벽한 음악이나 그림이나 글은 없다. 그러니까 이런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내놓은 결과가 전체적으로 괜찮은 레벨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그 수준에 놀라게 된다. 퀴즈는 정답과 오답이 있고, 운전에는 사고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명확한 구분이 있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얼마지나지 않아 이런 분야가 인공지능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된다고 해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소서따위는 앞으로 없어지거나 간략해지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멋지게 그걸 쓸 수 있는 시대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대면 인터뷰가 더 중요해질 것같다. 

 

하지만 chatGPT와 반자율운전 프로그램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오류와 정답을 명확히 말할 수 있는 분야에서도 그걸 감안하면서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답만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기보다는 오류를 내도 쓸모가 있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더 유용하다. 즉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업이다.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공지능에 맞추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학적 계산, 명확한 지식을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쌓아 올리는 학문적 과학적 태도는 점점 일반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알파고가 프로 바둑기사를 이겨도 우리는 그 프로그램이 어떤 논리적 판단을 하는지 잘 모른다. 인공지능이 유명한 물리학적 난제였던 단백질 접기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러한 해결은 '실질적으로' 해결한 것이지 전통적인 논리적 이해와는 다르다. 즉 인공지능은 주어진 유전자 서열을 보고 단백질의 구조를 높은 확률로 맞추는 것이지 오류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과학자들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답이 아니라 그럴듯한 가설을 제공해주는 것이 큰 쓸모가 있다. 왜 그것이 그럴듯한 가설이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것은 나심 탈렙이 말하는 투자의 원칙과도 통하는 것인데다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요령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모하게 아무 거나 시도하는게 바람직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가설을 그때 그때 만들어야 한다. 즉 성공할 확률이 높은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복잡하고 변화가 빠른 환경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떠난다고 해보자. 우리는 미리 여행지로 가는 법, 숙박정보, 관광정보, 맛집정보등 많을 것을 찾고 동선을 짜고 비용도 자세히 계획할지 모른다. 이러한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여행에서는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일을 결정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마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될 것처럼 자세히 계획을 짜면 계획을 자세히 짜면 짤수록 여행은 엉망이 되기 쉽다. 언제나 일은 예상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자세하게 계획을 짜면 그런 의외의 일이 더 치명적이 된다. 상황이 바뀌어서 계산이 틀려졌는데도 미리 해둔 계산대로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여행에서만의 일일까? 현대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점점 모든 것이 익숙한 집에서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사는 것보다는 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해지고 있지 않은가? 주택 매물을 구경하다보면 엄청나게 정성을 들인 집이 완공한지 불과 2년도 안되어 매물로 나온 경우를 쉽게 발견한다. 그 사람들은 마치 그 집에서 여생을 보낼 것처럼 공을 들였지만 살아보니 뭔가의 이유로 그 집에서 2년도 살지 못한 것이다. 

 

나심 탈렙도 인공지능도 그리고 여행하기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수학과 명확한 지식은 소중한 것이지만 비현실적으로 추상적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완벽은 현실 세상에 없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고 수영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계속 시대라는 파도를 타며 살아야 한다. 아무 계획도 계산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신발을 신발로 망치를 망치로만 보는 고정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러면 언제나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이때 현재의 상황을 초기의 계획에서 보았던 대로만 보지 말고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좋은 결과를 나오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변화를 가해야 한다. 우리는 완벽한 한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쓸만한 걸음을 걷고 그 다음 걸음을 계속 내딛어야 한다. 

 

어설픈 자율운전을 하는 전기차도 오답을 내는 chatGPT도 그걸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쓸만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아직 쓸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완벽하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믿음직한 그럴듯한 가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며 어떤 경우에는 어떤 인간도 발견하기 불가능한 가설을 찾아낸다. 바둑두기나 단백질 접기 문제에서 처럼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멋진 이야기를 위한 서두 일수도 있고 고칠 수 없이 점점 나빠져 가는 이야기의 끝부분일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이는 우리가 얼마나 궁리를 할 것인가, 얼마나 시도를 할 것인가에 달린 일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이 분야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성공할 확률은 꽤 높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제안을 통해서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