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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인공지능은 무엇과 비교되어야 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23. 8. 9.

23.8.9.

우리는 모든 것을 비교를 통해 파악한다. 외국을 모르는데 한국을 알 수 없고, 짐승을 모르는데 인간을 알 수 없으며, 뜨거운 것을 모르는 데 차가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뭔가를 파악하려고 할 때 그것과 비교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뭔가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비교상대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남자의 반대를 여자로 생각할 때와 남자의 반대를 고릴라로 파악할 때 그리고 남자의 반대를 생명이 없는 바위로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남자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무엇인가를 물을 때 우리는 마음속에 뭘 가지고 있는가? 인공지능은 이런 걸하고 저런 걸 한다던가, 인공지능의 역사가 이러저러하다던가, 인공지능을 만들 때 쓰는 학습 알고리즘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던가 할 때 우리는 인공지능과 대비해서 뭘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낯설다. 왜냐면 거의 질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인공지능에 대한 책이 아주 많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인공지능을 이것과 비교하고 있다고 명백히 하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마음 속에 가진 인공지능의 경쟁자들이 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거나 다른 기계다. 즉 인공지능은 인간과 비교되거나 다른 기계와 비교된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에 대한 책들에 나오는 설명의 앞에는 (인간은 이런 걸 하지만) 이라던가 (다른 기계는 이런 걸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같은 문장들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당연한 것, 유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비교해야 할 상대는 인간도 아니고 다른 기계도 아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여러가지 기능을 가진 토스터기 같은 것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이 어떤 기능이 있냐라고 묻듯이 인공지능에 대해서 물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공지능이란 매우 유연하며, 굉장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서 묻자면 우선 그걸 하나의 기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 해결을 위한 패러다임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즉 인공지능을 써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자면 이러저러하게 접근한다라고 하는 접근법이다. 과학적 문제 해결의 접근법이 과학법칙이나 과학이론을 낳듯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구체적으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낳는다. 그걸 자연어 처리를 하는데 쓰면 자연어 처리를 하는 AI 프로그램이 나오는 것이고, 자율주행 문제를 푸는데 쓰면 자율주행 AI가 나오는 것이다. 

 

인공지능 AI들을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통해 파악할 때 우리가 인공지능이란 말을 하면서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 것은 응당 다른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이다. 그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문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이라던가 종교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과도 비교할 수 있다. 즉 이런 비교에서 인공지능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여러가지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 중에서 특별한 성격을 가진 패러다임으로 파악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은 대개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대개 자신이 과학적 패러다임을 써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합리적인 방식내지 상식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것이 과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사회속에서 그 사람이 끝임없이 배워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특정한 도구를 쓰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해결의 패러다임들은 무의식에서 의식위로 끌어올려질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억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17세기 서양에서 과학혁명이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르노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을 당했고, 갈릴레오도 종교재판을 받았다. 왜 그런가? 그때 당시의 종교적 패러다임들을 마음속에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은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그냥 불합리한 사고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적 패러다임이 설사 설득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고려할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이지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사고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패러다임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억압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걸 보게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무의식에서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그것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의식화를 위해서는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해야 한다. 즉 세상에는 어떤 패러다임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어떤 차이와 공통점을 가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해 가장 좋은 예는 문자 패러다임일 것이다. 문자 패러다임이란 인공지능 패러다임과 같이 문자를 써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을 말한다. 문자 패러다임은 과학 패러다임, 인공지능 패러다임, 종교 패러다임, 인문학 패러다임등 여러가지 패러다임을 이해하는데 그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으므로 먼저 그걸 정리해 보자. 문자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문자 패러다임에서 작은 지식들과 정보들, 혹은 이전에는 인간이 다 기억할 수 없었던 긴 체험들은 문자를 통해 기록되고, 변형되고, 합쳐질 수 있다. 일단 정보를 문자로 기록하면 우리는 인간의 기억력을 초과하는 정보를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합치고 변형하기 쉽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작은 지식들로 부터 더 거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문자 패러다임의 목표물은 지식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 지식이다.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레시피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지식이며 우리는 그걸 통해서 빵을 만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성서를 가진 종교 패러다임과 과학 패러다임은 이러한 문자 패러다임의 특별한 경우다. 종교 패러다임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성서다. 종교에서는 신이 인간을 통해서, 영감을 가진 인간을 통해서 진리를 이미 보내 주었으며 그것이 성서에 기록되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이 성서에 기록되어져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인문학 패러다임과 비슷하다. 인문학이나 철학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영감을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작품들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과학 패러다임은 이와는 달리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연법칙이나 과학이론이라고 불리는 아주 정확한 지식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정확한 과학지식은 그 정확성때문에 종교나 인문학과는 다르고 무엇보다 반증가능성을 지닌다. 즉 과학이론은 정확한 예측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한 데이터를 통해 부정할수 있다. 이렇게 부정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우리는 과학적 지식 아니면 그냥 과학이라고 부른다. 과학 패러다임은 이때문에 정확하게 측정된 데이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인문학적 지식과는 달리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과학만 있다. 두 개의 과학이 서로 다르면 그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이 과학적 지식 혹은 자연법칙 혹은 과학 이론들이다. 

 

이렇게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의 예들을 나열하고 난 후 우리는 비로소 인공지능을 이런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 속에서 문화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인문학적 지식도 아니고 과학적 지식도 아닌 제 3의 지식이다. 그것도 다른 패러다임처럼 많은 데이터들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제 3의 지식은 컴퓨터의 최적화를 거쳐서 만들어 지고 인공지능 모델 내부의 많은 변수들의 값으로 저장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세계 바둑 챔피언인 이세돌을 바둑으로 이기는 AI 프로그램 알파고를 만든 사람도 어떻게 이세돌을 바둑으로 이기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제 3의 지식을 이용해서 그걸 해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감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지식인 인문학적 지식이나 반증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지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과 이 제 3의 지식은 다르다. 그때문에 이것은 제 3의 지식이라고 불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들 즉 지능 패러다임들에 대한 기초적 소개가 된다. 이것이 지능 패러다임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지능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며 이 능력은 바로 이 지능 패러다임들과 그 결과물들을 습득함으로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다른게 아닌 지능 패러다임들에 대한 습득과정이며 이때문에 패러다임적 관점을 가지지 못할 때 교육은 실패하게 되기 쉽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실행되며 다른 패러다임을 억압하고, 지식 패러다임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기관은 그 패러다임의 특징을 너무나 깊게 반영하기 때문에 패러다임 변화를 이겨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세계를 보면 종교 시설은 한 때 교육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과학 패러다임이 세계의 중심에서자 종교 시설은 더이상 그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근대적 학교에 그 위치를 넘겨주어야 했다. 이는 과학 지식은 종교적 지식과 그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성과 논리성을 갖춘 과학 지식은 지식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여러가지 과목을 전공 선생이나 교수가 가르치는 학교다. 그러나 진리인 지식의 근원을 성스런 인간의 영감이나 그걸 기록한 성서로 여기는 종교시설들은 이런 전문화를 할 수 없다. 그것은 종교시설이 신앙심을 버린다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 이유로 오늘날의 학교들은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가르칠 수 없는데 그것은 그 학교들이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학교의 기반을 이루는 믿음을 포기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면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결과물인 제 3의 지식은 전문화된 지식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분석되는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강력한 문제의식과 많은 데이터 그리고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며 해결하면서도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만약 인공지능 AI가 국가 예산을 짠다면 그것은 아주 훌룡한 국가 예산을 짜더라도 왜 그것이 훌룡한 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교는 과학적 지식 나아가 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지식의 총합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계속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백지로 태어나고 지난 수천년간 유전자적으로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처음부터 학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의 논리적 시스템이 점점 거대해지면 인간은 계속 더 많이 더 오래 배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고도 그 결과는 점점 실망스러워지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백년전의 고등학생보다 지금의 고등학생이 결코 더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은 순서대로 배워야 한다. 세상이 백년전보다 엄청 발달했으니까 백년전에는 고등학교때 미적분을 배웠는데 지금은 유치원에서 미적분을 배우는게 아니다. 이 덕분에 백년전에는 중학교만 졸업했어도 지식인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학을 졸업해도 쓸모가 없다. 세상은 마치 마천루처럼 높은 지식의 산을 쌓아올렷다. 대학교수는 기본적으로 논문을 많이 쓰면 하는 것이다. 즉 더 세분화된 분야에서 하나의 지식이라도 더 많이 생산하면 이 지식 패러다임에서 우수한 자로 여겨진다. 

 

이는 인공지능 혹은 지식 패러다임들에 관련된 비교문화적 분석을 아주 조금 시도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과들에서도 이미 기존의 많은 인공지능 담론들과는 다른 전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인공지능 소개서들은 사실 대부분 그저 공포나 장미빛 전망만을 생산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 패러다임의 관점은 인공지능의 발달을 지능의 발달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고, 과거에 있었던 지능의 급성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즉 비교대상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어떻게 다를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관점을 나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나 억측만을 보게 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도움될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은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규제하자고 한다. 그런데 기술중에 위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 자동차도 위험하고, 심지어 불도 위험하다. 그정도의 구체성을 가지지 못한 지적은 그냥 너무 빨라서 적응이 안되니까 발달을 멈추자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각의 패러다임들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의식화하는 과정이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설 것이다. 그러니까 알아들은 사람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 못알아들은 사람에게는 전혀 납득이 안된다. 그러나 진짜 인공지능 시대가 오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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