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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AI 시대와 인문학의 과제

by 격암(강국진) 2024. 2. 15.

최근에 기술철학에 대한 한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한 국내연구자가 과학철학에 대해 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기술철학내지 과학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공계 출신인 나로서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대해 지나치게 둔감해서 기술이나 과학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미분방정식에 대해 말하거나 메타버스 구현을 위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적 세부사항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술이나 과학이라도 해도 여러가지의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이 그걸 구분하지 않고 그냥 기술이라면 다 이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술철학은 아마도 기술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며 그런 질문들에 대해 완벽한 정의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런 것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필요한 만큼의 구분과 정리는 필요할 것이다. 왜냐면 사실 인류문명에서 기술이 아닌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삶에서 기술은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는 호모 사피엔스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어 짧으면 3백만년 길게는 6-7백만년의 길이를 가진다. 그러니 인간이 기술없이 살았던 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문화적 영향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기술이 없는 문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어도 기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언어도 뱃속의 갓난 아기가 이미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특징이 아니며 인간이 발전시키고 배워야 하는 기술이다. 문자도 기술이고, 석기같은 도구는 물론 말안장에서 수저, 옷, 농사에 이르기 까지 인간 문명에서 기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기술에 둘러 쌓여 있다. 물론 인간은 고릴라나 돌고래와 다르다. 즉 인간도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문명화 이후의 인간은 그런 유전적 특징으로 설명하기에는 기술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 인간의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인간과 침팬지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가 인간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기술의 발현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인간이 기술로 인해 변화한다는 문장은 당신이 말하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철학자들은 지나치게 인간을 기술없이도 순수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인간은 감각신호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다라는 문장은 아주 당연하고 자명한 것같지만 이런 문장은 사실 틀린 것이거나 부정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누구인가? 10세기의 인간이나 15세기의 인간은 기술 이전의 인간이고 지금의 인간은 기술습득을 눈앞에 둔 인간인가? 아니면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가 혼자서 우리가 인간의 것이라고 부를 세상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라고 한다면 그 인간의 것이라고 부를 세상의 인식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 아는 객관적 세계상은 문화적 문명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단순히 감각신호가 저절로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어떤 이론, 어떤 편견, 어떤 상식, 어떤 가정과 합쳐져야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지적이 바로 칸트가 말한 시간과 공간의 선험성이다. 즉 시간이나 공간 안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감각 신호 이전에 즉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선험적으로 공통적으로 이런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문명적으로 누적된 지식이 필요할 것이며 이런 지식의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습득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서 부터 기술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다. 나는 기술따위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뿌리깊게 기술에 영향받아서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오히려 기술의 대단한 영향력에 관한 생각에 서둘러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의 특정한 특징이 그 기술을 더욱 대단하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대부분의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엄청난 영향을 남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한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타이어 기술의 발전도 기술의 발전이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발전이다. 하지만 새로운 타이어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철학까지 만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기술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들은 철학적 연구가 필요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 기술이나 메타 버스 기술같은 것을 단순히 신기하다는 느낌에서 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철학적으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그리 크지 않다. 이제는 낡은 게임이 된 아케이드 오락기도 처음에 나왔을 때는 매우 신기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걸 보면서 이제 인간은 아케이드 게임속으로 빠져들어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는 거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런 철학자의 말은 마치 시골에 있다가 도시에 와서 놀라고 감탄하는 사람들의 말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조금 인간적으로 말하는 AI가 있다고 해서 그걸 보고 당장 내년이라도 인간을 능가할 감성적인 AI가 세상을 걸어다닐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도 아니고 제대로된 기술적 예측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술이 철학적 연구가 필요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나는 그것을 그 기술이 가지는 자아로부터의 거리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기술은 인간의 자아와 가깝고 어떤 기술은 인간의 자아와 멀다. 인간의 자아와 가까운 기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던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기술이고 먼 기술은 그저 단순하게 지금 그대로의 내가 쓰는 또 하나의 도구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 나온 타이어는 그다지 우리를 바꾸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그냥 사용할 뿐이다. 반면에 티비나 스마트폰은 세상을 바꾸고 우리를 바꾼 기술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고, 세상을 보는가를 바꿨다. 그러니까 타이어 신제품보다는 티비나 스마트폰 기술이 인간의 자아를 더 많이 바꾸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기술들도 문자의 출현에 비하면 인간의 자아와 먼 것이다. 문자는 인간이 정보를 저장하고 수정하고 개선하는 방식을 엄청나게 바꾼 나머지 인간의 자아를 거의 처음부터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게 타고난 언어 본능이 있고 문자없이 구술문화속에서만 살았던 시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의 인간의 정신 세계가 문자 문명 속의 인간의 정신세계와 분명히 달랐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수렵채집인들에게서 본다. 21세기에도 있는 아주 소수의 수렵채집인들은 2천년 이상 전에 살았던 플라톤이나 공자보다도 현대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고대의 현인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그들이 몇몇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제외하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오히려 문맹인 수렵채집인들은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의 삶과 언어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상현실이나 AI나 인터넷같은 기술에 대해서 어떤 철학적 분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자아를 얼마나 바꾸는지 즉 그것들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가지는 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인간의 자아를 바꾸지 못한다면 사실 그들은 그냥 새로 나온 자전거나 주방기구와 다를게 없다. 신기하고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의미있게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우리는 그것보다 긴급하게 주목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아를 바꾼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인식 혹은 자아는 변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하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살 때의 나도 50대의 나도 나이지만 나는 그저 지금의 나이지 10살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세상 인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지금의 나의 감정과 세상 인식을 가질 수는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두 개의 널리 알려진 뇌과학 실험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는 양안 경쟁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두 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이럴 때 세상은 이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눈은 약간 다른 각도를 가지고 세계를 보지만 언제나 같은 세계를 보는 것에 익숙해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이미지가 양눈으로 들어올 때는 둘 중의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가 억압한다. 

 

또 하나는 양쪽 뇌를 분리시킨 수술을 한 사람들에 대한 관측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두 개의 뇌가 하나의 몸을 공유하는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왼쪽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우뇌로 가고, 오른쪽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좌뇌로 가는데 양쪽 뇌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정보가 공유되질 못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세상을 하나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기 안에 낯선 타인이 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좌뇌가 내린 판단을 우뇌는 모른다. 그런데도 우뇌는 자신이 그 판단을 내렸으며 왠지 그것이 좋았다는 식으로 변명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자아는 하나다. 우리가 RPG게임같은 것을 하면서 그것에 집중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나라는 인간이 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연극배우처럼 연극에서 연기를 할 수 있지만 연기를 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는 잊지 않는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그들을 정신이상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아와 정신이상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문명바깥에서 사는 수렵채집인들이 문명인들의 삶을 관찰한다면 그들은 문명인들을 정신이상자로 생각하지 않을까? 야구선수라던가, 직장인이라던가, 군인이라던가 하는 사회적 정체성에 기반해서 행동하는 문명인들을 그들은 연기를 하다가 스스로를 그 연극속의 인물이라고 여기게 된 인간으로 여길 것이다. 

 

기술과 관련해서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그 기술은 우리의 자아를 크게 바꾸는 나머지 그 이전의 사람들을 거의 미친 사람들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수렵채집인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문자 문화 이전의 인간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 과학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종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느 정도 미친 사람들로 보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문자나 과학은 우리의 객관적 세계상이나 자아상을 너무나 크게 바꾼 나머지 우리는 그 이전의 사람들을 거의 미친 사람으로 여기며 지금의 세계를 단단한 객관적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앞에서 말한 '연극속의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게 된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왜 우리는 정신 이상자가 아닌가? 왜냐면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기술이 마치 공기나 물처럼 우리를 언제나 둘러 싸고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과 강하게 결합된 사이보그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연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그 연극속의 한 배우로 여기는 생각을 우리의 자아 그 자체로 삼아도 우리는 정신 이상자가 되지 않는다. 그 연극은 객관적 세계 그 자체다.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언제나 색깔을 가지고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 기술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 기술은 우리의 자아에 너무나 가까운 나머지 기술이라는 것도 종종 망각된다. 그 기술이란 문자때문에 발달한 언어이고 과학이다. 이런 기술은 분명 새로 나온 믹서기와는 다르다. 이런 기술은 분명 새로 나온 게임기와 다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은 발달한 AI의 등장에 이르면서 확실하게 자아와 무한히 가까운 기술을 등장 시킬 가능성이 크다. AI가 우리 주변의 자동차나 믹서기나 토스트기 같은 기계와는 다르며 이런 의미에서 AI는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AI는 자아와의 거리가 다르다. 우리는 언어 이전의 우리를 기억할 수 없다. 나이가 든 우리는 어린 시절의 나를 그대로 체험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자아는 하나다. 우리는 과학 이전의 우리를 기억할 수 없고 아마도 AI가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AI 이전의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기 때문에 컴퓨터나 인터넷, 스마트폰, AI같은 기술들은 특히 AI는 철학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문자가 등장했을 때에는 플라톤이나 공자같은 철학자가 필요했고, 과학이 등장했을 때에는 데카르트나 로크나 칸트같은 철학자가 필요했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자아를 바꾸는 도중에 인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런 새로운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 철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학을 종교적으로 보면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지게 된다. AI를 낡은 시대의 개념으로 보게 되면 거기서 우리는 또다른 악마를 보기 쉽다. 이때문에 지금도 온갖 미디어는 인류를 멸망시킬 악마가 AI라면서 그 위험성을 알리기 바쁘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윤리적 판단의 책임은 누가 지게 되는 것인지 같은 질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 

 

이렇게 자아는 하나다라는 사실과 기술과 자아간의 거리같은 개념없이 그저 신기한 기술은 신기한 미래를 만들 것이다라는 식의 접근으로 기술에 대한 철학론을 펼치는 것은 소모적이다. 나는 그런 지적들도 다 어느 정도의 의미는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철학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하는 일이 불필요하게 이뤄지면 그것은 백해 무익하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물리학자 소칼이 철학잡지사를 속이는 일이 일어났고 철학자들의 작업은 자기도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는 사기라는 주장이 있었다.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상대적인 진실이며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들이 과학자들에게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철학적 담론은 소수의 철학자들에게만 흥미롭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도, 기술의 이해에도, 과학의 발전에도, 과학의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이라기 보다는 정상과학에서 또다른 정상과학으로 비약하는 모습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나는 인간의 자아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자나 과학같은 새로운 기술이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될 때 인간의 자아도 하나의 정상상태에서 또다른 정상상태로 비약한다. 그리고 단 하나의 자아만을 가지는 우리는 그런 비약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래의 자아를 상상하기 어렵고 그 비약이 일어나고 난 이후에는 과거의 자아를 잘 기억하기 어렵다. AI 시대에 인문학은 이러한 비약이 만들어 내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과제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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