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존재한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더 채워질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설명만들기의 어려움과 복잡성의 증가에 있다. 이것이 지난 번 글에서 말했던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의 생활과 인식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물론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 유독 이해할 수 있는 것에만 주목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정복한 문제들, 우리가 이해한 것들이 신문 방송과 책을 채우고 있다. 이런 현실은 역전될 것이다. 즉 지식의 생산이 쉬워지면서 우리의 관심은 앞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더 쏠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크게 바꿀 수 있다.
이런 관심의 역전은 이미 과거에도 여러번 일어났는데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세속화라는 현상이다. 시대에 변함에 따라 그 시대를 주도하던 직업과 학문의 의미는 달라지게 된다. 그럴 때 일어나는 것이 세속화인데 세속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더이상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수단이 된다던가, 숭고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게 되고 단지 작은 수의 사람만 그렇게 믿는 매니아적인 일, 단순한 산업적 경제적 가치가 있는 일로 여겨지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잊어도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세속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더이상 그 분야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첨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일이 어떤 말로 다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걸 단순하게 가치 평가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농사를 생각해 보자. 기계화, 근대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농사를 짓는 것은 대다수 세상 사람들의 직업이었다.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 농사에 관련된 전통 행사나 절기같은 것이 보여주듯이 농사는 한 해 한 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했다. 그때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이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육체적 힘과 감각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던 이런 시절, 농사일은 숭고한 일로 여겨졌다. 농사일은 훨씬 더 종교적인 행위에 가까웠고, 풍년은 우리의 성실함과 선행에 대해 우주가 보답으로 주는 복이었다. 그렇기에 농사는 단순히 더 많이 생산해서 배불러 지는 일에 대한 것일 수 없었고, 많은 것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기쁨과 풍요를 상징했었다. 수렵채집인 마을에서 사냥이 그러했듯이 농사는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었고,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이며 신과 접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교만하거나 불경하지 말아야 했다. 농사는 한해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불경함은 언젠가는 그 댓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농산물에게 우리의 정신을 쏟아넣으면서 정성껏 농사를 지어야 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접촉하고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산업화, 기계화는 농사의 의미를 크게 바꾸었다. 물론 여전히 농사를 숭고한 일로 여기면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농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수는 전체 인구에서의 비율을 생각하면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줄었다. 모두가 농사를 짓던, 기계화 이전의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기계화라는 것이 일어나는 미래가 온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런 농민들에게 미래란 모두가 농사를 기계로 지어서 어떤 다른 시대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시대처럼 여겨지기 쉬울 것이다. 모두의 직업이 농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농사가 직업인 사람이 전체 인구에서 미미한 숫자로 줄어들고,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었다. 즉 시대를 이끌어가고 대다수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이 이미 농사가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사람들은 농사일에 신경쓰고 농민을 무시하지는 않으며 농업이 없이는 사람들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산업이 발전한 나라에서 농사가 그 나라의 미래라고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1차산업이 아니라 2차, 3차 산업이 경제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미래인들이 농사를 기계로 짓는 것이 미래가 아니었다. 농사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작은 부분으로 축소되는 것이 기계화된 미래였다.
농사는 이제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게 되었다. 세속화된 농사는 이제 종종 단순한 산업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저 주로 투자 대비 생산이 얼마가 되는가를 따져야 할 분야이지 더이상 어떤 심오하고 숭고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농민들에게는 농사는 여전히 이전만큼은 아니라도 단순히 생계를 잇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더이상 농사일에 관심이 없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농사가 사회적으로 화제의 중심에 서는 일이 줄었다. 즉 인식의 세계에서는 농업은 정말로 많이 축소된 것이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어딘가에서 저절로 행해지고 있을 과정으로 여겨지고 많은 사람들은 그저 마트에 가서 쌀과 채소를 살 뿐이다.
이같은 세속화는 본래 과학과 수학같은 학문때문에 가속화되었다. 근대화, 기계화, 이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모든 일에서 신이나 신비한 섭리를 느끼는 다신론적 태도를 취하기 보다는 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학교에 가서 지식을 배우고 취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학이나 수학같은 학문에서도 이제는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다. 수학과 과학은 21세기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본래는 훨씬 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진리가 이성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학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이며 칸트는 물리학자였다. 뉴튼은 이 세상에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다신론같은 신이라기 보다는 우주 전체의 신이었다. 즉 적어도 서구에서 과학이나 수학은 시공을 초월해서 옳은 보편적 진리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으로서 여겨졌으며 학자들은 19세기나 20세기 초까지는 학문에 대한 이런 숭고하고 종교적인 태도를 가졌다. 20세기에 활동한 아인쉬타인에게 과학자들은 이미 스포츠를 하거나 어떤 이득을 위해 과학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진정한 과학자들은 아직 존재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 과학이란 돈이나 산업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주의 질서를 찾는 숭고한 종교행위에 가까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1세기 현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학자와 연구원이 있는 시대이고 가장 많은 과학과 수학논문이 출판되는 시대다. 인구가 늘었고, 교육이 보편화되었으며 앞에서 말한대로 산업의 중심이 2차 3차로 바뀌면서 중국이나 인도같은 인구 대국도 수많은 대학을 설립해서 졸업생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과 수학은 물론 더 나아가 지식을 생산하는 인간의 이성은 세상의 중심, 화제의 중심을 확고하게 차지한 것같다. 오늘날 지식은 가장 귀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까? 현실은 이미 물리학 전공인 내가 보기에는 거북스러울 정도다. 즉 이미 언론이나 대중의 반응을 보면 과학이나 수학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경제중심적이다. 어떤 새로운 연구결과나 발명이 등장했을 때에도 언론은 언제나 그것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식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여전히 과학과 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고 과학기술분야가 화제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 세상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과학과 수학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많이 세속화했다. 이제 과학자나 기술자는 더이상 인생의 의미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산업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사실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해방되어 근대화가 본격화한 한국에서는 과학자가 철학자처럼 여겨졌던 적도 없었다. 20세기는 수학에 있어서 특히 가혹한 시기였는데 그 이유는 수학이 객관적 진리라는 사실이 부정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가 보여주고, 여러개의 기하학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수학은 더이상 숭고한 진리, 이 세계에 대한 변하지 않은 사실을 보여주는 학문이 될 수 없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등장한 이래로 물리학도 일상어로는 설명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단순한 수식아래서 전개되는 고전역학이 이 세상에 대한 신의 명확한 뜻을 보여주는 것같았다면 지금의 물리학이 보여주는 세상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인과론조차 불명확한 것이 되었다. 양자역학의 가장 기본적인 수식인 쉬뢰딩거 방정식은 복소수를 포함한다. 복소수는 영어로 상상의 수이다. 즉 이미 기본 방정식에서 조차 물리학은 고전적 실체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수학과 물리학에는 이전에 없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려고 한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쓸만해 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훌룡한 문제 해결법일 때 인공지능을 써서 과학적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점점 많아지고 이미 인상적인 결과들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학이나 과학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 먼저 수학을 생각해 보자. 수학 증명을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이 어떤 수학공식의 증명을 해냈는데 그 양이 한 인간이 평생동안 읽어도 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수학증명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지 인공지능의 보장을 믿으면서 경험적으로 이 수학공식을 믿고 쓰게 될 것이다. 아니 설사 능숙한 수학자라면 한 1년잡고 열심히 읽고 이해하면 따라잡을 수 있는 증명이라고 해도 인공지능이 그것의 옳음을 보장할 때 자기 인생의 1년을 허비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이미 계산기가 계산한 산수 결과를 검산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다고 할 때 과연 수학이란 어떤 학문이 되는것일까?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것을 인공지능이 해내고 새로운 반도체칩의 설계를 인공지능이 해낼 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논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지식을 생산해 내는 지금까지의 과학 패러다임과는 다르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과학적이고 공학적인 결과들이 양산될 때 과학자나 공학자라는 직업의 의미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인공지능이 쓸만해지자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연구활동 나아가 지식 생산 활동이 마치 기계화가 되기 이전의 농사일처럼 기본적으로 수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항상 인간의 판단이 단계 단계마다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자나 수학자는 농부가 겪었던 변화를 기억해야 할지 모른다. 새로운 법칙이나 발명이 인공지능의 도움에 의해서 행해지는 시대가 올 때, 다시 말해 이해가능한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 인공지능에 의해 크게 쉬워질 때 그들은 마치 앞에서 소개한 농부와 비슷해 질 수 있다. 즉 이제는 그런 '보편적 지식의 생산'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을 제외하면 별다른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연구개발의 효율이 높아짐에 따라 지식생산은 경제적 이익에 있어서도 가장 큰 분야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농사가 그렇듯 수학이나 과학에 종사하는 일, 이해가능한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모두가 모두가 기억하겠지만 그건 그저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인공지능에 의해 행해지는 일로 여겨질 것이다. 농사일이나 도시관리일처럼 말이다.
기계화된 미래가 모두가 기계로 농사를 짓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농부처럼 요즘 세상사람들은 종종 미래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인공지능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미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우리의 눈에 지금 보이는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점차로 잘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그 세계에 남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화제의 중심에 서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한다고 다 보이는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녹음기에 대한 것이다. 녹음기가 있기전에 유럽에서는 식당마다 사람 가수가 노래를 불렀고 3류가수, 5류가수도 먹고 살 수 있었다. 1류가수가 모든 식당에서, 모든 극장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코드가 나오자 3류가수의 노래보다는 녹음된 1류가수의 노래가 더 좋았다. 결국 1류가수는 모든 시장을 장악했고 3류가수들은 더이상 가수를 할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인공지능의 시대에 모든 일터에서 아주 광범위하고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자와 수학자에게도 즉 연구활동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대학에 가고 심지어 대학원에도 갈 수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연구소에서 자기 일을 찾아서 작게 작게 연구자의 길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본적 이유는 과학이나 기술개발이라는 과업에는 수많은 일꾼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천재만 필요한게 아니다. 그래서 3류나 5류 과학자라도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과학하는 방법을 바꾸고 정보를 다루는 방법을 바꾸게 된다고 해도 지금의 관행이 유지될까? 이전에는 천재라고 해도 온갖 관리 작업이며 실험수행, 논문 작성등으로 그 결과를 내는데에 한계가 뚜렷했다면 이제 인공지능과 함께 일하는 천재는 과학계에서 3류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서있을 곳이 없게 만들 것이다. 뛰어난 교수는 10개 100개의 아이디어를 가지지만 그걸 전부 자신이 다 추구할 수 없으므로 대학원생같은 사람과 협업을 하는 쪽이 좋다. 누군가는 자신의 지휘에 따라 실험도 해야 하고 데이터 분석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자비스와 일하는 아이언맨처럼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교수들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연구개발에 기계화를 도입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농사가 기계화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마블 영화에 나오는 아이언맨처럼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그 천재 과학자들은 시대의 중심에 서게 될까?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그 시대의 변화를 주도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에서도 이해가능한 지식들의 역할은 결정적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겠지만 사회적인 중심화제에서는 밀려날 수 있다. 즉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이해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이해불가능한 것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차피 인공지능 자체가 과학적인 의미에서 이해가 가능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불가능한 제 3의 지식이다.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던 사람들은 차차 인공지능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수렵채집인은 문명인이 쓰는 돈이나 신용카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문맹이기 때문에 문명사회를 만들어 낸 지식들을 흡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시대는 수렵채집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써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거나 인공지능 로봇이 지금 사람들의 직장을 차지하는 것이 핵심인 시대가 아니다. 지금 시대의 핵심이 기계화된 농업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핵심을 차지하면서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이며 인공지능의 도움이 없이는 지능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시대다. 선사시대의 사람들에게 21세기의 사람들은 마술을 부리면서 사는 것같을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면 이상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같을 것이다. 진정한 인공지능의 시대, 늦어도 50년안에는 온다고 하고 5년후에 올지도 모른다는 인공지능의 시대는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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