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1
사실명제는 가치판단을 낳지 않는다.
사실 명제는 그 자체로 가치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제 아무리 당연한 것이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첫번째 명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예를 들어 핸드백 두 개가 있는데 한 사람이 더 싼 걸 골랐다고 합시다. 비싼 것과 싼 것중 싼 것을 고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요? 낮은 가격이 더 좋다는 것은 당연한 판단같고 따라서 낮은 가격이라는 사실은 어떤 가치명제와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두 개의 가방중 싼 것을 고르는 것은 당연한 가치판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으로는 다이아와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도 없으면서도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다이아를 사는 것을 봅니다. 어떤 때는 싼 것을 고르는 것이 현명하지만 어떤 때는 비싼 것을 고르는 것이 옳은 판단입니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다면 사실 가격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판단의 근거를 묻는 질문은 계속 될 수 있습니다. 빨간 색 차를 샀는데 왜 그걸 샀냐고 하면 그냥 샀다고 할 수도 있고 빨간색을 좋아해서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빨간색이 좋냐고 물을 수가 있고 그 대답이 뭐가 되건 이런 질문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종종 뭐뭐 때문에 무엇이 좋다라는 말이 어떤 가치판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사실명제는 가치판단을 낳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지식체계
간단한 문제에서는 이것은 이처럼 뻔한 것인데도 우리 대부분은 첫번째 명제를 잊어버립니다. 길고 복잡한 설명을 들으면 즉 어떤 사실명제들의 나열을 들으면 우리는 그것이 가치판단을 내리는데 확실하고 분명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말입니다. 그러나 길고 복잡한 설명은 그 안에 속임수가 끼워져 있기 쉽습니다. 즉 그들은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가치판단을 당연하다면서 끼워넣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를 봅시다. 우리가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면 대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 안에서 많이 듣습니다. 생명이 언제 출현하고 인간이 언제 나타나고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하는 이야기는 대개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거나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물고기나 바다, 바퀴벌레는 무시됩니다.
다른 예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주로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로 채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사소한 사생활에 대해서까지 알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과학자나 성직자는 외면되고 더 나아가 빵을 만들던 사람, 농민들, 광대들, 정신병자들은 무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압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 자체가 가치판단입니다. 실은 왕과 귀족은 역사서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분량에 비해 사회의 변화에 덜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체계화된 지식을 들으면 우리는 쉽사리 왕과 귀족이 세상을 바꾼다는 인과론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않는 존재들은 별로 존재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교육
지식과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배우기전에 또 배우면서 잊지말아야 할 명제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실명제가 가치를 판단해 주지 않는다는 첫번째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나 구조적 분석이 뭐가 중요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그것을 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복잡하고 정교한 지적 구조물도 쟁기나 자동차같은 도구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간단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쟁기나 자동차가 우리대신에 가치판단을 내려주지는 않습니다. 지식이나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잘 도구의 노예가 되어 쟁기에게 좋은 날씨가 좋은 날씨고 자동차길이 잘 되어 있는 도시가 좋은 도시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물을 쟁기의 입장, 자동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길고 복잡한 지식구조는 종종 개인에게서 가치판단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 지적 시스템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첫번째 명제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이것은 세뇌나 최면에 가깝습니다. 개인은 길고 복잡한 구조적 체계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개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방에 들어간 것처럼 움직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게 됩니다. 결국 지적 권위의 가치판단에 절대 복종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즉 소쉬르가 이렇게 말했다. 데카르트가 이렇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들이 이런 문제를 논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가 된 작은 지식인입니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가치판단도 자기손으로 못합니다. 잘난척 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짓도 많이 합니다. 배움이 오히려 자유를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맺는말
학교에 가면 멍청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복잡한 지식들을 마구 집어넣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 쟁기나 자동차는 도구이며 도구는 그 자체가 윤리적 목표나 적이 될 수 없습니다. 편리하고 강력하기는 하지만 도구는 다만 도구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복잡한 지식체계안에서 길을 금방 잃어버립니다. 그들 대부분은 첫번째 명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아주 자주 너희들 보다 아는게 많은 어른들이 알아서 결정했다라는 것에 순종하기를 요구당합니다. 그래서 배우면 배울 수록 공포를 가지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문과에 가야할까요 이과에 가야할까요라는 질문이 있다고 해봅시다. 어른들은 이에 대해 수없이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명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실명제가 가치판단을 내리는게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치판단이며 그걸 누가 내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가치판단일까요 어른의 가치판단일까요. 이 말은 경험없이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부모님을 믿는다라는 것도 가치판단이며 그것도 사실은 대개 훌룡한 가치판단입니다. 자신이 경험이 없으면서 내 맘대로만 하겠다는 것이 오히려 별로 훌룡하지 못한 가치판단이죠.
문제는 어른이건 아이건 자신이 뭘하는지 알면서 그걸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고 자신이 그러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 아무리 경험많은 어른이 와도 판단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왜냐면 내 인생이니까. 내 가치판단이니까.
이런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저명한 누가 와서 교육이나 남녀문제나 노동문제나 인권문제등에 한마디하면 한국에서는 종종 난리가 납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어떠해야 할까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각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명제가 가치판단을 내려주는 것처럼 야단인데 사실 그 외국인의 머리를 채우는 것들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 만들어낸 지적 분석의 조각들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한국이 그들의 가치판단을 절대추종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윤리가 뭐냐고 책들을 펼치면 사회는 대개 한심한 소리를 합니다. 좋은게 뭐냐를 개인이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공리주의적으로 생각해서 타인들을 배려하고 상식을 따르고 전통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뿐이라면 사람은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회현실을 아는 몇몇부모는 몰래 자기 자식에게만 그거 다 지킬필요없고 네 머리로 생각하라고 조용히 말합니다. 크게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 비밀을 전해 듣지 못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스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노예로 삽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치판단을 전부 대신해 줄 때 그런 사람은 노예중의 노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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