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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아이의 머리를 비워라.

by 격암(강국진) 2009. 10. 19.

내가 대학생 무렵일때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다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신 옛날 분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시던 할아버지는 달변하고 거리도 멀었고 뭔가를 조리있게 말씀하는 일도 없었다. 사실을 말씀 자체를 그다지 많이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보면 매우 지혜있고 통찰력있는 말을 하시는 일이 있어서 나는 이것이 소위 세월의 지혜인가보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에 대해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위 현대교육이란 것이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현대교육에 영향받지 않은 할아버지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보여준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육이라는게 뭔지 아무런 가정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커다란 가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성적이어야 하고 지식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는 가정이다. 그래서 책을 백권읽은 사람은 한권읽은 사람보다 뛰어나고 시험성적이 백점인 아이는 80점인 아이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란 아이에게 더 많은 지식을 쌓게 하고 시험성적을 더 올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은 항상 맞지는 않는 말이다. 윤리적인 것이 따로 충족된다고 쳐도 그렇다. 아이는 문제의 답을 외우기 보다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는 힘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고 다수의 이어지지 않는 불균형한 지식보다 전체적인 규칙아래서 통일된 지식체계를 가지는것이 필요하며 그러면서도 어떤 특정한 지식체계나 사상에 절대적으로 빠져들지 않는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대 한국의 교육은 이것들에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여러차원에서 설명이 될수 있지만 내가 익숙한 컴퓨터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컴퓨터 산업의 큰 목표중의 하나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나오자 마자 사람들은 인간처럼 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를 바랬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가져야 할 중대한 성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일반화 능력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그저 가능한 모든 상황을 써놓고서 그경우 컴퓨터가 해야할 일의 목록을 나열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그 목록에 없는 일이 발생하면 고작해야 무능을 고백하거나 에러라고 화면에 경고문을 띄울 뿐이다. 아니면 그도 못하고 기계가 멈춘다. 


일반화 능력은 주어진 데이터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냄으로서 만들어 진다. 보다 뛰어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바로 이 규칙을 찾아낸다. 그래서 경험된 데이터에 없는 상황에서도 가능한 답을 찾고 그것을 실행한다. 20세기 후반 머릿속의 신경세포가 하는 일을 흉내내서 만들어진 인공신경망이 연구되기 시작했을때 사람들은 저절로 원칙을 찾아내는 기계가 나왔다면서 곧 인간같은 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이 만들어질거라고 기대에 부풀었다. 이것이 기계학습이라고 불리는 분야다. 


그런데 규칙을 찾는다는게 문제다. 주어진 데이터를 만족시키는 규칙은 사실 무한대로 많다. 그 많은 규칙중에 어느 것이 좋은 것인가.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선택규칙이 도입되는데 이것은 주어진 데이터를 만족시키는 규칙중에서 가장 간단한 규칙이 제일 좋은 규칙이라는 선택 원리다. 


아 그럼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최소한 두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문제는 창의력이라던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만든다. 한가지 문제는 노이즈 혹은 소음의 문제다. 현실에서는 항상 주어진 데이터는 노이즈를 가지고 있거나 틀린 정보를 포함한다. 예를 도둑이 누구인지를 추리하는 문제에서 여러가지 단서가 주어졌는데 그 단서중의 하나는 틀린 단서일수 있다는 이야기다. 증인중의 하나가 잘못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주어진 데이터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는 규칙이 항상최고의 규칙이 아니다. 어느 정도 오차범위를 주고 간단하게 대개의 데이터를 설명해 내는 규칙이 좋은 규칙이다. 그런데 이 기준이 애매하다. 


두번째는 소위 국소적 최소점문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몇개의 좋은 규칙을 찾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훨씬 좋은 규칙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 규칙을 찾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어도 규칙을 찾는 처음에는 세세한 것을 무시하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적절해 보이는 규칙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최고의 답을 조금씩만 개선해서 더 좋은 답을 찾으려고 하면 그런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국소적 최소점 문제다. 


생각해 보자. 오늘날 아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쉽게 다량의 지식이 주입된다. 그들이 이해했다기 보다는 이해하는 방식조차 주입된 것이다. 수많은 참고서가 있고 수많은 학원이 그런 일을 해주고 있다. 이것은 아이들을 저질의 프로그램처럼 만든다. 그들은 그들이 외우고 있는 문제와 답들 중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빨리 답을 말할수 있다. 시험에 배우지 않는 것이 나오면 학부형들이 나서서 고소라도 할판이니 시험에 그런 질문은 없다. 그러나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이 들어오면 바로 에러를 내거나 고장이 난다. 전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며 이것은 거꾸로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그렇다. 너무 많이 배우는 가운데 본래 가지고 있던 지능의 어떤 한쪽이 오히려 퇴화 된것이다. 


현대 교육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알수 있는 방법은 조선시대의 교육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결코 조선시대의 교육이 현대교육보다 모든 점에서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시대는 서양학문이 들어오기 전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이 행해지기 전이었다. 서양식의 사고방식 특히 어설프게 이해한 서양식의 사고방식에 기반한 교육의 해악이 행해지기 이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옛날 교육을 생각해 보면 알수 있는 것은 일단 책이 몇권 없다. 게다가 글자도 몇개 안된다. 노자나 대학 중용을 보면 작은 글자로 쓰면 몇페이지면 끝이 날정도다. 그걸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아인쉬타인이 썼다는 작은 책자 한권을 중고등학생때부터 읽고 읽고 읽어서 뜻을 알아내려고 버둥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그때는 종이가 비쌌다라던가 그때는 사람들이 무식했다라던가 그때는 주자나 공자같은 사람을 신처럼 섬겨서 그렇다고 말할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쳐놓고 그렇게 교육이 일어날때 무슨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럼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가를 좀더 쉽게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인의 말씀을 읽고 또 읽는다. 줄줄 외우지만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당시에 책이란 당연히 수백 수천번을 일고 새겨야 하는 것이며 공부란 본래 그런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이는 일종의 수련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나름대로 답을 찾는 수련을 하는 것이다. 공자 해석이라는 교과서를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거치면서 줄줄이 외워서 드디어 대학에 가서 논어를 보는 그런게 아니라는 말이다. 


장자와 노자를 십년을 읽는다. 그래도 뭔가 이해못한 뜻이 있는 것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뜻이 이해되고 내가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이해한다. 고전을 자주 읽는 사람은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한다. 이것은 인공지능 연구에서 국소적 최소점 문제를 해결한 것과 비슷한다. 최소한의 정보를 가지고 여러각도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니까 그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교육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세세하게 길을 닦아 놓고 그길로 가라고만 한다. 그길은 지름길일지 모르지만 결국 빠져나올수 없는 감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감당하기에 지나친 너무 많은 정보를 결국 따지고 보면 독단적으로 주어진 관점 즉 학교선생님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머리를 채운 아이는 이제 창의력을 잃는다. 


현실에서는 증인중의 하나가 거짓말을 했다가 답일수 있다. 이런 '아웃 오브 박스'식의 발상이 안나온다. 학교시험지에서 그렇다는 것은 선생님이 문제를 낼때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그럴리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기성 시스템에 대한 권위를 학습한다. 그 권위는 틀릴리가 없다. 그럴리가 없다. 딱 사회로 나가서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으로 큰다. 그리고 소위 창의력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분야에서 좋지 않는 사람으로 큰다. 


서양식의 사고는 정확한 정의에 근거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플라톤식이며 뉴튼식의 이사고는 이미 서양현대철학자들에게 부인되었고 그 대표주자가 화이트헤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서양에서는 이미 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유행했는데 그게 1960년대 히피문화 이후에 나온 것이고 불교같은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커진것이다. '아웃오브 박스'식의 사고가 필요하다는 유행도 나온지가 한참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들이 나오고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대중에게 까지 그런 생각이 퍼지질 않고 특히 교육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득권에게 이해가 안되고 있는것 같다. 그 와중에 교육에 투자할 돈은 많아지니가 이제는 초등학생부터 온갖 교육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교육이 30년전의 교육보다 좋은 점도 있지만 더 나쁜 점도 있을수 있다. 철학적으로 깊이를 달성하지 못한채 돈만 많아지는 것은 어린 아이가 자동차를 모는 것과 같을수 있다.  


아이는 여러가지가 필요하다. 부모와의 인격적 정서적 교감이 필요하다. 아이에게는 적절한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 문제를 스스로 풀수 잇는 능력이 자라나도록 시련이 주어져야 하고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속에 바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도 있다. 신라시대 화랑은 산으로 가서 호연지기를 길렀다고 한다. 그게 무슨 교육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게 교육이 아닐까? 한국에는 뭐에 쓰는 지도 모르는 잡동사니로 머리를 가득채운 헛똑똑이만 가득한거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쓰도록 하자. 쓰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래서 답이 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산으로 가라던가, 이러저러한 교과서를 쓰라던가 생활계획을 이러저러하게 짜라는 구체적 내용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고 싶은 사람은 이 글의 요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점을 이해하면 답은 스스로 만들어 낼수 있고 그래야 한다. 산에 간다라는 것이 무조건 답이 아니다. 어떻게 가는가, 누구와 가는가, 산에 가지 않을 때에는 무엇을 하는가와 같은 다른 문제와 다 연결이 되어 있다. 모든 아이는 말하자면 모두 서로 다른 질병에 걸려있다. 모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병통치 약방문을 들어다가 자기 아이에게 먹이면 좋아질까? 그런 약방문은 고작해야 체조하면 좋고 목욕하면 좋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뿐일 것이다. 이해를 하는 사람이 아이를 사랑하고 관심이 많은 사람이 그래서 아이의 상태와 마음을 느낄수 있는 사람이 적절하게 반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한 이름도 가지고 있다. 그걸 우리는 스승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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