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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청춘의 꿈

by 격암(강국진) 2025. 3. 2.

가족과 함께 드라마 정년이를 보다보니 청춘의 꿈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년이와 같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세계는 대개 내 주변의 친구들이나 혹은 가족이나 친척들로 이뤄진 세계로 어느 세계나 그렇지만 그 세계 안에서 유독 반짝이고 멋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세계의 주인공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외모가 출중하거나 공부를 잘하고 유식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잘하거나 본래 타고나기를 왕자나 공주처럼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춘의 꿈은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된다던가 학자나 부자가 되는 것처럼 당장은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작은 세계에서는 누가 봐도 어떤 꿈이든 그 주인공같은 사람들이 먼저 닿을 것같이 느껴집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었던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지요. 그들을 동경하고 부러워 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스토리에서 삭제되어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조연들 같은 역할이라고 스스로를 느꼈을 겁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과거를 돌아보면 두 가지 감정이 다 느껴집니다. 하나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때는 별로였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어서 사탕을 두고 싸웠던 시절에 대해 돌아보면 그 사탕이 참 대단해 보였는데 이제보니 그 사탕이 대단치 않다는 것도 압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그 강도가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사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여전히 그 사탕을 쫒습니다. 그 행동은 그 어린 시절의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가족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들에게 이겨도 그리 기쁘지 않은데 언니에게 이기고, 어린 시절 친구였던 사람에게 이기면 대단한 기쁨을 느낍니다. 왜냐면 어린 시절에는 그 언니와 친구가 노벨상 받은 사람처럼 대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공주님같았던 누구보다 더 비싼 차와 가방을 들고서 우아함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삶의 소원이 달성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주인공이었던 사람은 반대로 자신이 대장이고 왕자였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그 시절의 인물들 사이에서 계속 잘난체 하면서 사는 거이야 말로 삶의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살게 되는 요즘 세상에서는 그건 어려운 일이죠. 그게 계속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 이런 사람은 정신적 위기가 옵니다. 한껏 부풀려서 자신의 허상을 유지했으니 그게 무너지는 것은 자아의 붕괴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를 지킬 힘이 없어 집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세상이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하는 일이 만드는 파탄 같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으며 무엇보다 끝이 있습니다. 즉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식으로 대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런 이야기 구조에서는 조연이 주인공에 비하면 가치가 없고 주인공은 계속 잘 살것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하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살아있으면 이야기는 계속 되기 마련입니다. 멋진 남녀가 어려움을 뚫고 같이 살게 되면 그 다음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고 인생이 요약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매력적이었던 어떤 것이 지나고 나면 유치하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변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해도 그 주인공은 계속 주인공다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그 어린 시절을 부정하는 힘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그 어린 시절을 되도록 잊어버리려고 하고 그때를 경멸의 감점으로 대합니다. 그 시절의 말들과 감정을 모두 아주 유치하고 가치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린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인정하면 자신이 다시 그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하나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자기 과거의 어떤 주관적 감정이나 가치를 부정하면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뭐가 그리 절대적이고 대단하냐는 허무주의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동네 골목 대장 뽑던 시절을 비웃으며 자기는 지금 사장이내 정치가네 하는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자기 모습도 결국 동네 골목 대장 뽑기나 마찬가지라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에는 여기 문제라는게 있는가, 사는게 본래 그런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더 크고 넓은 세계에서 더 많은 기억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과거를 유달리 강조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의 저는 인생은 마치 배우의 삶과 같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즉 과거에서도 어떤 역을 맡았고 지금은 다른 역을 맡고 있는 것과 나의 진정한 정체성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장군 역을 맡았다고 진짜 장군이 아니고 조연을 맡았다고 그 본질이 조연이 아니듯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완전히 내 자신을 결정하고 내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아닌 것같습니다. 다만 그때 그때 나에게 주어진 역을 열심히 할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거와 현재를 모두 함께 수용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저 역할이었으니까요. 가게 종업원이라고 해서 가게를 나와도 종업원은 아닌 것처럼 불이 꺼지고 무대가 끝나면 더이상 그 과거의 정체성은 없는 겁니다. 다만 경험이라는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죠. 나이가 들면 그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한 필모그래피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때로는 주인공 하던 영화보다 엑스트라하던 영화가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정말 이 모든 삶의 경험을 넘어서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왜 존재하는가? 생각해 보면 이런 감정은 스스로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같습니다. 저는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과거를 바라보면서 그거 다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명해 지는 거 좋은 거 아니라고 말해도 누가 박수치고 알아봐주면 저는 괜히 들뜨겠죠. 아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그 사람이 죽으면 슬프겠죠. 그래서 삶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같습니다. 잘난 척 하지만 결국 나는 유한하고 어떤 때는 어린애같고 어떤 때는 동물같고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저는 유한하지만 세상은 무한합니다. 그러니 내가 다 모를 뿐 사실 모든 삶의 이야기들은 작디 작은 겁니다. 마치 물한방울 속에서 사는 생명체가 온 세상을 알았다면 물한방울을 무시할 수 없는 스스로의 작음을 알지만 동시에 물한방울이 얼마나 작은가를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스로가 유한하다는 것은 이런 세상의 무한함을 내가 말하고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같은 역사속의 인물은 그 그림자가 워낙 엄청나서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에 누군가와 주먹싸움에서 졌다거나 술싸움이나 사랑싸움에서 졌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몇천년 후의 사람도 기억할 사람인데 그에 비하면 소크라테스의 주변 사람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그런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소문처럼 정말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녀였다면 그 아내는 자기 남편을 알지 못했겠지요. 

 

우리는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고개를 들어 전체를 보려고 해야 합니다. 하루도 소중하고 1년도 소중하니까요. 청춘도 소중하고 장년도 중요하니까요. 어른들은 자꾸 자신의 관점으로 아이들을 말립니다. 작은 세계는 안 중요하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삶에 기쁨이 없을 겁니다. 사람은 결국 늙고 죽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 허무하죠. 자신의 관점이 오직 하나뿐인 절대적 관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린 시절을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그와 다른 지금도 사랑하고, 세상의 무한함을 느끼면서도 지금의 삶도 사랑하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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