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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일본의 집, 한국의 집

by 격암(강국진) 2010. 2. 18.

일본의 집, 한국의 집


일본에는 주택전시장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의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은 것인데 단지 차이는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있는게 아니라 독립주택들이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일본사람의 절반이상은 독립주택에 살고 있다. 그러니 독립주택은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거형태다. 그리고 독립주택의 건축을 위한 판촉장소가 바로 이 주택전시장이다. 주택전시장에는 한 회사의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십개의 회사가 하나씩의 건물을 지어놓고 홍보를 하고 있다. 주택전시장에 주민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여러가지 행사를 하고 아이들이 놀수 있게도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이곳에 간다. 주택전시장은 게임을 한다던가 경품을 준다던가 개 전시회를 한다던가 바람을 집어넣어 쿠션을 만들어 노는 장소따위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들인다. 


물론 집을 둘러보는 것 자체도 꽤 재미가 있다. 여러가지 장식이나 가구나 집의 구조를 둘러보다 보면 사는 곳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기도하고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집들은 보통 2-3층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건평은 그리 크지 않고 한층이 15평정도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부호를 위한 전시장이 아니라 보통 시민을 위한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건축비도 환율 때문에 말하기 애매한 면이 있지만 한국기준으로도 그리 비싸지 않은 수준인데 매우 훌룡한 집들을 짓는다. 


집을 하나 골라 들어가면 안내해주는 사람이 대개는 정보지를 채워달라고 부탁한다. 그게 유일하게 이곳을 구경하기 귀찮은 점이다. 우리야 일본에서 집지을 예정이 없지만 그래도 짐짓 그런척 정보를 채우는데 나는 일본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전부 떠밀어 버린다. 그리고 나는 집구경을 느긋하게 하는 것이다. 


주택전시장에서 이집 저집을 돌아다녀보면 굉장히 다양한 아이디어로 여러가지 방들과 테라스를 만들어 넣어 놓은 것에 감탄하게 된다. 이런 방은 프로젝터로 영화보는 시설을 집어넣고 저쪽은 조용히 있고 싶으면 숨어들어가 있기 좋은 방이며 이런 방은 누군가 오면 같이 차를 마시기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여러층으로된 단독주택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게 귀찮을수 있겠으나 그대신 집안에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살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있다거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서로 조용히 지내고 싶을 때에는 같은 집안에서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재나 아이들 방이 티브이를 보는 거실과 다른 층에 있다. 독립주택은 채광과 전망이 훌룡한데 독립주택은 아파트와는 달리 최소한 지붕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옆집과 붙어있다고 해도 창문이 나올 공간이 많으니 독립주택은 아무래도 아파트보다 내부공간이 훨씬 밝게 느껴진다.


좋은 집에 살지 못하는 내가 그런 곳에 아내를 끌고 다니는 것은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아닐까 싶지만 이런 곳에 살면 이러저러하게 살게 되겠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즐겁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가자고 한다. 언젠가는 이런 집을 지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주택전시장을 돌아다녀보면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나는 아주 당연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집이란 지어놓고 나면 마을의 강이나 산처럼 사람이 적응하고 살아야 할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나 꽃이 볕좋은 곳에서 잘 자라듯이 집도 사람의 생활을 좌우한다. 인간관계며 아이들 교육도 주거의 형태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강이나 산과는 달리 집이란 사람을 위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것인데도 집이 사람에 맞추어 지는게 아니라 사람이 집에 맞추어 지는 것 같은 일이 생긴다. 특히 부동산 가격 폭등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같다. 


아파트란 평균적인 사회적 요구에 맞춰서 똑같이 지어놓은 집이다. 애초에 싸게 보급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주거형태일뿐 더 선진적이고 좋을것도 없는 기성복 같은 집이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관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나름이고 어떤 독립주택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그 관리를 즐거움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 잘지어진 주택은 당연히 관리하기도 쉽다. 그런데도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그렇게 인기다. 못살던 시절에는 몰라도 이젠 한국도 꽤 소득수준이 높은데도 그렇다. 아파트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이렇게 되고보니 아파트의 장점이 달리 보인다. 아파트는 평균적 가정에 맞춘것이니 아무래도 매매가 쉽다. 누군가에게 맞춤형으로 만들어 진게 아니다. 본래는 싼 것이 장점인데 아파트가 한국에서 싸질 않다. 비싸지면 팔아야 하니 구조변경을 하면 손해다. 그러니 집을 나의 요구에 맞추지 않는다. 불편해도 대개 내가 집에 적응하고 살뿐이다. 이러고 보면 아파트의 장점이 뭔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사는 상당수는 그 집이 좋다기 보다는 투자의 개념으로 그 집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킨다.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 만큼 가진 재산으로 전부 부동산을 사지는 않는다. 일본은 1990대에 부동산 거품이 꺼진 이후로 부동산에 투자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지금도 비어있는 집이 꽤 된다는 말이 있고 아직도 예전에 개발했던 리조트단지의 아파트를 싸게 판다는 광고가 나온다. 집을 사려고 하기보다 그냥 월세로 살려고 한다는 사람도 많다. 반드시 집을 사야겠다는 분위기는 아니다. 집을 사도 그걸로 돈벌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같다.


일본에서 집을 빌리는 형태는 월세다. 일본에는 전세라는 개념이 없다. 내가 알기로 전세의 개념은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것같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종종 전세이야기를 들으면 이해를 못한다. 전세금이 집값과 왜 달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주면 월세를 안내고도 살수 있고 그 집을 나오면 그 돈을 그대로 주니까. 집을 사고 파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자동차를 그런식으로 쓸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도 이해를 못할 것이다. 새차를 차값의 절반만 내고 타다가 4년쯤 뒤에 헌차를 돌려주면 그 차값을 그대로 받는 제도가 있을 수있겠는가. 


집값의 반값도 안되는 전세금을 주면 그 집에 들어가서 살수 있는 것이 한국이다. 이것은 반드시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없으면 있을 수없다. 이것은 언뜻들으면 돈없는 사람이 집값의 절반만 내면 집에 들어가 살수 있는 좋은 제도같지만 실은 전세란 부동산투기에 돈을 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들 집살 때 전세를 주면 얼마 안줘도 살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기 때문에 집값이 오른다. 전세란 2억짜리집에 1억만 줘도 들어가 살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제도가 아니라 1억짜리 집을 2억으로 가격을 오르게 만드는 위험한 사금융 제도다. 물가상승에 비해 급격한 부동산 상승이 있는 비정상적인 나라에서만 가능한 제도다.  


일본에서 집을 빌릴때는 월세이외에 시끼낑이라는 것과 레이낑이라는 것을 내야 한다. 시끼낑이란 보증금 같은 것으로 집을 나갈 때 집의 수리비같은 것을 제하고 돌려주는 돈이다. 레이낑은 집주인한테 고맙다고 그냥주는 돈이다. 한달만 살다가 떠나도 돌려주지 않는다. 실은 레이낑은 그 기원은 잘 모르겠으나 주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있는 돈같다. 


일본은 더 이상 집값이 오르지 않기 때문에 집값이 오르는 걸 기대하는 부동산 투자는 별로 없다. 따라서 순수히 집세를 벌 생각을 가지고 집을 세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가고 오는 것이 잦으면 집주인에게는 손해다. 중간에 집이 비어있으면 수입이 없다. 월세가 기본이니 한국처럼 다음 전세 세입자가 들어오면 나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에는 이사자주하는 부자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사를 자주하면 이렇게 나가는 돈이 많아서 여기저기서 단기로 살자면 결과적으로 주거비용이 많이 든다.


다들 아파트가 편하다고 좋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한국은 편하고 살기 좋은 집으로 한국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그 답은 틀릴 테지만 그런 것같지만은 않다. 우리 부모님이 살던 서울 양천구의 개발이 생각난다. 이젠 수원으로 이사가셨지만 우리 부모님은 양천구에 오래 사셨다. 집값이 싼 곳이고 대단한 공원이 주변에 있는 곳은 아니지만 그곳은 나름대로는 살기 괜찮은 동네였다고 생각한다. 작은 야산도 하나있고 가까운 큰 길가로 나오면 여러가지 음식점이며 가게도 많아 나름대로 편리한 점도 많았다. 내 기억에 가장 좋았던 것은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2층짜리 연립주택에 사셨다. 연립주택 밑에서 어머니는 평상에 앉아 동네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이 맘대로 자기들끼리 뛰어 놀았고 애 가진 엄마들은 아이들을 방목하듯 풀어놓고 기를 수 있었다.


그게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10년쯤 전부터 였다. 재개발붐을 타고 여기저기서 집을 허물고 더 고층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야산자락도 점점 더 아파트에게 자리를 빼앗겨 자연스러움이 줄고 인위적 공원 같은 곳으로 변했다.


내가 제일 먼저 피부로 느낀 변화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고층빌딩이 늘어나니 동네에 사람이 늘어나지 않을리 없다. 사람이 늘어나고 이방인이 많아지면서 동네인심이 흉흉해졌다. 쓰레기를 내놓는 일이며 소음을 내는 일이며 주민들이 서로 모두 잘 알던 때는 잘 넘어가던 일이 통제가 어렵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었보다 사람이 적을때는 이웃들과 함께 사는 우리 동네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뀌었다. 주변에 인사도 안 한 이방인이 점점 늘어났다.


길도 위험해 졌다. 고층으로 빌딩을 올리니 거주민이 많아졌고 그래서 차가 많아지니까 전처럼 골목길이라고 해서 마구 뛰놀기 힘들어 졌다. 주차전쟁은 전에도 있었지만 더 한층 심해졌다.


부모님은 결국 다른 이유지만 그곳을 떠나서 수원의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가셨다. 그곳에서 본 동네는 말하자면 양천구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정점을 보는 것 같았다. 연립주택에서 서로 모두 알고 지내던 분위기와 고층빌딩 아파트단지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이웃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웃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노력하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아파트 촌에 사는 것과 독립주택이나 저층 아파트등에 살면서 사람들이 넓게 퍼져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고층아파트란 많은 사람들이 좁은 땅 위에서 사는 장소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즉 고층 아파트란 애초에 그 설계의 목표가 사람들을 서로 안 만나게, 서로 방해하지 않게하는 것이다. 이웃이라지만 언제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수가 없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이 잘안되며 무엇보다 주변에 산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특별해질 이유가 없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분이 예쁘고 관리하기 쉽다면서 나무나 화초를 층층이 아파트 모양으로 만든 화분에 마구 옮겨 심지는 않을 것이다. 옮겨심는다고해도 그러면서 가지가 다치나 뿌리가 다치나 조심할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유달리 이사를 많이 한다. 한국사람들은 유달리 고층아파트에 많이 산다. 그들은 그들의 가지나 뿌리 같은 지역의 사회적 관계가 망가지는 것에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들을 담을 화분의 모양에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고층아파트에 산다는 것이 그 장소에 모여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동네인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똑 같은 사람들이 살아도 어떤 주거형태로 사는가에 따라 동네 인심은 전혀 달라질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진 때문에 고층아파트가 없다는 일본이지만 그 의미가 달라보인다. 고층아파트는 지역사회의 단합을 강조하는 일본의 풍토와 애초에 맞지 않는 주거형태인 것 같다. 물론 집이란 그저 들어가 잠이나 자면 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동네란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니 바쁜 직장인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상관없을까? 삶의 질이란게 같을까. 그런 동네에서 아이들은 잘 자랄까? 비싸고 호화찬란한 마을이 아니라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야 하는거 아닐까. 그래야 아이들이 잘자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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