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24
나이가 든 중장년세대나 노인 세대가 종종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같은 나이일 때 기준으로 보면 요즘의 청년세대는 과거의 세대에 비하면 더 어린애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할 나이가 된 30대의 대화를 들어도 그것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대화인지 성인의 대화인지가 구분이 안간다고 한다. 이같은 추세는 사실 지금의 중년이나 노인들이 청년이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김구 선생이나 유관순 열사 세대같은 100년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중장년도 같은 나이였을 때 그 위의 세대보다 더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는 특정세대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글의 진짜 질문이 나온다. 어른스럽다는게 뭘까? 뭘 가지고 우리는 어른이라고 하고, 그런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어른스럽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정신에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들이 있다. 그것은 넓이와 일관성이다. 이것들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우리가 어른스럽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떤 특성을 가진 것인가를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꽤 다르다.
넓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넓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집안이라는 세상을 세상 전부로 여기고 사는지 아니면 서울이나 부산이라는 하나의 지역을 세상이라고 여기는지, 그도 아니면 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여기는지가 바로 이 넓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 넓이는 이런 공간적 크기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크기로도 따질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을 학교성적으로만 평가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보다 더 보편적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을 지금의 자신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던가 종교인같은 어떤 역사적 문맥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것도 이런 정신적 넓이에 기여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른 크기를 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일관성이란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그 세상을 얼마나 일관되고 간결하게 정신적으로 파악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정신적 세계의 크기가 크거나 작다는 것과 그 세상을 얼마나 자세히 관찰하고 이해했는가는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교도소의 삶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교도소라는 공간에 속박되어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정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는 뛰어난 면이 있을 수 있다. 즉 그는 교도소라는 공간안에서는 삶에 대한 전문가이며 비교적 평온하게 자신감있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의 정신은 일관성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그런 속박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그 정신적 넓이가 더 크다고 할지라도 바로 그 넓이때문에 사는 일에 서툴 수 있다. 때문에 그에게는 매일 매일이 예측 불가능한 일로 가득 찬 날들로 여겨질 것이다. 즉 정신적 넓이는 더 큰데 일관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보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관된 사상이나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 사람은 마치 전혀 경험이 없는 장소에 갑자기 던져진 사람처럼 자신감이 없고 공포에 떨면서 산다. 그리고 자기 주장이 없으며 세상일의 가치판단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가 누군가가 어른스럽다라고 말할 때 이는 대부분 정신적 넓이보다는 정신적 일관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보는 세상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세상일에 대한 가치판단도 확실하게 내린다. 판단이 빠르고 행동이 빠르다. 그런 사람은 자신감과 의지의 강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남의 말이나 타인과의 비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자신이 잘 아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정신적 넓이는 쉽사리 들어나지 않는다. 목수가 목수일을 하는 동안에는 목수로서 유능하면 유능해 보일 뿐이다. 그가 목수라는 세계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는 그가 목수의 세계라는 자신의 세계속을 사는 동안에는 잘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갑작스런 변화를 겪거나 위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좁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은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는 매우 급격히 무능해진다. 달변으로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우 유능한 셀러리맨이었던 사람이 퇴직후 갑자기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직장을 곧 세계로 파악하면서 사는 좁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도 직장 안에서는 매우 성숙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으로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퇴직하면 사람이 이렇게 무능하고 바보일 수가 있나 싶게 행동한다. 그에게 직장 바깥의 삶이란 마치 지구에 금방 도착한 화성인의 삶이나 마찬가지로 낯선 것이기 때문이고 평상시에 아무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바깥으로 나온 물고기다.
이 넓이와 일관성이라는 특징을 통해 세상을 보면 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점점 더 어린애처럼 행동하게 되었는가가 설명될 수 있다. 정보적 측면에서 세상은 점점 더 크고 복잡해져왔다. 백년전에는 하나의 지역을 온 세상으로 알고, 별로 넓지 않은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고 살아도 즉 좁디 좁은 정신적 세계속에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 좁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금방 그 세계에 익숙해 진다. 즉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 확고한 견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태도에는 여유가 생기고 어린 나이에 확고한 신념같은 것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원하지 않게 크고 복잡한 세상으로 던져진 그들의 후손들은 그게 쉽지가 않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에 비하면 지식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들은 더 다양한 세상을 둘러보면서 살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들은 마치 너무 일찍 어른의 세계에 던져진 어린애처럼 살아간다. 사실 이것은 말 그대로의 현실이다. 따라서 불안감은 커지고 정신적인 일관성은 줄어든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공부를 바탕으로 남의 의견을 외워서 말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자기 의견은 없다. 왜냐면 그러기에는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얼마 없고 그렇게 크고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일관된 사상을 가지기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어딘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 학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 우리는 두려움에 언행을 조심하게 되고,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자신의 개인적 공간안에 틀어박히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 새로운 환경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기 전에는 말이다. 이런 태도를 우리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일관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세계속으로 파고드는 태도를 우리는 당연시 여기게 된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종종 말하는 어른스럽다는 태도는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어른들이 자신감없는 청년들에게 왜 이렇게 너는 자신감이 없느냐라던가 어른스럽지 못하냐는 말을 할 때 그 어른들은 두가지를 확인해 봐야 한다. 첫째로 자신은 그 나이에는 달랐는가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어른스러워 진다'. 그 이유는 경험이 쌓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른의 세계의 정신적 넓이는 종종 젊었을 때에 비하면 오히려 축소되기 때문이다. 어른들보고 중학교에 가서 열몇개씩 되는 수업을 다시 들으라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그들이 어른이 되어 살게된 좁은 세상에서 같은 일상을 오랜동안 반복한 나머지 생긴 자신의 자신감을 자신의 성장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착각에 빠지기조차 한다. 그러나 제대로 뒤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라하고 시시하고 불안하게 살았다. 그게 정상이다. 젊었을 때는 계속 새로운 것을 만나고, 세상이 커지는 속도가 세상을 배우는 속도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도 다르다. 어른들이 그 시절의 나는 달랐다는 말이 사실이라도 그건 사람이 다른게 아니라 환경이 달라서 일 수 있다. 이미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요즘 청소년들은 그래서 더 불안하다. 아직 첫번째 데이트도 못해보았는데 결혼생활에 대해 듣고 육아에 대해서 들어버린 꼴이랄까. 유치원생도 간호원보다는 의사가 수입이 더 높다던가, 공무원이 직업안정성이 크다던가 하는 말을 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어른들이 크던 시절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지금의 어른들이 만들었다. 어린애들을 하루라도 빨리 어른의 세상으로 끌어내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이 어른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선행학습으로 선행학습으로 이끌지 않았던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대학입시나 취업에 대해 떠들었던 것이 어른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스스로를 어른스럽다고 여기지 않던가. 이런걸 생각해 봐도 어른스럽다는 건 알고보면 별거 아니다. 대부분 거의 허세에 가깝다. 손톱만한 세상에 살면서 자신감에 넘쳐나는 사람들의 태도랄까. 그들의 어른스러움은 알고 보면 스스로의 성장을 막는 자만일 수도 있다.
이런 문맥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어른스러움이란 정신적 넓이와 일관성에서 모두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진정한 전인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확고한 도착지가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즉 궁극의 넓이에 도달해서 궁극의 이론에 도달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득도하여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인간은 결국 유한할 수 밖에 없다. 2층 위에는 3층이 있다.
우리는 어른스러운 사람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에서 세상을 보는 확고한 가치관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것도 그의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반드시 정돈되어 있지 않고, 불안하며, 방황하는 것같은 아웃사이더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방황자가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은 아니겠지만 방황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익숙한 세계에서 자신감있는 어른스러움을 가지고 사는 삶을 버리고 더 넓은 세상을 찾고자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을 보수적인 사람들이 깔보는 것은 바보같은 행동이다. 특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좁쌀같은 세상에서 사는지도 모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감에 넘치는 경우에는 특히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는 자기가 사는 세상을 보고 고민하는 것에 게을러서 정신적 일관성이 없이 어린애처럼 구는 사람이 안심해도 된다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단순히 겉에 들어난 것으로 사람을 비교하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근엄하고 뭔가 대단해 보이는 어른이 실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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