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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관용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23. 7. 6.

23.7.6

관용이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원칙같은게 있을 수 있을까? 정의와 관용은 종종 임의적으로 뒤섞여서는 부패한 사회를 만드는 것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이 봐주고 싶은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갑자기 무한히 선택적으로 정의감을 드높인다. 그런 사람들도 스스로를 관용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이건 그냥 부패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관용은 영어로 톨러런스고 프랑스어로는 똘레랑스다. 한때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목소리 드높이던 사람이 한국에 있었는데 물론 그 사람이 선의로 그랬을거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지만 요즘의 프랑스 뉴스를 보면 그건 그냥 남의 사회의 좋은 점만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는 일단 식민지를 가졌던 역사가 있는 나라다. 지금의 선진국은 한국 정도를 선진국이라고 치면 예외로 칠까 전부 제국주의의 역사속에서 부를 쌓아올린 과거가 있다. 그런 선진국을 보면서 관용을 배우자고 하는 것은 좀 모순적이지 않을까? 영화 기생충에 보면 부자는 좋은 사람 되기 쉽다는 대사가 있다.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부자 나라가 되어서 우아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아 저사람들은 참 우아해 우리도 저래야 하는데 라고 하는건 모순이 아닐까. 눈을 감고 일부만 보면 일본 사람들도 착하고 우아하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기에 일본의 관용과 정직함을 배우자 같은 말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프랑스나 일본을 꼭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정의다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건 뭔가를 당연시 하는 자신감이 너무 강한 것일 수 있으며 실제로 오랜간 선진국으로 살아온 나라들은 그런 거만함이 있다. 그건 아카데미 영화제가 세계인의 영화제고, 미국인의 야구 리그가 월드 베이스볼 이라는 식의 오만이다. 자신들의 관점과 전통 속에서 종교와 인종 문제를 접근해서는 이게 정의고 나는 정의롭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지만 그걸 너무 확신하는 오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지금 프랑스는 비상사태 운운할 정도로 인종차별 문제로 나라가 시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문제는 바로 그 오만함의 결과가 아닐까. 부패하면서 나는 관용적이라고 말하고, 오만하면서 나는 관용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관용은 뭐가 당연한가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이 당연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가지 예는 종교다. 공화국의 질서를 세울 때 가장 먼저 등장한 문제중의 하나가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선진국중에 종교국가는 없다. 다들 법치를 말하고 종교의 자유를 말한다. 그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세상에 무한히 당연한 것은 없다.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는 오늘날 무신론자는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에게 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인데 무신론자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란 망상이다라고 말하면 그건 종교탄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양보는 누군가에 대한 억압이 되는 것이다. 이때문에 일본에는 뭐든지 맘대로 하라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그 종교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만들어졌다. 자기 맘대로 하면서 이건 종교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 결근하는 것에 이유를 대고 싶으면 누군가는 종교적 이유로 오늘은 결근해야 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훨씬 더 관대한 처분을 받고 그게 이유인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종교적인 이유라고 하면 이유를 더 따지지 않는다. 교리의 합리성을 따지는 것은 종교의 자유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재산을 혈연이 있는 자식이 물려 받는 것은 오늘날 대개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 당연함속에서도 여자나 장자에 대한 대우에 있어서 차별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지만 사람들은 서로 의견이 다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수렵채집인 사회가 어떤지는 살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거기서는 사유재산 개념이 없으므로 우리집이 부자이니 내 자식도 부자라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작은 사회는 사회적 융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독점을 주장하면 아마도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할지 모른다. 지금도 같은 이유로 복지정책이 있는 것이다. 복지정책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적선이 아니다. 그게 사회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고 오히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니까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나는 부자 부모의 자식이므로 부모 재산은 당연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은 다시 돌아볼 수도 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나는 모든 재산을 공유하자는 주장을 하는게 아니다. 지금의 재산 소유나 상속에 관한 법을 바꾸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당연하기는 뭐가 당연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합의된 규칙, 존재하는 시스템에 대한 존중을 해야 한다. 상식이 뭔지를 정의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관행과 상식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다. 다만 그것만 가지고는 한참 부족하다. 나는 모든 시스템이나 상식을 부정하고 도덕 상대주의로 빠져서 세상에 정의란 있을 수 없고 모두 각자의 정의를 주장할 뿐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양자택일은 실수다. 모든 인간들은 서로 어느 정도 다르게 생겼다.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인간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고 인간과 인간의 차이나 인간과 지렁이의 차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인간이니 모든 인간은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도 어리석다.

 

이걸 전제하고 말한다면 관용의 기본은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회의론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것 저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게 공평하니 저게 정의가 아니니하고 말하지만 그건 다 어느 정도 실수다. 우리는 우리가 뭘 당연시 여기는지를 다 알지도 못한다. 당연한 건 보이지 않게 되는 성향이 있다. 그래놓고 이런 저런 판단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므로 이런 걸 다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더 이런 일을 피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를 묻지 않고 섯불리 이게 옳다 저게 옳다면서 남에게 자신의 판단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관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관용인가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자신이 타인의 관용의 덕을 봤다는 생각이 없다. 자기가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관용적 시스템이란 말이 있다. 이 말도 모순적이다. 시스템이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관용이란 우리의 무지를 전제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미 그에 대한 시스템이 있을 수 있을까? 규칙은 인간이 만들고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관용적인 인간이 관용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는 있지만 뭔가가 규칙이 되고 시스템이 되는 순간 그것은 금방 관용과는 다른 것이 된다. 그냥 이름만 관용으로 남는다. 엄격히 말하자면 한세기 전의 관용이나 5백년전의 관용이 지금의 관용이 될 수 없듯이 시스템이 관용스러울 수는 없다. 

 

선진국의 관용이 한계를 가지는 것은 그들의 오만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오랜동안 옳았다. 그러니까 자신이 틀릴 수도 있고, 자신의 시스템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 약하다. 사람들의 관용이 한계를 가지는 것은 게으름때문이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분명 소모적인 일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걱정할 일, 해결할 일이 있다. 돈도 벌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게 왜 당연하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뒤로 밀려나게 되기 쉽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많은 일을 당연시 하게 된다. 자신이 이만하면 관용적인 인간이라는 생각도 당연하게 된다. 

 

이때 관용은 파산하게 된다. 회의론은 합리적인 태도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사회가 관용적인 사회이며 가장 바보스러운 인간이 확신을 가지고 관용을 가장 많이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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