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1.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우리는 귀가 아프게 듣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자유로운 거래가 보장될때 시장은 저절로 최적화된 해결책을 찾는다는 생각인 쇼설 다위니즘 즉 자유경쟁하에서 최적자가 살아남아 사회적 진화를 이룩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1970년대 이후 국가개입을 강조하던 케인니즘에 반발하며 나타난 조류라고 한다.
우리는 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귀가 아프게 듣고 있을까.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극복을 한국의 진보세력이 이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상, 자유의 개념은 진보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즉 철학적으로 말했을때 자유를 외쳐야 하는 쪽은 진보주의자들이라는 것이며 실제로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주의란 기묘한 위치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서로 다르다고 부인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우드로윌슨이 정치적 자유를 말한 자유주의와 다르다는 뜻에서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유라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를 보면 그것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서구에서 자유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는 경제에 있어서의 신자유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서구는 과학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이룩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대 문명으로 커왔다. 그 가운데서 자유로운 의사소통만이 가장 빠른 발전을 보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 사상의 발전과 경제의 발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사회적 진화라는 개념의 적용은 똑같이 적용된다. 경제는 자유가 좋지 않다고 하면서 기술 사상에서는 자유가 좋다는 주장을 하려면 우리는 예외의 이유를 대야 한다.
여기서 또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진보진영의 계몽주의적 성격이다. 한국 진보주의자들은 보편성을 크게 강조한다. 즉 유럽에서 옳은 것은 미국에서 옳은 것은 한국에서도 옳다는 것이다. 그러한 보편성이 부정될 경우 그들이 굳게 믿으며 선전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정치 이론들은 모두 문화적 사회적 지리적 차이로 부정되고 한국 사회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럽의 복지 정책은 이러저러한데 우리는 왜 이런가라는 말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진보진영의 이러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적 성격의 큰 약점은 윤리다. 본래 가치와 윤리는 궁극적으로 논리와 사실로 설명되어 지는 부분이 아니며 서구의 가치 역시 서구의 논리와 이론으로 모두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구는 기독교적 전통위에서 그것을 극복 보완하면서 합리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논리만으로 세상이 돌아갈 수 없으면 전통과 문화도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역사를 제외하면 왜가 없다. 그런데 한국진보는 객관화의 이름속에서 한국의 전통윤리와 가치를 상당부분 부정하며 객관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옳고 그른 것을 수학공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인간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드는 것은 엉성하고 규칙없는 가치와 윤리위에 하늘처럼 쌓은 논리와 사실들의 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중들 사이에서 패미니즘이나 노동운동에 대해 반감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를 강조하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내면의 가치적 본질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발전적 융합이 필요하다. 발전적 융합이란 단순하게 섞는게 아니라 매우 합리적이면서 정교한 사고를 하면서도 어떤 가치적 기준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이걸하지 못한다. 그들은 한국의 정체성같은 이야기는 민족주의로 폄하하고 부정하려고만 한다. 보편성과 객관성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논법으로는 신자유주의는 극복될수가 없다. 그들은 기업들이 무한경쟁을 통해서 SSM같은 것을 늘려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논리와 정당성없이 반대를 외칠뿐인데 이는 그들의 철학적 윤리적 바탕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할 말이 사실 없다. 게다가 SSM은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니라 실은 상당수의 경우 좋은 것이다. 따라서 객관화된 법률조항으로 SSM을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의 정신아래 만들어진 법은 특히 그렇다.
SSM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고 싶으면 경쟁을 막자고 하는 것으로는 되지않는다. 그렇다고 무한 경쟁을 허용하자는 것도 아니다. SSM의 무분별한 확산은 지역 커뮤니티의 활성화로만 제한될 수 있다. 옷을 몸에 맞추듯 지역사회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SSM이 어느 정도 이상 확산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이지 일률적으로 나쁘다고 하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대해 하나의 가게가 가지는 의미를 자동차에 교체해 넣는 하나의 부품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공동체라는 문맥에서 찾을 수 있을 때 SSM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을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활성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가치와 윤리가 그 근간이 된다. 논리와 팩트는 거드는 도구에 불과할뿐 그 핵심에는 가치와 윤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진보들은 대개 매우 논리적인 것만 강조하는 계몽주의에서 벗어나 있질 못하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외로운 원자다. 그들은 가치와 윤리를 소중히 여기기는 커녕 파괴한다. 종종 이땅에 뿌리박은 사상가도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의 누가 쓴 글에 감동받아 이 땅에 외국을 세우려고 한다.
한 마을 중앙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 마을에서는 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고 하자. 전통적 제사며 농악이며 관습이 있다고 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의 눈에 이런 것들은 다 미신이고 목재이며 불합리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문화와 전통이 그 마을 공동체를 지켜내는 중요한 사슬이 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종종 그 사람이 꿈꾸는 마을에 독일사람이 사는지 한국 사람이 사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니 보편성만 강조하는 진보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극복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신성한 가치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의 차이가 밝혀지고 그럴때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공존할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효과적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작은 동네에 침투하는 SSM에 대해 속수무책이듯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필연적으로 당하게 된다. 우리의 윤리적 공백은 남의 윤리로 메꿔지게 된다. 이런 싸움의 구도에서 보수는 물론 진보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극복되지 않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철학적 근본과 한계인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국가란 무엇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어버리기와 진보의 문제. (0) | 2010.07.14 |
---|---|
진보에게는 영혼이 없다. (0) | 2010.03.22 |
21세기 진보 X (0) | 2009.12.09 |
진보의 윤리적 무능 (0) | 2009.11.02 |
기계적인 가정, 기계적인 국가 (0) | 2009.10.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