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유명 작가 마이클 클라이튼이 언론을 비판하면서 설명한 머레이겔만 기억상실증효과라는 것을 소개했다. 머레이겔만 기억상실증효과란 이런 것이다. 머레이 겔만처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사람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언론 기사를 읽으면 기사들이 기본 사실이 틀릴 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놓는 등 엉망이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건 물리분야만 그런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늘 느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기억상실증 효과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기사를 읽을 때에는 그걸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머레이 겔만 같은 사람이 정치뉴스나 예능 뉴스를 읽을 때에는 이 기사가 최소한의 권위를 가졌을거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걸 기억상실증효과라고 마이클 클라이튼은 이름붙였다.
이 재미있는 지적은 21세기의 언론이 가진 심각한 문제 나아가 인간 사회가 가진 심각한 문제를 하나 지적하고 있다. 그건 지금의 정보의 흐름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안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은 전문화하고 복잡해 졌다. 그러니까 어떤 기자가 전기차 시장이나 초전도체 물질에 대해서와 같이 특정분야에 대해 기사를 쓰려고 한다는 것이 점점 비현실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약간 시간을 뒤로 해서 반세기전쯤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교양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이 기자가 되어 '진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언론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만사 모르는 것 없이 다 전문가 인체 할 수 있는 사람이 기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률 문제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다음주까지 그것에 대해 기사를 쓰라고 하면 이리 저리 자료모아다가 쓸모있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였달까.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 지고 전문화하면서 이런 일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갔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언론사 기자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저 어설픈 지식으로 어느 분야도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엄청난 지식이 쌓여 있는 분야를 어설프게 돌아보고 기사를 쓰는 일이 생겨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자주 생기는 일이 진짜 기사는 기사에 달린 독자 코멘트에 존재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슈퍼카에 대해 기사를 쓰면 독자중에 누군가가 왜 이 기사가 말도 안되는 기사이고 현실을 전혀 모르는 기사인지를 명확하게 댓글에 써주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왜냐면 댓글을 다는 그 누군가가 높은 확률로 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그 업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거나 매니아일 것이다. 결국 아무 것에도 전문적이지 않은 기자가 쓰는 글이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정치적 편향성이나 경제적인 목적으로 인한 왜곡까지 더해지면 언론은 더욱 더 쓰레기가 된다. 언론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이런 일이 생긴다. 기레기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신문은 점점 광고 사이에 아무 의미도 없는 기사를 써서 내보내는 쓰레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말하는 것의 요점은 크게 보면 언론의 기능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은 사회적 현실의 변화때문이라서 어떤 양심바른 기자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언론의 미래는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언론의 심각한 문제일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큰 문제중의 하나인 이유는 인간 사회는 언론같이 정보를 유통시키는 기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란 정보처리를 하는 기관이다. 즉 세상을 보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에 대해 빠르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일이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스키장에서 사고가 나면 그 사고의 내용에 대한 사실보도도 해야 하지만 비슷한 사고가 얼마나 나고 있는지, 그 스키장의 공사에는 누가 관여했는지, 다른 사고들에 비해서 이 사고의 중요도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를 쓰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인간 사회는 언론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지금의 언론은 가망이 없다. 그러니 이건 사회적 국가적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언론은 마치 인간이 전화 교환수 역할을 하면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는 전화를 수동으로 이어주는 시대와 비슷한 시대에 있다. 전화 사용자의 수가 작았을 때는 그게 가능했지만 전화 사용자가 많아지자 자동교환기가 없이는 되지 않았다. 아니 뒤집어 말하면 자동 교환기가 본격적인 전화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복잡해졌는데 언론은 여전히 수동으로 작동하고 있는게 문제다. 사람들은 인간이 기사를 써야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며 분명 그런 경우도 얼마든지 있겠지만 적어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비용과 시간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룡한 전문가들을 모아다가 모든 기사들을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작성하게 한다면 아주 훌룡한 기사를 쓸 것이다. 하지만 보도 속도가 중요한 언론 기사를 그렇게 천천히 쓸 수는 없다. 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기사를 쓰면 얼마나 비용을 내야할까?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결국 언론의 역할은 상당부분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자료를 읽고 요약하는 일에 뛰어나며 인건비가 들지도 않는다. 일단 인공지능이 쓰는 기사가 쓸만하다고 판단되어 본격적으로 인공지능 언론사가 등장하면 지금의 언론사는 인간 전화 교환수가 넘쳐나는 낡은 장소로 보일 것이다. 느리고 실수투성이인데 비용은 엄청나게 드는 곳으로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챗GPT같은 인공지능은 가짜 뉴스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언론사들은 인공지능이 기사를 전적으로 쓰게 하는 일이 없을거라고 발표하고 있다. 지금은 그들이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그럴까? 3년? 5년?
시대적 흐름의 방향은 분명한 것같다. 언론들은 자기들을 대단한 존재로 말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미 지금의 언론이 소개하는 뉴스도 가짜 뉴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면서 소비하고 있다. 즉 인간이 쓰는 기사의 품질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머레이 겔만 기억상실증 효과만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해마다 다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언론의 기사 품질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추세는 앞으로 점점 더 언론사 기사의 품질을 떨어뜨릴 것이다. 이건 특정 기자들의 양심문제를 넘어 구조적인 문제다.
세상에는 그래서 이미 티비를 보거나 신문을 읽지 않고 책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책을 쓰는 일에도 인공지능은 유용하겠지만 책의 저자라면 인공지능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지 않을거라고 믿는다. 인공지능은 보편성에 너무 빠져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런 저런 많은 데이터를 모아다가 훈련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관점, 특이한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관점따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저 일반론의 향연이랄까.
하지만 빠르게 세상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 싶다면 우리는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처리하는 일반론적인 인공지능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지금의 기자들이 쓰는 기사들보다 더 빠르고 훌룡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책에 대한 진짜 분석을 보고 싶다면 그 책을 읽은 어떤 훌룡한 분의 평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책 시장에 쏟아지는 책들에 대해서 간단한 요약을 읽고 싶다면 그건 인간이 해야할 일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사회는 이미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로 많은 비용을 내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인공지능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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