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명백한 글쓰기와 장자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23. 7. 7.

23.7.7

이제껏 글을 쓰면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글을 명백하게 쓰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어떤 스타일의 글쓰기가 더 좋은지에 대해 조언을 받은 적도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내 글쓰기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성찰을 통해 더 큰 정신적 세계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장자의 문제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자를 읽어보면 기본적 문제의식이 이것이라는 점이 분명히 들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자에는 도를 이야기하거나 작은 세계에서 큰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언어로 다 전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이야기들은 얼핏 들으면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들리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궁극의 도를 정의한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있는 단계보다 더 넓은 정신의 세계를 꿈꾸고 그리로 비약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비약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궁극의 단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바보처럼 있다가 어느날 도를 깨우쳐 더이상 배울 것도 고민할 것도 없는 사람이 된다는 식의 득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장자의 진정한 가르침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은 세계에서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행위는 보통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불연속적인 면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의 생각의 단계에서 논리적으로 차분히 전개해서 얻어지는 것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말이든 남의 말이든 과거의 말들을 늘어놓고 그것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면 결국 우리는 당연한 지금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관점이나 생각에 대해서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영감이다.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느낌을 주는 그 한생각을 잡고 붙들어서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도있지만 그렇게 해서 어딘가에 도달하면 때로 우리는 과거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과정은 논리적이지만 않고 따라서 때로는 비약으로 보이거나 문학적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즉 논설문이나 수필같았는데 시나 소설이 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념적인 혼란을 느끼게 되는 일이 당연히 많다. 사실 개념들에 대해서 의혹을 품는 것이 장자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글쓰기에 있어서는 핵심적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참고서의 요약같은 글쓰기를 좋아하고 익숙해 한다. 그런 글쓰기도 필요한 것이다. 이 그런 글쓰기는 대개 이런 저런 예들을 나열하고 특히 권위있는 과거의 주장들을 언급하면서 귀납적으로 이런 저런 결론이 옳다고 하는 형식을 띄거나 어떤 것의 정확한 정의를 쓰고 그에 따르면 이건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는 연역적인 형식을 띈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이런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글쓰기가 모두 무한히 옳다고 믿는 것도 문제다.

 

귀납적 글쓰기의 문제는 선택적으로 자료를 고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다수결투표처럼 된다는 것이다. 선택적으로 자료를 골라 나열하고 귀납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사기이고 어제도 비오고, 오늘도 비가 왔으므로 내일도 비가 올것이다라는 주장은 자연스럽지만 지루한 것이며 옳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는 주식시장에서 그래프보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귀납의 실패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연역적 글쓰기의 문제는 처음에 어떤 본질이나 정의를 못박아놓고 생각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연역은 귀납보다도 더 명쾌하게 들리지만 뭔가의 본질이나 의미가 그렇게 단언될 수 있다면 그 뭔가는 시시한 것이다. 국가는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국가의 정의를 말하고 따라서 국가는 이러저러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하는 글을 언뜻 보면 명쾌하고 논리적이지만 애초에 이게 국가다라는 문장처럼 무식하고 용감한게 없다. 국가가 뭔가? 우리는 2-3천년전의 인간집단도 국가라고 부르고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도 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이 두개 집단이 모두 같은 것으로 묶여질 수 있는 것일까? 개념이란 적어도 대부분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임시적으로 만들어져 사용되는 것이지 수학에서처럼 무한히 옳은 것으로 선언될 수 없는 거 아닐까.

 

그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국가의 정의가 아니다. 다만 그런 목적을 위해 국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우리는 뭔가가 이와 반대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국가의 정확한 정의를 가지고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처음 시작할 때와 글을 끝마칠 때 국가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즉 글을 쓰기 전에는 국가란 막연히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마칠 무렵에는 국가란 따라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보다 또렷하게 그러나 처음과는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개념의 변화야 말로 장자적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 목적이 된다. 뭔가를 깨닿고, 성장하기 위해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영웅담이나 성장소설과 비슷하다. 어딘가 있는 누군가가 모험을 떠나서 고생을 하고 결국에는 위대함에 도달한다던가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 영웅담이나 성장소설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논리적 글쓰기 운운하면서 그걸 요약하고 논리적으로 다시 쓰라고 하면 그런 글의 핵심적인 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장자적 글쓰기의 전부는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은 결론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고 태도다. 어떻게 아이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 과정은 하나 하나가 모두 다른 모험이고, 모든 어른이 같지도 않으며 특히 중요한 것은 아이가 꼭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궁극의 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세계에서 큰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 아이의 상태 혹은 작은 세계의 상태에서 우리는 뭔가가 불편하고, 그 세계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이상함을 파고들고 따지다가 어느새 우리는 더 큰 세계를 보고, 아이와는 다른 것을 원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런 어른이 되려는 노력을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어른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결론을 내려두고 왜냐면 하고 설명을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걸 성공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목적도 동기도 아이에게는 불분명하다. 이미 그런 어른이 된 사람에게나 명백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이 꼭 성공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당연한게 아니고 이 세상에는 아이와 어른이라는 두단계만 있는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깨어난 사람도 더 큰 경지의 사람이 보면 달팽이 뿔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할 때 뭐하러 우리는 성장하는가? 그냥 무한한 보편으로 성장해서 추상적인 생각을 하고 살면 행복해지는가?

 

안그래도 세상에는 유치원생을 억지로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삶을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두고 그리로 달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란 이런것이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하는 글은 말하자면 그런 글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하니 유치원생인 너는 지금부터 밤새도록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어른에게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적부터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인지, 돈의 의미가 뭔지가 애매하다.

 

아이인 것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지금의 나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다만 문뜩 문뜩 떠오르는 이게 아닌데라는 문제의식, 그런 걸 느끼는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 감수성을 잃으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하고 퇴보한다. 이건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수성을 가지면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적절한 것을 느끼고 이제 이 단계를 떠나야 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다.

 

귀납적인 글쓰기건 연역적인 글쓰기건 보통 세상에서 명확한 글쓰기라고 칭찬받는 글들은 이런 성장을 돕고 추구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건 그냥 지금의 패러다임안에서 지식을 정리해 주는 참고서 요약같은 글쓰기 이며 종종 그걸 읽는 사람들을 선입견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더욱 가둬둔다.

 

장자적인 글쓰기의 즐거움은 결론보다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라는 메세지에 있다. 어떤 어린아이가 이런 저런 모험을 겪어서 어른이 되는 성장소설을 읽을 때 그걸 내가 그대로 반복해야 할 메뉴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성장 소설의 보편성이 그런 교훈을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모두의 입장이란 사실 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특수하다. 따라서 성장소설이나 남의 글을 메뉴얼로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이란 성장하려는 노력의 감동스러움이나 성장의 즐거움이다. 나도 성장을 위한 감수성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각자의 성장모험을 떠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성장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일은 이래서 어렵고 한계가 있다. 누군가가 내가 쓴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하는 답글을 달면 나는 대개 기쁘다고 답을 쓴다. 말하자면 내 일상에서 일어난 작은 모험을 누군가가 공감하고 이해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한 사람에게는 그 글이 불명확한 곳이 별로 없는 깔끔한 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금방 길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출발점에서부터 뒤로 쳐진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종종 앞에서 말한 깔끔한 글쓰기의 기준에 따라서 글을 다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뭔가가 맞지 않아도 많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닿고 문제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래서 결론이 뭐냐거나 예를 더 많이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글쓰기와 장자적 글쓰기의 명확한 구분도 어렵다. 글쓰기는 이렇게 어려우니 아무리 써도 쉬워지지가 않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