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교육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냐면 교육기관은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갈 인간을 키워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 개혁은 AI 시대가 불러올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우리가 단순히 창의적이 되자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 될 수는 있을까? 왜 지금의 학교는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AI 시대의 교육중심에 서기에 부적당할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다음의 문장으로 해보고자 한다.
AI 시대는 작가를 키우는 교육을 원한다. 그리고 현 시대의 교육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나는 내가 대학원 시절에 연구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문화적 변화를 떠올리게 된다. 벌써 30여년 전의 일이지만 물리학과 석박사 과정에 들어가서 연구를 시작한 나는 연구를 하는 것과 그때까지 해왔던 공부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연구를 하기 전의 공부는 그저 이미 옳다고 증명되어진 지식들을 더 많이 습득하는 것이 주가 된다. 그런데 연구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는 소설을 읽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과의 차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그걸 즐기면 되고, 그 이야기를 따라갈 정도가 되면 되지만 소설을 쓴다면 다른 무엇보다 기본설정이 중요하다. 이야기가 어떤 설정속에서 시작되는가하는 것이 그럴듯하면 이야기는 거의 저절로 전개되어질 테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꾸 새로운 설정이 덧붙여지고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하게 전개될 것이다.
소설가도 아닌 내가 소설을 예로 들었으니 이번에는 개인적인 연구와 논문집필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 주제를 잡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 답을 찾는 것이 연구라고 할 때 연구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능은 그 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다르게 말하면 올바른 형식을 가진 질문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를 하다보면 계속 마음속으로 이건 왜 이럴까 저건 왜 이럴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특정한 질문을 던지게 되면 마음 속에 이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질문은 구체적으로 해결가능하다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생은 경험많은 교수와 함께 일하면서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찌보면 교수는 거의 아무 일도 안하는 것같은 상황에서도 그 교수가 그 문제를 전부 다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가 많이 생기는 데 그 이유는 경험많은 교수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이건 왜 이럴까라는 질문 하나를 던지면 대학원생은 열심히 문제를 풀고 해결하지만 그런 한마디의 도움이 없으면 몇년이 지나도 아무 문제도 풀지 못해서 논문을 내지 못하고 졸업도 힘든 대학원생들이 많다. 게다가 복잡하고 시시하게 던진 질문은 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어려운데 답을 해도 그 의미도 별로 없다. 반면에 제대로 된 대가의 질문은 거의 답을 자동적으로 생산하지만 그 의미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남의 책이나 논문을 읽는 것으로는 잘 길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논문을 직접 써보면 아는데 제대로 된 질문은 그걸 떠올리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떠올리고 나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질문이라서 설명이 별로 필요없다. 그러니까 논문의 서두에서 이 분야에서는 예전부터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라고 쓰면 더 설명이 필요없고 그걸 읽는 독자는 아 그러네 하고 쓱 지나간다. 그리고 많은 경험없는 대학원생들은 그 다음에 본문에 나오는 기술적인 부분이나 그 결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맨다. 그러면서 그 저자가 천재이거나 천하에서 가장 재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면 중요한 질문을 던졌는데 문제가 너무 명료하고 간단하게 풀려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많은 연구자는 알고 있다. 은근 슬쩍 지나간 그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질문 제기가 결국 거의 모든 것을 해낸 것이다. 이 성공적인 질문의 뒤에는 실패했었던 많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똑똑한 연구원은 슬쩍 지나가는 그 연구 논문의 서두가 가진 틈새를 찾아서 새로운 연구주제를 생각해 내기도 한다.
소설의 예를 들기도 하고 과학 연구의 예를 들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창작은 결코 지식의 양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도 의미가 있는 책은 전혀 쓰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문맥에서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학교교육은 초중고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결코 작가를 키워내는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도 있어서 학교를 다닌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왜 구조적 문제를 가진 지금의 학교가 AI 시대의 교육을 당담할 수 없는가를 보여준다.
지금의 학교는 시스템 속의 부속품, 공장과 회사에서 하나의 업무를 반복적으로 담당할 노동자를 키워내는 곳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학교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학교에서는 모두가 같은 교과서를 공부하고 그걸로 평가를 받는다. 둘째로 학교는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곳이며 학년이라는 계층이 있어서 각각의 학생은 자기 학년에 따라 무엇을 해야할까가 정해져 있다.
이런 특징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교육이란게 원래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교육이란게 본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가르치는 곳이고 시험봐서 평가하는 곳이며 학년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교육이 작가를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과연 작가가 교과서를 써서 학년을 나누고 평가해서 다른 작가를 길러낼 수 있을까? 학생들이 더 좋은 점수를 받자고 글을 써서 서로 경쟁하면 명작이 나오나?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래에 조금 더 설명하겠지만 AI 시대를 작가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건 아 그런 면도 있군이라고 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앞에서 작가나 연구원의 예를 들어 내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의 핵심은 질문과 문제를 설정하고 던지는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에 왜 핵심적으로 중요한가 하면 첫째로 특정한 시스템의 부속품의 역할을 하는 일은 점차로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AI 시대에 사람의 직업이 없어진다고 난리인 이유는 지금의 교육 때문이다. 위에서 나는 경험없는 대학원생이 논문의 기술적인 문제에 골몰할 거라고 말했엇다. AI 시대에는 그 부분이 AI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질문의 가치가 더더욱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둘째로 AI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의 핵심도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I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다. 챗GPT같은 AI를 써 본 사람은 알지만 두리뭉실하고 애매한 질문을 던져서는 AI도 결코 좋은 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AI의 활용에서는 경계를 설정하고, 문제를 설정하고, 관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들인 챗GPT가 결코 체스 전문으로 훈련받은 AI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제가 설정되면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는 AI가 발달하는 시대야 말로 문제를 설정하는 능력이 절실해 지는 시대이다.
AI가 발달하면 문제설정도 AI가 하는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문제설정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주관적인 판단하에서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가지지 못한 AI는, 보편적 데이터로만 만들어진 AI는 그걸 할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핵심적 능력은 그리고 창의력의 핵심적 부분은 바로 이 문제설정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만의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내고 그 규칙안에서 AI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걸 잘해내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게임으로 초대할 것이고 이걸 전혀 못하는 사람은 그냥 남의 게임의 규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AI 시대에서는 결정적일 것이다.
이미 교육의 목적을 쓴 닐포스트먼이나 저명한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같은 사람들은 예로부터 학교 교육의 문제는 교과서를 가지고 모두가 똑같은 것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왔다. 모든 학생들이 모두 똑같은 것을 배우는 것은 당연히 보편적 지식을 전제한다. 만약 중력법칙이 내 친구에게는 통하는 것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거라면 나는 중력법칙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면 비디오 아트를 배울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보편을 강조하는 시스템속에서 점차로 문제를 설정하고, 환경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즉 문제를 제기하고, 이건 왜 이럴까라고 질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 질문도 답도 이미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 써있고 그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초중고 대학이라는 시스템이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학년이라는 시스템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학급 친구들과 똑같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 지게 한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종종 선생님이나 어른들로부터 '그런 건 나중에 배우니까 기다리라'는 대답을 받게되거나 '그런게 지금 기말고사 시험에 나오지 않는데 너는 지금 공부해야 할 것은 모두 공부했는가?'라는 지적을 받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공장이나 기업에 들어가서 직장 상사가 명령한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끈기를 가지게는 될 것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휴식시간을 10분씩 가져가면서 기계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이런 교육은 문제를 설정해주는 선생님이나 직장상사나 시스템이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양산해 낸다. 게다가 어른이 되어보면 안다. 어른들이나 선배가 잘난 척하면서 '넌 그런 것도 모르냐'라던가 '그런건 나중에 가면 배워'라고 말하던 것은 대부분 거짓말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도 그 답을 모르면서 너만 모르고 있을 뿐 세상사람들은 그런 걸 다안다는 식으로 잘난 척함으로써 질문하던 사람의 질문능력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살아보면 남의 질문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오히려 무식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된다. 어린애의 질문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생각의 폭이 넓은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뒤돌아 보자. 평가도 없고, 교과서도 없으며, 선생님도 없고, 경쟁도 없고, 학년구조나 진학도 없는 교육도 교육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건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의미를 확장하고 새로운 교육이 어때야 하는 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애초에 지금의 교육기관이 AI 시대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앞으로는 교회나 절이 물리학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지식의 구조가 교육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행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교육 개혁이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교회를 대학처럼 개혁시키면 그건 교회로서도 엉망이고 대학으로서도 엉망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을 대안교육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문제는 옛 교육을 새로운 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고 새로운 교육의 내용이다. 과거의 교육을 비판만 한다고 새 교육이 서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평가가 없고 교과서가 없고 선생님도 없고 경쟁이 없고 학년구조나 진학도 없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새 교육이 나오는것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지금 조선말엽이나 일제시대 직후의 시대와 비슷한 시기를 살고있다. 서당이나 서원에서 유교교육을 받았던 조선 사람들이 더 가열차게 논어를 읽어도 과학기술 혁명에 대한 교육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취업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학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분발해도 서당이 근대학교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근대학교가 있지도 않은데 공부를 때쳐친다고 반드시 더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다.
과도기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문제를 겪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통적 공부를 멈추지는 말되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경험이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둘러 봐야 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근대 학교'가 필요해졌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교육을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키워드는 질문이고 작가이고 게임이다. 질문은 자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남의 질문과 답을 듣는 것으로는 충분히 키울 수 없다. 언제나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에서 키워진다. 그 대화는 남의 책을 읽다가도 시작될 수 있고 산책을 하면서도 시작될 수 있지만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면서 구체화될 수 있다. 즉 소박하더라도 스스로가 이 세상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가야 그걸 고치고, 남의 것과 비교도 하면서 자기를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것이니까, 훌룡하신 분의 말씀이니까 외워서 진리로 삼자는 식이면 자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면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설정이라는 것도 할 수 없다. 자기 혀를 믿지 못하고 남의 요리평만 외우는 사람이 요리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수 많은 문명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정도는 몇만년전이나 몇백년전과 다름없이 산다. 여전히 아이는 부모가 기르는 것이고, 세상에는 종교시설들이 있다. 유교나 불교적인 가르침이 지금 세상에서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초중고 그리고 대학에서 하는 교육도 미래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지극히 간소화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신에 사람들은 일찌감치 작가의 길에 들어설 필요가 있다. 오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꼭 소설쓰는 작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자아찾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서 세상사람들과 소통하고, AI와 대화해서 교육을 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차차 자신의 문제와 해법을 만들어 가고 성장해야 할 것이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램프가 있다고 해도 그 마법의 램프는 좋은 소원이 무엇인지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닐 포스트만은 지금까지 말한 교육이 어른과 아이의 차별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즉 어린이라는 개념의 기원은 읽고쓰는 법을 아직 익히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제대로된 이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선거권도 재산권도 제약되며 교육은 권리이자 의무가 된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어린이와 청소년과 진짜 어른의 구분이 보다 또렷히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미래 사회에서 말하는 진정한 어른은 자기가 어떻게 살지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그걸 고민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고 자기 선택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된 이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기에 진정한 어른이라고 여겨지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 새로운 단계에서 펼쳐지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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