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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위대함이 실종된 시대

by 격암(강국진) 2023. 8. 16.

23.8.16

사려깊음이나 조심스러움은 물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모범이 되거나 어떤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요즘 낡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이상을 제시하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 자체가 포기되고 비웃음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변화하지 않고 썩어가는 그래서 결국은 짐승처럼 변해가는 사람들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살아보면 인생에 제자리란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의식은 흐릿해 진다. 그저 매일 매일 하던 일을 반복하면서 점차로 왜 그걸 하고 있는지를 잊어가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 보면 도대체 지난 몇년간 혹은 몇십년간 내가 뭘 했던건가 하는 생각이 들거나 그도 떠올리지 못한 채 짐승이나 돌멩이처럼 살아가게 될 뿐이다. 

 

비전이나 혁명은 희망이다. 언제나 세상에는 문제가 있고 미래에도 있을테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문제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향한 비전이 있고 혁신과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고 여유있는 얼굴로 순진하게 아직도 그런 걸 믿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의 절망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나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너는 아직도 세상의 어려움을 제대로 겪어 본적이 없구나. 나처럼 세상을 제대로 겪어 보면 너도 천박하고 추악하고 무의미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의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절망과 좌절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희망을 가지는 이유가 나는 더 뛰어나다는 믿음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으니 애초에 살 필요가 없다는 노인의 말도 진실은 아니다. 절망이 삶을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할 때 21세기의 한국은 부유함이 넘쳐흐르는 곳이지만 동시에 훨씬 더 절망적인 곳이기도 하다. 비전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몰두하는가. 기성세대는 자기 몸을 지키는데 열중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취업에 열중한다. 취업한 젊은이들은 소비에 열중한다. 그 모든 것들은 물론 나쁜 것이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해보고 싶은 것때문에 책을 읽고, 학문에 열중하던 20세기에 비하면 어딘지 모르게 사방에 절망이 넘쳐난다. 그것은 세상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을 것이며 그저 나는 내 삶을 살아야 겠다는 절망이다. 이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다. 누구나 외부와 자신과의 싸움속에서 산다. 세상을 내가 다 내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수동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상에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들은 우리를 망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다 사실이지만 특히 쌓아놓은 것도 없는 젋은이들이 벌써 그렇다는 것은 절망의 징조다. 그들은 20살이 되기전에 죽기 직전의 노인이 되고 있다. 

 

지금의 한국을 둘러 보았을 때 일이 이렇게 되는 것에는 재벌구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재벌 가문에 끈이라도 있어야 창업해서 내 꿈을 펼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공무원이 되거나 샐러리맨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내몬다. 이미 세상은 정부의 시대보다는 기업의 시대다. 새로운 시대의 비전은 정부이상으로 기업에 의해서 이뤄질 것이다. 사람들의 절망은 이제는 한국도 한국의 일론 머스크가 나오고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나와야 할 시대인데 그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 부자들의 대부분이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한국 부자의 대부분은 재벌가문의 후계자라는 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건 꼭 대성공하는 한 명의 기업가 때문이 아니다. 기업가로서 성공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의 처우도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새로운 서비스, 새로운 발명이 우리의 인생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도 확 바꿔줄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공부잘하는 사람 뽑아다가 연구소에 집어넣고 대기업에 집어넣으면 그 사람들이 한국을 구할 것이다라는 식의 낡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여전히 어떤 거대한 틀은 저 뒤에 있는 권력자들이 짜고 그들 이외의 사람들은 그저 일벌레처럼 평생 일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죽으면 된다는 생각이 반복되고 있다. 이렇게 낡고 좁은 박스가 성장하는 정신들을 억누르니 절망이 깊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위대해 진다는 것이 반드시 학자가 되거나 운동선수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아니며 성공한 기업가가 된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풀면서 산다. 그 문제를 계속 풀어나가는 것이 자신의 위대함으로 달려가는 일이다. 사람은 노후자금을 마련해서 30년 50년 먹을 사료를 마련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그 사료를 먹으며 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고, 집주인이 되는 것인 시대는 정말 행복을 우리에게 줄까? 10억이나 20억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행복이 시작될 것같지만 그런 사람 대부분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는게 지옥같아진다. 그런데 부유한 한국은 사실 그런 인생만이 진지한 인생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을 틀에 집어넣고 쥐어 짠다. 자본에 침식된 언론사들은 자기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양산하고, 자본에 침식된 학교는 충실한 로보트들을 양산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을 자부할 정도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현대나 삼성같은 회사들은 이제 누군가를 쫒아가는게 아니라 자신이 월드 베스트가 되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시민들은 한국은 그저 작은 나라이니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절망은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이건 마치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나는 아직 아이이니 어른의 삶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건 길바닥에 버려진 아이가 하는 생각이니 절망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구조건은 높고 꿈은 소박하기만 하다. 

 

하지만 절망은 희망의 징조이기는 하다. 우리는 절망한 끝에 절망이 지겨워서라도 일어선다. 한동안 멈춰서 있었다면 이제는 다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이다. 위대함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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