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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행복

by 격암(강국진) 2024. 10. 20.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외치는 편이지만 실은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자유를 원하는 것은 지금의 소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혹은 지금의 세계가 나를 속박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뜻이지 우리가 무한대의 시공간속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가족의 속박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회사나 국가 나아가 인류같은 어떤 그와 다른 어떤 집단에 대해서 소속감을 느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은 나의 삶은 이것을 위한 것이다라는 식의 목표의식이 있어야 지키기 쉽다. 그 목표란 사랑하는 자식을 보호하는 일일 수도 있으며, 사회를 개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남들보다 성공해서 나를 증명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내겠다는 학구적 혹은 철학적 동기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소속감이기라도 해야 한다. 아뭏튼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일이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마련인 여러가지 어려움과 곤란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만한 것이 되고 의미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현대인의 문제는 이 소속이 불안하다는 것 혹은 정체성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삶의 틀을 그냥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이혼도 흔해졌고 심지어 국적을 바꾸는 일도 흔해졌다. 그러니까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다던가, 직장을 다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던가 살던 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일은 더더욱 간단한 일이 되었고 우리는 이제 인연이라는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밉던 곱던 이것은 나의 인연이고 내가 안고 가야할 인생의 한 면으로 생각하는 일은 드물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배웠다. 특히 보다 부유하게 자라난 젊은 세대들에게 이것은 사실이다. 부유하다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어떤 결핍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일로 여긴다. 

 

그러나 행복과 정체성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같은 현실은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라기 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옛날에는 4지선다형으로 자 이중에 너의 인생이 있으니 골라봐라고 한다면 지금은 천가지 만가지를 늘어놓고 이중에서 골라봐, 너는 자유야하는 식인데 그러다보니 두가지 현상이 생긴다. 첫째로는 고르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한다. 둘째로는 골라놓고 다른 걸 골랐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 물론 이같은 일은 젊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정도의 문제일 뿐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는 일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정체성이 없고, 행복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로서는 내 경험에 의거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인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인 것같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때가 되었다는 걸 느끼면 용기를 가져라. 

 

뭔가를 사랑하는 것은 꼭 그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거나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지는 것은 국가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리학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은 물리학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 인생이며 나는 여기에 모든 걸 걸겠다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우리는 자기의 선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견딜만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주의에 물들어 진로를 돈으로 종종 평가하는 요즘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람은 백만원 벌면서 행복하고 천만원 벌면서 불행할 수 있으며 대개의 경우는 불행하면 그걸 잘 못하고 계속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성적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돈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돈돈 하다보면 돈 버는 기계가 되고 사실 그 돈은 다른 사람이 쓰게 된다. 돈 버는 기계는 돈 쓸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즉 이 땅을 떠나서 이 땅을 잊어버리고 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것이고, 이 사람을 떠나서 잊어버리고 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옆에 있는 것이며, 이런 일들을 잊어버리고 다른 걸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자꾸 하는 것이다. 왜냐면 사랑하니까, 인연이니까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내 글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애국심을 가지기를바란다. 그 촌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 감정이 실은 우리에게 정체성을 주고 행복을 준다. 이 땅이 너무나 못나보이고 욕할 것이 많아도 그래도 나는 이땅에서 살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땅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소속감과 관심이야 말로 행복의 근원이다. 국적따위 신발 바꿔신듯 하는 사람도 행복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나는 일찌기 공부의 방향을 인공지능으로 바꾸면서 물리학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물리학을 사랑한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물리학을 사랑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어린 나는 물리학이 세상 모든일에 정확한 답을 주는 그런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짓과 모호함이 넘치는 세상에서 물리학은 너무 아름다워보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는 물리학을 전공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과학책들을 열심히 읽었으며 수학에 몰두했다. 나는 일찌감치 스스로를 과학자로 생각했다. 감히 아는 것이 없던 어린 시절 그걸 입밖에 꺼내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대로된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걸 공부하면 나중에 어디에 취직할 수 있을까라던가 물리학 전공자가 돈을 얼마나 벌던가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리학 공부로 부터 멀어진 지금도, 그리고 물리학이 꼭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그렇게 뜨겁게 물리학을 사랑했던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인생에 방향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느라 시간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처럼 내게도 있었던 수 많은 어려움과 실망들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내가 평생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경험과 지식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하면 또 잘한 일은 그 물리학을 떠난 일이었다.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 인공지능과 관련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부의 방향을 그리로 바꿨다. 그래서 새로운 삶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사랑할 만큼 사랑하고 아니다 싶을 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리저리 기회주의적으로 기웃거리고 뭘 선택하든 후회하는 것과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인생에 후회가 없다. 사랑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수 많은 길 중에 하나의 길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걸 아는 나는 과거에 대해 후회가 없다. 그러나 기회주의적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만 하는 사람은 뭘 선택했든 후회한다.

 

그런 사람은 종종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그걸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확신에 차있고 후회가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결핍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의 길을 걷기 보다는 부모같은 사람들이 어떤 보편논리, 객관적 논리에 따라 이것저것 결정해 주고 (심지어 너는 잘 모르지만 이라는 말까지 꼬박꼬박 들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른다라는 것만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내 마음 나도 모르니 사랑도 모른다. 사랑이 없으니 계산이 있을 뿐 소속이 없고 소속이 없으니 행복이 없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거기 왜 가야 하는 지도 모르고 지나치게 빨리 빨리 속성으로 키워졌다. 그리고 나서 정체성의 문제를 겪는다. 이건 정도의 문제일뿐 누구나 겪는 문제이기는 하다. 누구도 환경의 압력없이 자기 의지대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너무나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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