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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진보에게는 영혼이 없다.

by 격암(강국진) 2010. 3. 22.

2010.3.22

머릿말 

 

나는 한국에서의 진보의 미래에 대해 몇가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진보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은 어디에 서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물론 기본적으로는 경제, 학문, 문화 정치등 여러가지 방면의 진단과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저는 각각의 세부 사항으로 가기 전에 짧은 분량으로 한국의 진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원천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한문장으로 정리할수 있을 것같습니다. 

 

한국의 진보에게는 영혼이 없다.

 

영혼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제가 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한국의 진보는 논리와 사실들로 이루어진 논증 그리고 분노나 기쁨같은 표면적인 감정들로 충만되어 있을뿐 모든 것들을 서로 이어주고 조화롭게 하는 근본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켜 영혼이라고 한것입니다. 그 영혼이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과 나쁜것,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게 합니다. 한국의 진보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형이상학이 없는 진보

 

진보에는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진보에는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교한 논리나 표면적인 감정만으로 진보를 정의할수는 없습니다. 그러자면 형이상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에는 형이상학이 없습니다.

 

깊이가 있고 영혼이 있는 주장이 어떤가를 말하기 위해 공자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공자는 인의 철학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인은 공자의 철학에서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의되지 않은 것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므로 공자의 철학은 정확히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인은 느껴져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맹자는 인을 측은지심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깊은 주장에는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논리와 표면적 감정을 뛰어넘어 모순 되는 것들을 조화시키는 핵심에는 논리를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이고 노장사상에는 도이며 공자에게는 인이고 부처에게는 불성입니다. 

 

제가 자주 환기 시키는 말입니다만 가치판단은 사실명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논리와 사실에서 가치판단이 나오질 않습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정확하고 자세하고 긴 논리와 사실들도 그 자체로 어떤 가치판단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10억명의 생명이 내 새끼 손가락의 상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논리로 증명할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치판단적 핵심은 논리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것입니다. 가치판단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하는 가가 우리의 행동과 가치판단을 크게 좌우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취하는 한가지 태도는 바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적 태도는 형이상학을 부정합니다. 모든 말을 수치와 사실을 기반으로 논하려고 하고 돈이나 사람의 숫자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합니다. 진보의 모임에서는 흔히 수치가 등장하고 유럽이며 미국에서는 어떠하다는 사례가 쏟아집니다. 그러나 가치의 부분은 종종 매우 간략하거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기계공들의 모임처럼 보입니다.

 

진보에 형이상학이 없다는 것은 진보에 인간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외치고 약자를 보호하자고 하고 분배의 정의를 실천해도 형이상학이 없다면 거기에 인간은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시스템과 논리뿐으로 종국에 가면 인간을 말살하고 논리와 시스템이 그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게 시스템인데 시스템에 불편해 하는 인간들을 비난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생각한 시스템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의 무리로 정의하기 쉽습니다. 결국 무딘 칼로 세상을 자르고 분별해서 더 많은 부질없는 싸움만 만들어 만들어 냅니다.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없고 인간이란 마치 컵에 들은 물처럼 컵의 모양이 정해지면 거기에 따라올 뿐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경제적 물질적 환경만 같아지면 인간이란 똑같은 만큼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진보가 모처럼 가치를 논할때도 그것은 곧잘 별 내용이 없는 표면적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그치는 것같습니다. 흔히 진보는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정신을 가지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분명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별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내용이 있는 가치적 언명이란 어떤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공자나 부처나 예수의 메세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들의 삶과 언어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만약 공자라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했을 것이다라던가 부처나 예수라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거나 말했을 것이다라는 지침을 떠올릴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의 메세지는 공허합니다. 그것은 구체적 행동의 순간에 별다른 지침을 내려주지 못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나 생활형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없는 진보의 빈곤함입니다.  

 

영혼이 있는 진보라면 자기의 삶에서, 같이 살아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것이 들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입으로 뭐라고 하건 자기들끼리 모여도 사사건건 싸움만 할뿐 어떤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만족한 생활을 할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보로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영혼이 있는 진보라면 자기 자신들의 삶에서 자연스레 대안적 문화가 자라나올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때 그런 진보는 탁상공론이며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진보입니다.  

 

민주화세력으로서의 진보는 끝났다.

 

오늘날 진보의 정체성은 애매모호 합니다. 저는 이것이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진보라는 정체성이 생명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시민에게 진보란 어떤 세력을 의미하는가를 물어본다고 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현 여당에 대항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뭉뚱그려서 진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기득권층이었던 사람들에 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즉 기성질서에 대해 신질서를 논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설혹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대개 진보와 보수라는 것을 어떤 일직선상에 놓여진 것 말하자면 온도같은 것처럼 하나의 변수로 측정가능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과격한 진보 중도진보 중도보수 극보수 같은 식의 말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의 직선위에서 너는 얼마나 뻘건가 얼마나 파란가 식으로 진보와 보수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진보란 분배정책에 있어서의 과격함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정의를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보수라는 말은 그렇다고 해도 진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분배만 해도 사실 여러가지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매일 저녁은 카레로 먹던 집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카레는 지겹다고 다른 걸 먹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들이 카레 아닌 다른 것을 먹자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로 묶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카레대신 자장면을 먹자는 사람과 생선구이를 먹자는 사람, 보쌈을 먹자는 사람등 여러가지 다른 요리를 먹자는 사람들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카레말고 다른 걸 먹자는 사람이라는 테두리로 하나로 묶은후 카레냐 아니면 다른거냐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요 어리석은 투쟁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묻습니다. 다른거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 혹은 자칭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쉽게 동의할수있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 기본적 인권을 확보하자는 동감대입니다. 어떻게 달라지건 일단 그것은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보적 시민들의 연합이 추진해 온것이 민주화운동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 인권이 무시되는 독재치하에서 진보라는 단어는 분명한 의미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가 어느정도 이뤄진 지금 특히 대선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지금은 이제 진보라는 단어 하나로 사람들을 묶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민주화 이후의 진보라는 말은 그 정체성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고 할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진보는 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제까지의 진보가 가지는 한계중 중요한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보스 중심의 정치와 살아있는 영혼

 

한국정치는 보수건 진보건 특정한 유명인을 보스로 삼아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김대중대통령을 비롯한 3김씨는 물론 심지어 노무현이나 유시민, 문국현, 권영길등 모든 경우에 그러합니다. 저는 이들이 모두 권위주의적이며 독재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가치적 문화적 내용이 빈곤한 집단은 살아있는 사람을 그 집단의 영혼으로 내세울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집단은 생겨나면서부터 어떤 일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특정인에게 크게 기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비판할수 없는 권위적 모순을 가지게 되며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은 집단내부에 공존하기가 극히 힘들어 집니다. 그리고 그 집단의 형식적 시스템이 제아무리 민주적이라도 실질적으로는 독재와 차이가 없으며 혼란만 만들어내게 됩니다. 심지어 그 집단의 보스도 그것을 바꿀수가 없습니다.

 

개혁당의 예를 들면 개혁당이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지지하기로 한것은 분명 민주적 투표의 결과이지만 이는 어느정도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무현을 지지할까말까를 투표하는것같은 의미없는 투표였습니다.

 

개혁당에는 내부적인 투표를 통해 당선된 당직자들이 있지만 그런 공식적 시스템과는 별개로 유시민의 의견이 실질적으로는 독재나 다름없이 관철되는 구조였습니다. 아니 구조 이전에 그런 인적 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혁당의 다수가 유시민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적 시스템이라는게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시민이나 노무현 같은 살아있는 사람을 가치판단적 중심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노빠니 유빠니 하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어느정도까지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반면 무슨무슨빠라는 단어를 혐오감을 가지고 즐겨 쓰는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이세상 모든 문제의 출발점인것처럼 크게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노빠나 유빠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개개인이 스스로의 내부적 성찰과 철학에 근거하여 독립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저 맘에 드는 정치인을 믿고 무한히 그의 가치판단을 신뢰하는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지적 철학적 게으름이라고 부를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기보다 유명인에게 그대로 기대버리고 마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특정인을 강하게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다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무현이나 유시민을 지지하는 사람들중에도 확실한 자기 주관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을 노빠니 유빠니 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매우 얇팍한 윤리적 형이상학적 깊이를 가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종종 가치판단이란 애초에 사실명제에서 논리적으로 유추되는게 아니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저 자신들이 가진 유럽이나 미국사회같은 선진국 사회의 기분에 대한 사실적 지식이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믿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악성 노빠나 그들을 비열하게 공격하는 사람들이나 자기 영혼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어떤 빠이며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게으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이야기하지만 결국 어느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진보를 말하고 싶으면 자기성찰과 자기수련이 당연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강조되는 정치집단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식을 자랑하고 얇팍한 정치공학적 산수계산이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실천은 없는 집단이 대다수인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서 아이들에 대한 국가 정책을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들, 자기 집앞의 쓰레기는 그냥 지나치면서 환경문제의 정책적 문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자기 말, 자기 문화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을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런 영혼없는 정치집단이기는 보수진영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분명히 진보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개선이 없으면 살아있는 영혼에 의해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실질적 독재가 행해지고 독선으로 흐르는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단순히 다수의 명망가들을 동시에 영입해서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해입니다. 그것은 그저 영혼을 여러개 가진 집단 다시 말해 파벌주의, 패거리주의가 심해지는 집단에 불고할뿐 하나의 문화와 가치관안에 융합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대한 진보의 분열

 

다시 진보가 뭘까라는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진보라는 통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두서없이 들어와 있습니다. 보통 정도의 학식을 가진 시민들을 불러와 어떤 주장을 두고 이게 진보냐 보수냐를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제고사 성적을 공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

 

환경보존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

 

시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고 애매한 대답은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근사한 말로 진보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들도 실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근사하고 설득력이 있을뿐 매우 애매한 말입니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중에는 가난하게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일체의 물질주의적 문명의 진보란 거부해야 할 종류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과연 자본주의는 그렇게 극복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수가 있을까요?

 

이제까지 말한 것처럼 진보는 혼돈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바구니 안에 이것저것을 마구 담아놓은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중에는 주목할만한 거대한 분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간의 긴장입니다.

 

여기서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평하며 했다는 말을 참조해 봅시다.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보다 훨씬 더 뚜렷한 자유주의적 기조를 지니고 있었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정경유착과 권언유착 등 권력 카르텔을 해체함으로써 헌법 규정에 부합하는 권력의 민주화와 분권화를 추진했다. 해묵은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는 동시에 기업에 대한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자의적 개입을 극소화했다. 시장경제라는 국민경제의 기본질서를 확고하게 승인했고……한미FTA를 체결하는 등 자유무역확대에도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참여정부는 동시에 사회적 형평과 사회통합, 그리고 기회균등을 이루기 위한 국가 개입을 확대 강화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과 과거의 국가 범죄에 대한 정부의 사과, 신행정수도 건설과 지역균형발전정책 추진, 노사정위원회와 저출산 고령사회 연석회의, 투명사회실천협의회 등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기구 신설과 강화 노력, 국가사회지출의 대폭확대,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기초노령연금 도입, 아동과 장애인 지원 확대, 교원 확충, 종부세 등 보유세 강화와 강력한 부동산 거래와 신용 규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런 정책에서는 참여정부의 진보적 성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여기 나와있는 설명을 보면 전반부에서는 참여정부의 자유주의를 말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진보적 성향'이라고 말해지는 사회적 형평과 사회통합 그리고 기회군등을 이루기 위한 국가개입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두가지 가치가 어떤 하나의 일관된 철학적 바탕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기 보다는 서로 다른 것을 양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긴장과 모순 그리고 지지자의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정치적, 사회적 자유나 경제적 자유 혹은 시장주의적 주장은 실은 같은 논리위에 서있습니다. 그것은 자유로이 경쟁하는 가운데 최적의 결과가 도출되어 발전이 이뤄지며 그것에 모두에게 가장 좋은 해답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진보적 성향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함께살아가는 가치를 말합니다. 경쟁의 가치를 훨씬 적게 인정합니다. 물론 생태계의 다양성 보존이라는 논리를 통해 앞에서 말한 사회진화론적 논리와 진보적 성향의 논리는 결합될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매우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것입니다.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다양성보존이라는 것에 투자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미 FTA와 같은 문제이르러서는 참여정부가 내린 선택은 많은 참여정부의 지지자 그리고 진보세력에게 종종 커다란 배신이고 위선으로 비춰집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두가지 가치를 지지자들이 이해할수 있게 융화시킨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유주의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무차별한 개발과 SSM의 확장, 한국사회의 정체성 살리기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약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서민에 의해 만들어 졌고 현 정권보다 훨씬 서민을 위했다고 말하는 참여정부시대에도 양극화는 확대되고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이같은 결과들에 대해 우리는 여러가지 다른 정권밖의 외적인 요인을 거론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 중요하게 정권내부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논리, 무분별한 개발과 무분별한 다문화사회를 추구하는 논리에 맞서 싸울 논리와 철학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자기 철학의 일관성을 추구해서 그 핵심을 찾아냈다기 보다는 그저 이것저것을 주관적인 잣대로 형평을 맞추는 듯한 느낌입니다. 

 

참여정부는 자율을 추구하고 권력을 놓아버리면 한국 사회가 자유로운 소통속에서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나갈거라는 생각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진보의 미래를 논하고 싶다면 이러한 기본적인 점에 대한 검토와 극복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무조건 참여정부에 반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생활에서 나타나는 진보, 문화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진보 

 

어느 사회, 어느 나라나 중요한 두가지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구성원들에게 자유를 주고 발전해 나가고 변화해 나갈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질서를 유지시키고 가치판단적 공감대를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이 질서와 자유의 조화의 핵심에는 그 집단의 핵심을 구성하는 정체성, 가치판단의 핵 혹은 영혼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미국의 가장 커다란 가치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씌여져 있습니다. 그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자명의 진리로 확신한다. 즉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그들은 신에 의해 일정한 불가양의 천부의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중에는 생명,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단어에서 눈을 돌리면 우리는 그들이 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작부터 신을 언급하며 역사적인 맥락을 보았을때 이 신이 기독교의 신이라는 것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미국은 세계의 과학을 선도하는 과학선진국이며 일상생활속에도 과학적 언어가 깊숙히 침투해 있는 나라입니다. 자유를 숭상하며 자유의 정신을 퍼뜨리는 것을 미국의 천명으로 알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가장 기독교적 색깔이 큰 선진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형이상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에 논리와 자유에 대한 숭상만 있었다면 미국이라는 사회는 끝없이 복잡해져만 가는 소송사건들이나 다양성의 늪안에 파뭍혀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안에 기독교적 전통이 그 가치판단적 몸통을 지켜주기 때문에 미국은 하나의 사회로서 안정성을 지킬수 있습니다. 

 

논리와 단순한 감성으로는 한 나라를 지켜낼수 없습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큰 힘으로 자라날수 없는 이유는 자유와 질서를 조화시킬 가치판단적 중심으로서의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논리의 힘에 비해 인간적 성찰의 힘, 예술과 문화의 힘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나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을 내리는 하나의 생활방식입니다. 새로운 진보는 문화운동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문화적 공동체라고 불릴수 있는 문화집단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참여정부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뭉쳐서 정권을 만들어 냈지만 화학적 작용과 농축의 끝에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수많은 정책을 각자 지지하는 사람들의 연약한 연대같은 모습밖에는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새로운 진보 집단은 개개인의 개성이 나타나는 자유의 부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질서를 만들어주고 여러가지를 묶어주는 가치적 핵심,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형이상학이 있고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그런 고민과 학습과 실천에 쏟아야 합니다. 강연회를 열고 워크숍을 열고 문화제를 열고 생활공동체로서의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합니다. 작은 자기 자신들부터 행복하게 함께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공감하여 합류할것입니다. 

 

흔히 정치적 집단은 그저 여러가지 정책을 선택한 사람들의 집단인것처럼 생각되며 개개인은 모든 일에서 자유를 가진다고 생각됩니다만 이것은 가치판단에 있어서의 빈곤과 무능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너무 얇은 생각으로 진보가 됩니다. 진보가 된다는 것은 깊은 고민과 자기 성찰끝에 자기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가치판단에 대한 기초작업을 등한시하고 건물을 짓는다면 제아무리 많은 논리와 사실의 자재를 퍼부어도 그것은 들어가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할 것이며 여전히 무력한 진보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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