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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 4 : 대안적 삶

by 격암(강국진) 2024. 1. 22.

4. 대안적 삶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기계적인 문명에 대한 비판에 익숙하다. 경쟁이나 책임이 만들어 내는 높은 노동량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단순반복적인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피로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빨리 변하고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대학생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몇년간의 시간동안에도 세상은 변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20년에 가까운 교육을 거치고 직장을 구한다고 해도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취업도 점점 힘들어 진다. 더 거대하고 복잡해진 시스템의 부속품이 된 사람들은 더 강한 압박을 받기 때문에 많은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경우에도 정신적 육체적 피로의 누적이 엄청나서 같은 직장에서 일을 오래하기도 힘들다. 많은 직업들은 끝없이 단조롭게 이어지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오랜간 견디기는 어려운 강도의 집중을 요구하거나 그 둘 다를 모두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삶에서 떠나려는 이제까지의 시도는 대개 짧은 일탈로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진정한 대안적 삶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둘러싼 환경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이 많은 부자가 숲으로 가서 잠시 캠핑하듯 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대안적 삶은 아니며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뤄서 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대안적 삶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현대인의 삶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진정한 대안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장생활이나 학교 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이 취미활동이나 여행같은 것으로 정신적 피로를 푸는 것과 같이 일탈을 통해서 치유를 끝내면 사람들은 다시 옛 삶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찌기 월든을 쓴 데이비드 소로도 겨우 2년 2개월동안 숲속에서 살았을 뿐이다. 



과학적 기계적 문명은 분명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효율적이고 거대한 기계, 거대한 건축물과 같은 시스템을 건설하고 그것에 의지한다. 그것은 그 이전 사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생산적인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게 사는 일이 많고, 각종 자연재해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다. 이 건축물의 설계자이자 건설자이고 관리를 담당 하는 인간은 그 안에서 이해가능한 지식을 발견해 내고, 그 지식을 적용하는 존재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들어 온 문명이라는 건축물의 벽돌은 지식이며 이 지식을 다루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가 된다. 금속활자 인쇄나 대중교육 같은 지식의 보편화를 위한 기술들과 시스템은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바탕이다. 그것없이는 민주주의는 실패할 것이고 사회적 시스템은 돌아가지 않게 되어서 세상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즉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진정한 대안을 제출하는 것은 이제까지 성공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은 점점 더 많은 잉여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의 주류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보면 시스템 바깥에서의 한가한 시간은 낭비된 시간으로 그리고 은퇴한 사람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쉽다. 우리는 그것들을 충전의 시간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생산하는 시간으로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명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며 이제 더이상은 어떤 직장에서의 지위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찾는 방법들도 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런 방식들은 진정한 대안적 삶의 행태를 제시하는데 실패했기에 우리는 그 의미에 확신을 가지기가 힘들다. 같은 이유로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의미가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설사 풍족한 연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그저 소비만 계속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무의미한 잉여인간으로 보게 되기 쉽다.  그저 먹고 소비하고 나이를 증가시켜갈 뿐이다. 세상은 나없이도 잘 돌아갈테고 나의 존재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어떤 직접적 의미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제공한다는 대안적 삶은 무엇일까?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우리가 자동화라고 부르는 과정의 궁극적인 도달점이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해서 우리들의 판단을 자동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공 지능 패러다임의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데이터의 수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대량의 데이터가 생겨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동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해왔던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변화와 정성적으로 비슷한 변화는 이미 역사적으로 여러번 있었다. 사람들이 문자를 쓰지 않고 구술문화속에서 살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어딘가에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좋은 말도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의 기억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문자가 사용되자 그것은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게 되었고 나아가 재검토되고 조합되어 더 쓸모 있는 지식이 만들어 질 수도 있었다. 좋은 지식은 더 널리 퍼지게 될 수도 있어서 우리는 이제 작은 지역마다 있는 지혜있는 사람을 따르기 보다는 모두가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읽고 배우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적 구심력도 증가했을 것이다. 



과학 혁명이 제공하는 변화도 마찬가지다.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한번 발명된 것은 두번 발명될 필요가 없어졌다. 즉 누군가가 자동차를 발명하고 그것의 설계도를 남기면 다른 사람은 그걸 보고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같지만 정확한 측정과 표준화에 근거해서 지식을 만들어 내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누군가가 남긴 음식 레시피를 가지고는 대개 정확히 그 맛을 재현하기 어렵다. 왜냐면 음식재료의 양과 온도조절같은 것이 정확히 표기되었다고 하더라도 음식을 만드는 데 쓰는 기구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과학적 수준에서 정확히 기록하는 레시피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료를 고르는 안목이 정확히 레시피에 있을까? 그러므로 김치 장인이 죽고 나면 그가 만드는 김치는 사라지기 쉽고 과거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은 다르다. 한번 발명되거나 발견된 것은 두 번 반복될 필요가 없어지므로 지식의 누적속력은 크게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발달한 후에는 인간의 행동이나 판단이 한번 행해진 이후에 버려질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는 그것들은 대개 그저 한번 행해지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제 그것들은 데이터가 될 수 있고 인공지능에 반영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훌룡한 조각을 하는 조각가가 충분한 데이터를 남겼다면 우리는 그의 조각을 재현하는 인공지능을 가질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며 설사 똑같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근접하고 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이 반복되고 그다지 높은 품질을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노동을 대부분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에는 운전이나 물건의 운반같은 노동일도 있겠지만 고객에 대해 기본적 안내를 한다던지 단순한 요약이나 보고서를 쓰는 것같은 정보처리도 해당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혼자서 퓰리처 상을 받을 정도의 글을 쓰는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사건에 대해 요약을 하는 단순 언론보도라면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사람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반드시 종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듯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반드시 과학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공한다. 많은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고 그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을 생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반복적 일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생산성은 오히려 극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지식생산과정이나 사회적 시스템의 유지보수과정은 이제까지는 상당히 수작업에 가까웠다. 사람의 판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역할을 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공지능은 전통적으로 인간만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과정도 자동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활동을 대부분 자동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는 없는것인가? 인공지능은 지능적이니까 인간의 직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대체하고 인간을 멸종시킬 것인가? 강력한 기술은 모두 위험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야욕이 있다고 믿고 그래서 인공지능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문자가 위험한 것은 부적같이 종이에 쓴 문자는 강력한 마력을 행사하기때문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이 위험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면서 무슨 문제를 푸는 것인지 모르면서 만들거나 인공지능을 하나의 문제를 풀도록 만들고는 그걸 다른 경우에 쓰기 때문이다. 자동차도 훌룡한 발명이지만 자살에도 쓸 수 있고 길가는 사람을 죽이는데도 쓸 수 있다. 실제로 자동차는 오늘날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해마다 죽이고 있지만 아무도 자동차를 그만 쓰자고는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동차는 그 이상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기술도 그 기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그걸 안전하게 만들지 이해는 없이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자고 해서 안전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공 지능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과 이해가 더더욱 필요로 한 것이다. 



앞에서 나는 문자와 과학과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변화의 유사성에는 또 다른 것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문명은 허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의 문명에 기초해서 발달한다는 것이다. 즉 문자 문명은 구술 문명에 기초해서 발전했고, 과학 문명은 전근대적인 종교적 문명에 기초해서 발달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만들 미래 사회도 지금의 사회에 기초해서 연속적으로 발달하는 것이지 과거가 모두 무시되고 허공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지능이 발달한 미래 사회도 인간 중심의 사회일 것이다. 다만 훨씬 더 겸손하고, 환경을 주목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자가 사용된다고 해도, 그 문자가 기록하는 정보는 결국 구술 문화 시절부터 언어와 문화를 발달시켜온 인간들의 것이다. 이때문에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쓴 월터 옹은 철학은 문자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그 철학의 과업은 구술문화시절부터 내려온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쓴 바 있다. 즉 새로운 문화인 문자 문화와 구술문화시대로부터 내려온 종교적인 믿음을 조화시키는 것이 철학의 첫번째 과업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문자 문화가 퍼졌던 초기의 철학자인 플라톤이나 공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배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의 과학이나 기술이라면 거의 관심을 끌지못하지만 철학이라면 수천년간 발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전히 초기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귀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가졌던 문제의식들과 답들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다.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 과학이 모든 종교를 압살하고 사라지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는 다시 오랜간 기억되는 로크, 데카르트나 칸트같은 철학자가 나타나는데 지금와 돌아보면 그들의 과업도 과학혁명 이전의 종교적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과 조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새로이 등장한 이 과학적 시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가, 우리는 이런 시대에 인간을 어떻게 봐야 하는 가라는 문제를 기존의 언어와 관념으로 답하려는 철학적 과제가 그들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학은 많이 발달했지만 뉴튼은 여전히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뽑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현대 과학이 더 새로운 것은 맞지만 뉴튼의 고전역학보다 더 근대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은 정밀하게 측정된 데이터에서 수학적 법칙을 찾아낸 결과라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 패러다임은 이미 뉴튼의 시대에 거의 완벽한 상태로 세상에 나타났고 아직까지 우리는 그것을 반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뉴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천재이고 현대적인 과학자로 느껴지는 것이다. 



인공지능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인공지능 혁명은 어디까지나 데이터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 중에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바로 인간이 지난 수천년간 누적시켜온 문명안에 있는 데이터이고 그 중의 핵심은 인간의 언어 데이터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 세상을 보는 집단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인간의 시각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언어가 있어야 인간과 인간은 그리고 인간과 기계는 소통할 수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할 때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달고 있는 기계를 이 지구상에 내려놓는다고 하자. 그 지구에는 인간이 살고 있지 않다. 그럴 때 이 기계는 화상과 음성 데이터를 수집해서 점점 더 강력한 지능을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인간 수준의, 아니 인간을 능가하는 문명을 건설해 낼 수 있을까? 이건 현실적으로 터무니 없는 상상이다. 기계는 그래야 할 필요나 욕구가 없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 유한한 성능의 컴퓨터는 아무 제약도 없이 쓸모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없다. 이 기계가 스스로 데이터를 모아서 고전역학을 만들어 발표하고 그래서 뉴튼을 대체할까? 고전역학은 양자역학과 비교하면 분명 어떤 부분에서 틀린 이론이다. 그런데 왜 그 기계는 고전역학을 발표할까? 또 고전역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한 이론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위한 또 하나의 언어랄까. 그런데 기계가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왜 고전역학을 만들까? 



인공지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 중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이제까지 인간들이 누적시켜온 것들이고 앞으로도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데이터가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면 인공지능에게는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문제를 설정하고, 어떤 목적에 인공지능을 최적화시킬 뿐이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기준을 정할 지능이 없다기 보다는 그럴 욕망과 이유가 없다. 인간의 욕망은 오랜 생명의 진화과정동안 인간에게 생겨난 것이며 역시 엄청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의 언어행동 데이터를 보고 그걸 흉내하는 것과 본래 그런 원초적 욕망을 가지는 것은 서로 다르다. 말 못하는 인간인 아이나 동물들에게도 욕망이 있다. 몸이 있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진화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컴퓨터안에서 저절로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쓰레기 더미를 상자에 넣고 흔들었는데 그 안에서 컴퓨터가 만들어 진다는 말처럼 믿기 힘든 것이다. 혀가 없어서 맛을 느낄 수 없으며 소화시킬 위장도 없고 그렇게 만든 에너지로 활동하고 자손을 남길 욕구가 없는데도 요리책을 읽고 배고픔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가 문자나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듯이 인공지능 시대란 결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문자나 과학을 의인화하지 않듯 인공지능을 의인화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인공지능은 마치 인간 몸속의 자율신경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일찌기 물리학자 어윈 쉬뢰딩거는 마음과 물질에서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한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를 반복적으로 행할 때 우리의 의식은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장운동이나 심장운동은 대개 무의식중에 행해진다. 숨쉬는 것도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며, 익숙한 길을 걸을 때는 우리의 발걸음도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우리는 오직 새로운 상황에서 뭔가를 배우려고할 때 의식을 개입시킨다고 쉬뢰딩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지적을 생각하면서 과학패러다임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생각해 보면 인공지능이란 인간이 의식적으로 하던 일을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게 만드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은 데이터가 충분하기에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한 사회를 한 명의 인간으로 말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는 마치 장운동이나 심장운동 그리고 호흡까지 모두 다 의식적으로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심각한 환자와 비슷했다.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일에 의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투입함으로해서 그들을 괴롭게 만들어 온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만들어 내는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게 만들게 되는 사회다. 사회가 한명의 사람이라면 인공지능은 그 사회의 자율신경같은 것으로 전체 시스템의 유지 보수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됨에 따라 의식을 가진 인간은 의식을 가진 인간처럼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문명이나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았을 때 과학 패러다임 단계의 문명은 나무같은 식물에 가까워 보인다. 나무는 느리게는 성장하지만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튼튼한 줄기로 자신을 지탱하고, 단단한 껍질로 자기를 보호한다. 이 나무에 비유된 과학 패러다임 문명의 줄기나 껍질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온 과학적 지식들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지식들이고 규칙들이다. 반면에 인공지능 패러다임 단계의 문명은 몸을 움직이고 뇌를 가지게 된 사람에 가까워 보인다. 사람은 자기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 변화에 맞춰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몸에도 뼈처럼 구조적 안정성을 줄 지지대가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일들이 반복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세상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기억하며 그 변화에 반응할 필요가 있다. 화재가 나면 나무는 타 죽지만 사람은 뛰어서 피난한다. 이전과는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 문명에서 인간이 맡아야 할 역할은 인간의 삶에서 의식이 맡아야 할 역할과 비슷하다. 새로운 것을 인식해서 데이터를 얻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상황을 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과학 문명을 만드는 기본 재료가 과학 지식이었다면 인공지능 문명을 만드는 기본 재료는 데이터다.  그 데이터가 많이 누적되면 그 분야도 다시 한번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분야가 될 것이고 인간은 다시 더 새로운 변경을 개척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낭만주의 철학이 나타난 이래 오랜간 현대 문명 속의 삶이 비인간적이라고 불평해 왔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을 하면서, 어떤 틀속의 삶을 살면서 의식을 잃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싫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불평이 있겠지만 인간은 이제 진짜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서 항상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자율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인공지능에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는 사실은 데이터를 남기는 삶이란 언뜻 듣기에는 무미건조한 것같지만 그것은 모두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을 직장인의 삶이라고 부른다면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순간 그 사람의 삶의 의미가 증발하게 된다.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면 왕이나 기업의 회장같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의미를 쉽게 발견하지만 시스템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 일반 시민이나 말단직원의 삶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대개 잊혀졌다. 하지만 데이터를 남기는 것이 삶이라면 그래서 그 데이터가 수집되고 인공지능에게 반영된다면 모든 사람들의 삶은 미래 문명의 기초가 될 것이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심지어 그걸 경험한 사람의 기억속에서도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록한다고 해도 이제까지는 그 의미에 한계가 있었다. 문자는 위대한 발명이지만 결코 무한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걸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너무 많은 기록은 이미 인간이 읽을 수 없는 데이터가 되고 만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기록, 그러다 사라지고 말 기록은 애초에 쓰지도 않았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현대과학은 위대한 발명이다. 그것은 정밀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해서 그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사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표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거대한 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미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다시 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존재의미가 없어보인다. 이것은 가장 똑똑한 사람만이 존재의미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거대한 지식의 시스템이 거대해 질 수록 인간은 더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할 의무가 생기게 된다. 태어날 때는 누구나 원시인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난다. 21세기에 태어난다고 아기가 천재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천재들이 누적시킨 지식의 산앞에 서서는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여 시스템을 개혁하지 못하면 자신의 삶은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은 존재한 적도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지식의 산의 한 귀퉁이를 공부하는 것도 어려운데 말이다.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개혁할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의미가 있을 것이며 당장 유명하지 않더라도, 어떤 직장에서의 지위가 없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살아갈 때 그 데이터는 남겨질 것이고 인간은 그걸 다 확인할 수 없겠지만 인공지능은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의 삶이 미래의 문명을 만드는 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문명에서 모두는 탐구자이고 구도자이며 연구자일 것이다. 우리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것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게 될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만나는 첨단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도 모두가 말이다. 여기에는 은퇴란 개념도 있을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인공지능의 시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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