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즉 specialist는 사회의 보편성과 안전성에 크게 의지한다. 왜냐면 뭔가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남들이 쫒아오기 어려울만큼 많이 공부한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면 이런 안정성이 약해진다. 좋은 예가 전쟁이다. 전쟁은 사회가 굴러가던 방식을 단시간에 크게 바꾼다. 그래서 단단한 일상이 존재하던 전쟁이전에는 상당한 능력을 보였던 전문가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그 사람의 존재의미가 사라질 수 있다. 일상이 무너지면 일상속의 특수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었던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무기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면 전쟁이 났을 때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쓸모가 없다. 피난을 가야 한다면 재료도 구할 수 없는 고급 요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프로야구선수라는 직업은 프로야구경기가 없으면 당연히 의미가 없다. 전문가가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것은 장기적이고 위험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장기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들였는데 세상이 바뀌어 장기가 전혀 인기가 없어지면 나의 전문성은 무의미해질 것이고 나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가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위험해지는 것은 전문가만이 아니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래 흔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누적된 지식의 가치라는 것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길고 높게 쌓아올려진 지식들은 사람이 아니지만 전문가같은 성질을 가진다. 고정된 세상에서는 그 지식들이 가치가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것이 그런 지식들이다. 마치 소달구지는 먼지에 민감하지 않지만 컴퓨터는 먼지에 민감한 것처럼 고도로 쌓아올려진 지식들이란 매우 엄밀한 조건안에서만 작동한다. 물론 작동하면 엄청난 성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세상을 바꾼 것이지만 환경은 바뀌고 있다. 그래서 근대를 위한 근대교육도 당연히 가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보편성을 말하기 어려워지고 미래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요즘은 부모가 자식에게 인생에 관한 조언을 하기가 어렵다. 부모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공부하고 취직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조언을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다르다. 입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정년이 될 때까지 직장에 다녔던 부모는 요즘 아이의 상황을 완전히 착각해서 맞지 않는 조언을 하거나 아이의 상황이 자신과 다름을 알고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모르게 된다.
요즘은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인재일까? 맥킨지 같은 컨설팅 회사에서는 T자 인재를 말한다. 깊이 파고들어서 특정한 분야만 아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전문가스럽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T자처럼 한분야는 깊게 알면서도 얇은 지식이라도 넓게 가지는 사람을 T자 인재라고 부른다. 즉 단순히 전문가이어서는 안되고 일반론자이기도 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처음 1990년대에 나와서 2000년대이래로 널리 퍼졌다. 컨설팅이나 비지니스 분야는 환경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 분야다. 대학같은 곳에서 하는 학문과 현실 세계는 다르다. 현실에서는 학문을 하듯 뭔가를 체계적으로 쌓아나갈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전문가가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가장 먼저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최종적 답은 아니다. 얇은 지식을 넓게 가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게 가능했었다고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까? 빠르게 증가하고 변해가는 세상의 복잡성을 보면 T든 I이든 우리는 모두 하나의 점처럼 변해가고 있다. 즉 세상 전체와 비교하면 우리가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물론 분야에 따라 모든 전문가가 쓸모없지 않고 미래에도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 근대이래의 흐름이었다면 미래에는 전문가란 마치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역할 같은 것일 것이다. 즉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도 농업이 여전히 중요하고 농업을 지켜야 하듯이 전문가를 양성하고 지켜가는 일은 미래에도 중요하겠지만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미래가 요구하는 인재인가? 우리는 이제 기계같은 인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인재이든 지금의 교육이 말하는 인재는 종종 하나의 길고 긴 제작과정을 통해서 출고되는 제품같은 느낌을 준다. 즉 우리는 초중고를 나오고 대학을 졸업하면 이제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사회인이 될 준비가 된 것이고 그때 제대로 된 능력과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그런 가정을 교육에 깔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초등생은 미완성의 인간이고 20살이 넘고 교육을 마친 사람은 완성된 인간으로 여겨져서 독립되고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사람들은 다양한 교육들을 받는 것같지만 실은 매우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고 이런 상황의 문제점을 느껴서 이걸 보완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교육의 몸통은 초중고로 이어지는 공교육의 커리큘럼이고 그 안의 지식을 모두가 배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운전을 하려면 운전면허가 필요한 것처럼 사회인으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여겨지려면 정규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지식을 어디에 쓸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별로 생각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인재란 씨앗이 발아하여 묘목이 되고 나무로 커져가듯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인재다. 여기에는 완성이라는 개념은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른 재능과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르게 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에는 그들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고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 완성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이같은 기계적인 인재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 이유는 근대화가 기계화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될 때 그 기계의 부품이 될 인간들은 표준적인 성능과 모습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인간을 표준화시키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다. 비표준적인 규격의 인간은 시스템을 망치거나 쓸 곳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신과 정보처리가 빨라지면서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는 평균이나 표준따위는 별로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걸 위해 너무 긴 시간을 쓸 가치가 없으며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미 근대화는 지구 구석구석까지 도달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80억명의 인간이 똑같은 교육을 받으면 필요없는 부품의 과잉생산이 될 뿐이다. 빠른 정보처리는 빠른 최적화와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10년쯤 느긋하게 뭔가를 배우고 난 뒤 일좀 해볼까 하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10년뒤의 미래가 어떤 곳일지를 물어보면 그 대답이 막연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차를 모는 마부가 되겠다는 공부를 느긋하게 하고 있다가는 자동차의 시대가 오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질문하는 법, 스스로 성장을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살아있는 인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구해가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고 성장은 끝없이 계속되게 된다. 살아있는 인재는 T자든 O자든 누군가가 예전에 내놓은 답보다는 자기 자신의 질문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에서 보편성이 모두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는 사회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재는 두 가지 질문을 계속 해야 한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나를 둘러싼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떤 최종적인 답을 스스로 찾거나 어떤 뛰어난 인물에게서 받거나 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짚신벌레에게는 한방울의 물이 세계같이 느껴질 것이고 우주로 나간 우주비행사나 우주를 관찰하는 천문학자에게는 지구 전체도 작은 점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다르게 인식한다. 어떤 인식도 인간의 인식이므로 유한하다. 최종적 답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근대화가 되었다고 농업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듯 미래에도 근대적 지식의 효용성은 어느 정도 인정될 것이며 근대적 훈련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살아있는 인재를 위한 교육과 기계적인 인재를 위한 교육에 차이가 있다면 살아있는 인재를 위한 교육은 공부를 기본적으로 스스로 하는 것으로 여기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찾는 것이라고 권장할 거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학교졸업장이 아니라 경력이다. 초등학생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막지말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 실패하겠지만 실패가 가장 큰 교육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또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교육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그런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교육이 옳은가 하는 것은 절대적인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달린 것이다. 근대 사회라는 환경속에서는 근대교육이 옳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런 기계적이고 고정적인 모습을 하지 않는 시대에 근대교육은 시대착오적이 되어간다. 예를 들어 지금의 엘리트 교육처럼 어떤 정해진 코스를 쭉 달리면 최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은 점점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은 너무나 그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가 되어도 자신이 뭘 엄청나게 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태어나서 지식공부만 열심히 해서 25살이나 30살이 될때까지 공부만 해도 자신이 공부한게 확실히 쓸모있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과학혁명의 시대 이전에 신학이 학문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종교공부를 하던 과거의 신학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현대인들이라면 전근대적 교육을 받았던 과거의 사람들을 보면서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 증거가 있는 지식을 배우는 쪽이 시간낭비가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같은 것이 지금의 교육에 적용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객관적인 지식들이 이제는 쓸모없다는 말일까? 어떤 면에서 그렇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중요한 것은 객관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보가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직진을 해야 하는지, 좌회전을 해야 하는 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자동차의 역사적 의미와 구조적 특징을 말하면서 이것들은 아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이므로 중요하다고 떠든다면 운전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닥치라고 할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모두 옳아도 그 말들이 지금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된다면 나를 바꾸고 나의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너무나 많은 지식들을 전수하는데만 바뻐서 각각의 학생들에게 이걸 왜 배우는가는 묻지말라고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진행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지금 점점 더 실질적인 문맹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체감적으로는 근대에서 전근대로 시대가 거꾸로 가는 느낌조차 받는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다보니까 개인들이 만나는 문제들의 복잡성이 감당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물가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의 영향을 즉각 받는다. 물가같은 말은 통계적 배경을 가진 말로 실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우리는 지금 몇백명정도가 사는 마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80억이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점점 더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통계용어를 대충 쓰면서 산다. 세상은 점점 복잡하고 이때문에 법도 점점 복잡해진다. 우리는 날마다 앱을 설치하거나 전화기를 계약하거나 하는 일을 하면서 어딘가에 동의한다거고 사인을 하는데 그 사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기에 어떤 독소조항이 있는지를 누가 알겠는가? 이러면 내가 이론적으로는 계약서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점점 더 실질적인 문맹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이 너무 복잡해서 그 시스템 안의 인간이 그걸 파악할 수 없다면 비극이 생길 것이다. 교통법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도 교통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통사고란 확실한 미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두가지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둘러싼 이세계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이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파악하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걸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근대가 왔는데 전근대적 교육만 하면 비극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근대가 이미 지나가고 있는데 근대교육의 정신을 초월하지 못하면 비극이 생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AI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직업이 없어지고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교육은 끝나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교육이 등장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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