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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아이와 오래된 뇌 그리고 철학의 재구성

by 격암(강국진) 2025. 4. 18.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는 어떨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어릴 적 그 아이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른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뒤덮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의 그 아이는 어른의 정신으로 완전히 교체되는 것일까? 이같은 생각은 일종의 문학적 표현같지만 뇌에 대해서 소위 3층뇌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단순히 문학적 비유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층뇌 이론이란 1960년대 폴 맥린이 제안한 개념으로 해석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진화론적으로나 현대뇌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되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뇌는 3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각각 뇌간(혹은 파충류뇌)-변연계(구포유류의뇌)-대뇌피질(신포유류의뇌)로 구성되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더 원시적인 기능을 담당해서 뇌간은 호흡과 심박, 본능적 행동을 다루고, 변연계는 감정, 기억, 사회적 행동을 다루며 대뇌피질은 고등한 사고, 언어, 논리적 사고를 다룬다. 이같은 구분에 논란이 있는 것은 뇌는 사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기능이 그렇게 딱 구분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같은 구분은 옳다고 인정된다.



이 구분을 보면 마치 인간의 뇌는 점차 과거의 뇌위에 더 고등한 뇌를 뒤집어 씌운 것처럼 발달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사회적 활동을 하고 감정을 가진 포유류도 그 바탕에는 본능과 기본 생리활동을 주관하는 뇌를 가진 것이고 포유류의 뇌 위에는 인간에게서 발달한 고등한 정신 작용을 보여주는 대뇌피질이 덮어씌워 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아이의 정신이 사라지고 그것이 어른의 정신으로 대체된다기 보다는 어린 아이의 정신 위에 어른의 정신이 덮어씌워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여전히 우리의 깊은 무의식속에서 어릴적 그대로 남아 있는 정신은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어른의 정신이 가리고 있고, 조절하고 있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어릴 때와 다를 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합리화에 아주 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어떤 여자가 보고 싶어서 학교에 가면서 그러한 감정을 숨기고 나는 학교에 볼 일이 있다고 말하는 식의 행동을 한다. 이런 거짓말은 아주 흔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스스로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의 원인을 잘 모르는 일이 많다. 그래서 평생 옷을 잘입는 일에 집착한다던가 부모님의 인정을 받는 것에 집착하는 것에는 어떤 어릴 적부터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작동한다는 식의 설명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우리의 뇌의 구조나 개인으로서의 우리 정신의 구조가 이러하다는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인 주장은 서로 비슷한데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철학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는 주장이 있다. 세계 1차 대전이후 철학의 재구성을 쓴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철학의 기원을 정서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즉 우리는 본래 어떤 원시적이고 단순한 욕망과 감정을 통해 생각들과 관념들을 가졌는데 철학자들은 그걸 하나의 일관적인 형이상학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한가한 시간에 짐승의 생각을 하고, 사냥의 생각을 했을 텐데 그것이 원시적인 종교와 제례가 되고 그런 신화는 다시 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이 세계에 대한 일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 듀이의 주장이다.



결국 학식높은 철학자가 나타나기 이전에 우리안에 있던 원시인의 생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해서 합리화된 것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리화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경험에 의해 부정되거나 그런 이상한 생각이 우리를 멸종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의 발달같은 이유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경험의 조화를 추구해야 할 강한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경험에 기반하여 진리를 찾지는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수정해서 그 경험이 말이 되는 것이 되도록 한다. 이것은 과거와 새로운 경험의 타협이라고 할만 하다. 문자의 사용이 흔해지고 문명이 시작되던 플라톤의 시대, 공자의 시대에 바로 이런 타협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타협은 과학혁명의 시대에 다시 한번 위기를 얻는다. 더 엄밀한 측정에 기반하고 더 많은 정보를 모으게 된 과학혁명의 시대에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믿음은 위기에 빠진다. 그래서 서구 철학자들은 다시 한번 타협에 나선다. 그것은 철학이나 윤리의 영역과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이다. 인간의 정신은 물질 너머 있다는 것이다.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은 세계 대전 이후에 출판된 것으로 그는 발전한 기술로 치뤄진 세계 대전의 끔찍한 참상속에서 과학기술은 발달했으나 정신은 그에 걸맞지 못한 인류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신도 과학적 방식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재구성이다. 과학적 개조란 좀 끔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결국 과학이론처럼 윤리나 철학도 경험과 가설, 검증을 통해서 새롭게 개혁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지 과거로부터 내려온 관념을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여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철학이 쓸모 있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그 철학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경제, 사회와 연결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근대화로 그때는 과학과 철학이 조화를 이뤄서 산업혁명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백년전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의 기획은 20세기에 흔했던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찰스 스노는 1959년에 두 문화라는 강연을 통해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을 이야기했고, 1965년에는 브로노우스키가 인간의 정체성이란 책을 발간했다. 피시어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974), 윌슨의 통섭(1998)등도 이에 관한 책이다. 결국 이 문제는 현재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 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 관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대 문명이 가진 한계에 관한 것이고 이때문에 모순이 점점 더 쌓여간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근대사회는 과학적 논리에 의해서 점점 더 구축되어가는데 인간이 감성적으로 그걸 접근하기에는 그 복잡성이 이젠 너무 크기 때문이다.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이후 철학자들은 이 재구성작업에 열중했을까? 그렇지 않다. 분석철학은 개념의 정확성과 언어게임에 집중했고 대륙철학은 철학 자체의 해체에 집중했다. 그래서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흐름과 연결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듀이의 바람과는 달리 더욱 더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어쩌면 듀이의 기획은 우리안의 사라지지 않는 아이처럼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문제를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듀이는 과거의 윤리와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타협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 과거의 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없애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을 합리적인 경험과 가설과 검증의 방법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따금 어른스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어린 정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고 청소해서 온전한 어른이 되자는 말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뇌를 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새로운 표층을 하나 더 하는 것일 수 있다. 말했듯이 우리는 문자를 쓰면서 수렵채집인에서 문명인이 되었지만 원시인의 감성을 다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과학혁명을 지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철학은 여전히 우리안의 원시적인 그것을 남겨두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그 원시적인 철학이란 우리의 DNA에서 나오는 착오내지 본능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순수하게 정화할 수 없다는 말이 우리가 영원히 짐승으로 남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식욕이나 성욕이라는 욕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문명인으로 사는 것은 그러한 욕망위에 새로운 우리를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음식을 훔치지 않고 대책없이 성욕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면 욕망을 가진다는 것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선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핵심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 더 중요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짐승이나 원시인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문명인이다. 



과거의 철학은 결국 원시시대로부터 내려온 우리의 어떤 원시적 철학을 다 해소하지 못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정화되어 과거를 버리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철학은 인문학을 완전히 과학화하는게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완전히 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이고 새로운 신피질이다. 그것이 과거의 사고, 과거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르게 행동하게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근대인도 전근대인과는 다르게 행동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철학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토대가 바뀌었기 때문이고 플라톤이 설던 문명의 초창기에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근대의 새로운 철학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환경에서 만들어 진 새로운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근대의 모순이 쌓여가고 있다. 세계대전을 겪은 듀이는 그래서 근대철학자들이 만든 타협으로는 인간이 과학을 다룰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정화는 불가능하다. 나는 AI가 새로운 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구포유류의 뇌 위에 신피질을 가졌듯 새로운 신피질을 지금의 신피질 위에 뒤집어 씌우고 살게 될 것이다. 물질적으로 그럴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말이다. 그 신신피질이 바로 AI다. 이 시대를 위한 새로운 타협이야 말로 듀이가 다 이해할 수 없었고 예견할 수 없었던 재구성된 새로운 철학일 것이다.  이 말은 근대 철학이 과학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듯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철학은 AI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그것은 훗날 AI가 가져온 영향력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지키고자 만들어 진 새로운 타협점으로 여겨질 것이다. 원시인에서 전근대인, 근대인 그리고 그걸 넘어 AI 시대의 인간의 정신이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룰 타협말이다. 



3층 뇌 이론은 우리의 정신이 과거의 본능 위에 새로운 층을 덧씌우며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듀이는 철학이 이러한 정신을 과학적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완전한 정화는 불가능하다. AI는 새로운 신피질로서, 과거의 본능과 현대적 합리성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철학적 타협을 이끌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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