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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우리는 좋은 왕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by 격암(강국진) 2025. 7. 22.

우리가 조선말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세계는 근대화로 변해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봉건사회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좋은 왕을 찾아서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한다. 이럴 때 조선이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좋은 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에도 일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봉건국가 시스템 자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아무리 좋은 왕이 있어도 근대 사회로 변해가려는 세상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좋은 나라를 만들려는 의도가 존재해도 그걸 봉건사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한 한계는 명확하다. 

 

요즘 세상을 보면 자본주의, 민주 공화정, 은행, 정부, 대학등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물론 그걸 더 잘 작동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은 이미 수십년이상 반복된 것으로 앞으로도 상황이 더 좋아질 것같지 않다. 말했듯이 이런 예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이런 예 중의 하나인 대학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 대학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몇가지만 이야기해 보자. 나는 그리고 나서 이런 이상으로부터 현실은 벗어나 있으며 앞으로 더더욱 그렇게 될 것같다고 말할 것이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은 학문에 대한 치열한 노력으로 채워져야 하고 그 학문적 잣대는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사회가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고 말할 것을 강요한다고 해도 대학은 학문적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에 와서 학문을 배우고 그 학문이 세상을 이끄는 길잡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세상보다 대학이 더 앞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의 문화나 지식은 아직 바깥 세상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미래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은 학생으로 하여금 대학 바깥의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대학교수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학교 바깥의 일반인보다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있을 것이 기대된다. 

 

말했듯이 지금의 대학은 이런 현실로부터 이미 크게 벗어나 있으며 그같은 점이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기업인 팔란티어같은 기업에서 대학졸업장이 없어도된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즉 대학이 가르치는 것이 실제 기업이 원하는 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대학 졸업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대학교수들은 상당수가 오히려 세상물정을 모르는 바보같이 느껴진다. 그들은 시대에 뒤진 종교단체에서 수도하던 종교인같다. 그들이 이 세상을 제대로 운영하는 법을 알거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가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만 봐도 분명하다. 대학이 지금 사회적 잣대를 떠나 학문적 진실만을 추구하는 곳인가? 예전에 군사독재시대에도 대학은 학문적 진실을 추구한다고 할만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위협이 없어도 그게 사실이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김건희 학위 사건으로 그것이 분명해 지지 않았는가? 윤석렬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의 논문이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해 줄 수 없는 졸업논문이라고 밝혀진 뒤에도 그걸 취소하는 일이 몇년이나 뒤로 미뤄진 이유는 뭘까? 결국 돈이고 사회적 영향력이다. 수없는 교수와 졸업생들이 그것이 부끄럽다고 말해도 대학은 학문적 기준을 지킬 수 없었다.

 

본래 대학은 독실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의 장소와 비슷했다. 따라서 사회적 기준이 통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연구를 하고, 대학을 더 물질적으로 크게 만들려는 경향에 따라서 지금의 대학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대학은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이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는 주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줘서 권위를 팔아먹는 집단에 가깝게 되었다. 거대 기업이나 정부가 뭘 요구하면 기꺼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기업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사업체같은 곳이 되었다. 

 

예를 들어 본래 대학은 취업기관이 아니다. 대학의 학문은 취업을 위한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과거에 취업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이 사회의 미래를 선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따라서 대학졸업생들이 취업이 유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대학은 철저하다 싶을만큼 취업 준비 학원처럼 되었다. 그래서 졸업후 취업률이 그 대학의 평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되었고 대학 이름보다 의대처럼 졸업후 직장을 보장하는 학과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대학 졸업장이 점점 더 취업에 도움이 안되고 있다.

 

이것은 그 근본적 원인이 대학이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학이 사회를 선도하는 문화나 지식을 대학생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지식의 독점적 공급처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을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인공지능을 통해서 첨단 지식을 얻는다. 그게 아니라도 각종 매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모를 것도 아니고 반대로 대학에 갔다고 해서 꼭 첨단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우리가 다시 본래의 대학의 이상으로 돌아가자고, 더 좋은 대학을 만들자고 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그것은 마치 더 좋은 왕을 뽑자는 말과 같다. 실은 대학교육은 현대 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성격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학술적 이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학이 학문을 위한 기관이라는 본래의 의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문이란 거대하고 엄밀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 사람들은 각종 지식에 대해서 훨씬 더 엄밀하게 훨씬 더 기초적인 것부터 배운다. 문제는 이 학문적 지식의 체계라는게 이제는 너무나 엄청나게 자라난 나머지 학문적으로 학습한다는 태도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뒤쳐지게 만드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말했듯이 거대하고 엄밀한 지식체계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초를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수분해가 뭔지 모르는데 배울 수 있는 양자역학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몇년을 보내도 실은 그 기초라는 것을 조금 보다가 마는 정도에 멈추고 말기 쉽다. 지식의 최첨단 즉 최첨단 학문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런 학문의 현실이 무색하게 세상은 한해가 다르게 무섭게 달라진다. 챗GPT 3.5가 나온 이래 세상은 인공지능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대학같은 곳이 불과 몇년만에 그렇게 바뀔 수가 있었을까? 거기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몇년만에 확 바뀌었다는 말인가? 세상이 변하는 속력과 복잡성이 폭발하는 시대에 대학은 이제 오히려 뒤쳐지고 있다. 세상이 달려나가는 속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학은 그걸 뒤쫒아서 허둥대기 일쑤다. 지금 세상의 첨단은 오히려 거대 회사들이 독차지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구글이나 테슬라에서 인턴이라도 해봤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첨단에 대해 알 가능성이 있지만 대학을 몇년 다녀본 사람은 반세기나 한세기 이상된 낡은 지식을 조금 들어 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쓴 사람이 사회에서 정말 도움이 될까? 철저하게 전문화된 학문의 세계에서 교수들은 종종 자기의 지식분야에만 전문적이다. 즉 뒤집어 말하면 많은 분야에 있어서 오히려 대학 바깥의 일반인들보다 모를 수도 있다.  

 

이렇게 지금의 대학이 가지는 문제는 대학총장이 부패했다거나 대학안에 일시적으로 나쁜 문화가 생겨나서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 세상의 복잡성과 변하는 속력이 전과 다르다는 사실같은 것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학문적 진실 앞에서 우리가 더 엄정해 지자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지금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학문으로 세상을 운영하고 선도하고 바꿔나갈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걸 잘보여주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대량의 데이터에서 답을 찾아낸 답이다. 거기에는 학문적 구조나 명확한 논리적이고 인과적인 관계가 없다. 누군가가 호떡을 판다고 할 때 학문적 답이란 호떡 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떤 체계를 만들어서 호떡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답을 내는 것이라면 인공지능은 그냥 대량의 데이터를 통해 지금 이순간 호떡장사를 어떻게 하면 더 잘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이상이라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이고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근대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근대정신이란 기계적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앞으로는 대학이 전혀 쓸모 없다는 말은 아니다. 21세기에도 종교가 존재하듯이 미래에도 학문은 존재할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기계화된 시스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가장 첨단에서 바꿔가는 것은 그런 체계화된 지식의 세계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대표하는 새로운 데이터에 기반한 새로운 창조일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 나는 그걸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제까지는 직업의 시대, 노동자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기업가의 시대, 창업가의 시대라고. 지금까지는 세세한 지식을 가지고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일을 해내는 사람이 필요했지만 지식이 흔해지다 못해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에게 퍼지는 상황에서는 뭐가 쓸모 있고 가치있는 일인가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는 내가 앱을 만들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개발하자면 돈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AI에게 부탁하면 앱을 만들어 주는 시대에는 우리는 뭘 해야 할까? 기뻐하기만 하면 되나? 사람들은 AI가 앱을 만들어 준다고 기뻐하지만 그럼 무슨 앱을 만들거냐고 말하면 대부분 침묵한다. 정작 중요한 비지니스 모델, 앱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 왜냐면 기존의 교육은 대개 코딩기술처럼 기술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단사원처럼 일하도록 교육받았지 경영자처럼 어떤 앱을 개발하는데 투자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 

 

이런건 거의 예술 교육과 비슷한 교육을 요구한다. 아니 그건 교육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동화다.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문화에 대한 동화. 그런데 지금의 초중고나 대학에서 하는 교육은 시스템을 차근히 따라가라고 말하면서 창의적 예술 감각을 억누르도록 시킨다. 남과 다른 건 억누르고 표준화된 생각을 하도록 가르친다. 그런데 그런 교육의 끝에서 세상으로 나가보면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기 쉬운 일이다. 그러니 일자리가 없거나 저임금일 수 밖에 없다. 

 

조선말엽에는 사람들이 유교공부를 했다. 지금와 보면 유교서적을 공부하는 것이 근대화 시기에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 싶지만 유교공부도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맞다. 그것만으로는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다. 그리고 아마 20년만 지나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도 물론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 대학의 낡은 이상을 떠올리며 학문적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지금의 대학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왕이 근대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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