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현실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과제는 잊어버리기가 아닌가 합니다. 지식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자유롭게 할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지식과 관념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20세기를 거치면서 혹은 20세기를 예감하면서 자신들이 관념의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것입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서양사람들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미디어와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서구문명이니 여기서는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합시다.
이같은 것은 노자가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버리는 것이 있고 학문을 하면 날마다 쌓아가는 것이 있다고 말한 부분이 떠오르는 말입니다만 서구사람들의 상황은 그랬습니다. 이것이 소위 모더니즘의 극복이고 실존주의이며 서구에서 동양신비주의가 인기를 얻고 중국철학이나 인도철학이 인기를 얻었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관념은 결국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사람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것입니다. 서구문명은 뉴톤이래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을경험했는데 이것의 핵심에는 정교한 논리를 쌓아올리기,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정복한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스레 정교한 기계를 만들거나 뉴톤방정식을 풀던 것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자연을 볼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본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대한 것도 사회과학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경제도 방정식으로 풀면 풀어낼수 있을것이라 믿었습니다. 역사가 변화하는것은 엄격한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말이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얽어매고 결국 인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참상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해체하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절대적 지식이 아니면서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들이 가진 상식, 언어, 문화, 사회에 대한 관념들을 해체하고 무력화 시킬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고 복제품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홀로 존재하는 실존을 가진 존재라고 외치고 싶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좀 읽었고 지식인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대개는 나는 회의론자라고 말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전에 믿지 않을 것을 권하는 사회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705 )라는 글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해체가 너무 오랬동안 행해지다보니 해체가 너무 쉽고 부주의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엉터리 진보주의자를 양산해 냅니다. 즉 사실 별로 생각도 깊지 않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이기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의무에 대한 부분 혹은 자신을 속박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이런 논리를 마구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속박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모든 일에는 보상에 대한 댓가가 있고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는 법인데 댓가나 의무부분에만 이르면 괘변으로 자기 합리화를 일삼는 것에 이런 논리가 마구 쓰이면 곤란하지요.
전에도 말한적이 있어 길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면 프로이드가 잠재의식을 말하면 살인자가 살인은 내가 한게 아니라 아버지의 학대로 내안에 생긴 또나른 나의 조종에 의해 어쩔수 없이 행해진거라고 말하는 데에 그것이 쓰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나 사상가나 성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대개 해체의 시기의 끝에서 새로운 답을 내놓은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즉 해체나 회의론자가 되는 것 자체는 그리 큰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 플라톤이 소피스트와 다른 점이 뭐겠습니까. 상대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던 소피스트에게 이데아를 말하는 플라톤은 회의론자로 가득찬 세계에서 그래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에 질서가 없어지자 제자를 키운 공자가 예를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부패한 세리들에게 호통치는 예수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겠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면서도 깨달을 것을 말하는 부처님은 어떨까요.
우리는 여전히 잊어버리기 해체하기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워낙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안의 작은 틈새속에서 살면서 왜곡된 경험을 통해 왜곡된 상식, 왜곡된 문화, 왜곡된 정신, 무엇보다 가치판단적 무능력을 가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잊어버리기, 해체하기를 통해 그걸 이해하고 그게 뭔가를 고민하는 과정속에서 우리 머리속에 있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지워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가치판단에 대하여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652 )라는 연작에세이에서 시도하는 것은 대부분 그것입니다.
그러나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해체는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흉물스런 거대한 낡은 고층아파트가 우리를 힘들게 하면 그걸 헐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흉물스럽다고는 해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그 건물을 부수는데 아무곳이나 먼저 부수면 그 건물에 깔려 죽는 수가 생깁니다.
부주의한 진보주의자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어떤 것의 해체를 주장하며 뭔가를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로 전체에 대한 관련성을 바라보는 데에 시간을 전혀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달리는 버스를 개량하겠다고 핸들부터 뽑아도되는 것처럼 사회가 마치 쉽사리 교체가능한 부속품의 총합인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보지 못하고 시스템만 보는 경우도 많은 것같습니다.
변화에 취약한 저소득층이나 저교육층이 진보세력에게 혐오감을 나타내는 일이 많은 것은 상당부분 이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변화로 인한 고통을 참아낼수 없는 계층도 있는데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변화를 쉽사리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도 하나, 정치가 하나로 내일이면 당장 이 나라가 천국이라도 될것처럼. 빨갱이라는 말이 그렇게 쉽사리 나오는 것은 공산주의가 저지른 실수를 진보주의자도 저지른다는 사실을 솜씨없이 지적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해체로 끝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다 부시고 나면 그냥 허허벌판이 될뿐입니다. 그 허허벌판에 뭔가를 지으려고 해도 해체에 습관이 붙은 사람들은 그걸 너무 쉽게 다시 부셔버립니다. 이래서는 집지을 의욕도 안나고 내가 지은 집이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해야 할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즉 그들은 그들 마음속의 진실한 동기를 털어놓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비판받고 난도질 당할수 있는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을 다물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엉뚱한 동기를 내놓거나 아예 생각하기를 멈춰버립니다. 종교던 전통이던 가족내의 질서에 대한 생각이던 동네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 질서에 대한 것이든 엄청난 지식인처럼 이야기할 자신이 없으면 입다무는 것이 좋고 귀도 닫아버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쉽사리 빠져듭니다. 저 말하기 좋아하는 달변가들은 내가 믿는 것을 산산히 부셔버리고 나를 집없는 사람으로 믿음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뭘 어찌해야 할지 알수 없게 만든 다음 나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 가슴은 그래도 내가 옳다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스템, 집짓기, 이데올로기, 관점가지기, 편견등의 긍정적인 면을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집, 완벽한 사고방식, 완벽한 관점을 가지지 못할지 모릅니다. 완벽이 아니라 꽤 훌룡한것을 갖출려고 해도 너무 어려울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호화로운 저택에 온갖 방을 만들고 수영장에 산책로에 아름다운 정원까지 갖춘 집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쁘게 일했다고 해봅시다. 만약 그가 집가꾸고 집키우기 자체에 큰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집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라는 생각때문에 그의 인생이 모두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해 낭비되고 만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더 크고 좋은 집을 구하느라 자신의 집을 즐길 여유가 한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금의 철학책을 읽고 사색의 사색을 거듭해 봅니다만 사실 이건 어찌보면 인류역사상 누가 철학챔피언인가를 뽑는 대회에 아마추어가 나가는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똑똑하고 나름대로 축복받는 환경에서 자라고 일한 사람들의 저작을 파고 파도 거기에는 끝없이 나타나는 다음장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인생이 다가버리고 만다면 그것역시 슬픈일입니다. 가족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평생하느라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인생자체가 없다면 슬픈일이며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도 없는 무수한 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처법,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고민을 하느라 자신에게 중요한 판단을 내릴 시간도 없다면 그것도 슬픈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면서 항상 부족한 가운데 자신을 믿고 나름의 최선의 판단을 하고 배우기를 개을리하지도 않지만 그걸 실천하고 실행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신나고 즐겁게 마음이 이끄는대로 자유롭게 살아야 겠습니다. 시스템이 완결되고 나면 지식을 얻고나면 개혁을 하고 나면 즐겁고 신나는 삶이 펼쳐진다는 사실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즐거고 신나게 살기위해 시스템이나 지식이나 개혁이 필요한거라는 사실도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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