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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영어도서관’이 이룬 시골학교의 기적 (시사인 펌)

by 격암(강국진) 2010. 10. 1.

‘영어도서관’이 이룬 시골학교의 기적

시사INLive 김은남 기자 입력 2010.10.01 10:58 누가 봤을까? 40대 여성, 강원

 




점심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 4학년 중 아무나 찍어 물어보았다. "너는 영어가 몇 레벨이니?" "E레벨인데요." 옆에서 장난치던 남학생에게도 똑같이 물어보았다. "전 A레벨요." 

통도사(경남 양산시) 입구에 있는 하북초등학교 아이들은 3학년 이상이면 누구나 자기 영어 레벨을 알고 있다.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가르기 위함이 아니다. 이 레벨은 수준별 영어 수업을 받을 때 외에 이 학교 별관 4층에 있는 영어도서관을 이용할 때 특히 유용하게 쓰인다. 시골 학교에 있는 도서관이라고 우습게 보면 곤란하다. 이 학교가 소장한 영어책만 무려 4700여 권이다. 모두 대여 가능하다. 몸값 비싼 영어책이 행여 분실 혹은 훼손될까봐 대여는커녕 캐비닛에 넣어두고 벌벌 떠는 학교가 있음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파격적인 도서관 운영이다. 도서관 개방 시간도 밤 8시까지여서 맞벌이 부부도 귀가 후 아이들 손을 잡고 이곳을 찾는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기 레벨에 맞는 책을 골라 읽는다. K레벨(미국 유치원 레벨)에서 6레벨(미국 초등학교 6학년 레벨)까지, 총 7단계이다. 





ⓒ시사IN 조남진 부산 영어도서관에서 한 어린이가 책을 고르고 있다. 서가에 붙은 'L100' 표지판은 읽기 레벨을 표시하는 지수이다. 

2007년 하북초교에 부임한 이래 교육청과 시 예산을 억척스럽게 끌어들여 도서관을 마련한 명형철 교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도서관을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동기는 소박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부산·울산 등 대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을 막을 순 없을까? 아니, 거기까지는 안 되더라도 괜찮은 학원 좀 가보겠다고 왕복 한 시간씩 걸려 양산까지 오가는 아이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그러자면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학교가 사교육 기능을 흡수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영어였다. 

"원어민 회화만으로는 영어 실력 안 늘어" 

그런데 왜 하필 영어도서관? "원어민 회화 중심의 영어 교육으로는 아이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 명 교장은 말했다. 이 학교도 처음에는 회화 중심으로 갔다. 전자칠판 등 비싼 장비를 들여 영어체험센터를 만들고, 원어민 교사 2명에 영어 전담 교사 등 내국인 4명도 배치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대다수는 영어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자기 주도적 학습이 수반되지 않는 이런 방식으로는 아이들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접하게 된 것이 영어도서관 보급 운동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명 교장은 이렇게 확언한다.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좋은 학습 방법은 없다." 책을 읽으면 읽기 능력만 좋아지는 게 아니었다. 읽기를 중심에 놓고 나니 말하기·듣기·쓰기 실력도 덩달아 향상되더라고 그는 말한다. 

영어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말하기·듣기가 아닌 읽기 중심 영어 교육, 더 전문적 용어로 말하자면 '다독(多讀) 기반 영어 교육'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민간에서부터였다. 이름하여 '엄마표 영어'가 선풍적 인기를 끈 지 10여 년이 흘렀다. 엄마표 영어의 핵심은 영어 노출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다. 이병민 교수(서울대·영어교육)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캐나다는 외국어(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한 몰입 교육 시간으로 1만1680시간을 제시하고 있다. 하루 8시간씩 영어에 노출된다 해도 1만1680시간을 채우려면 꼬박 4년이 걸린다. 그런데 현재 초등학교 영어 수업은 보통 주당 1~2시간, 중·고등학교도 4~5시간을 넘지 않는다. 1만 시간을 채우기에는 어림없다. 

학원을 다니거나 학습지를 이용한다고 해도 절대 노출 시간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생겨난 자구책이 엄마표 영어이다. 엄마가 집에서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고, 영어 비디오를 보여주고, 카세트테이프를 들려주는 식으로 아이의 영어 노출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려주는 이 학습법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화제를 낳았다. 최근에는 사교육 업체들도 여기 가세했다. 말하기·듣기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들 업체가 읽기 교육에 관심을 돌리면서 이른바 교육열 높다는 동네를 중심으로 사설 영어도서관이 하나 둘 생겨났다. 최근에는 대형 어학원들도 웬만하면 부설 도서관을 함께 운영하는 추세이다. 





ⓒ시사IN 조남진 부산 영어도서관은 모든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한다. 사진은 '미술과 함께하는 영어 읽기' 시간. 

문제는 엄마표 영어나 사교육 업체의 경우 '선택받은 소수'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 준비물 챙기기도 급급한 '직장 맘'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하루 3시간 영어 노출'은 그림의 떡이다. "이름난 어학원을 몇 년씩 다닌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권혜경 영어도서관연구소 대표(한국사이버대 외래교수)는 말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상위권 학생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나머지 아이들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들러리만 서는 양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떠오른 방법이 이런 영어 교육을 학교로 끌어들이자는 안이다. 이를테면 엄마표 영어를 공적 영역으로 흡수하자는 주장인 셈인데, 실제로 이를 도입한 학교들은 극적인 효과를 보았다고 입을 모은다. 읽기 교육을 강화한 뒤 하북초교가 지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검사에서 받은 영어 평균 점수는 94점이었다. 영어 기초학력 미달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서울 송곡여고는 지난 학기 < 오페라의 유령 > < 프린세스 다이어리 > 등 영어 소설을 중심으로 읽기 중심 영어 교육을 실시했다. "그간의 영어 수업이 짧은 지문 풀이 위주로 이뤄지다보니 아이들이 영어를 재미없어하고, 긴 문장을 읽어낼 자신도 없어한다는 판단이 들었다"라고 이경찬 교사는 말했다. 그래서 일단은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만한' 책을 골랐다. 아이들이 이미 만화나 영화로 한번쯤 접해봤을 콘텐츠를 책으로 다시 읽는 경험을 통해 스토리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소설 한 장을 읽고 나면 어휘 퍼즐을 풀고(듣기·말하기 훈련), 자기가 읽은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원어민 교사에게 설명하는 시간(쓰기·말하기 훈련)도 가졌다. 그 결과 읽기·듣기·말하기·쓰기 등 영어의 네 가지 기능이 고루 향상되면서 아이들의 성적이 두 배 이상 올랐다고 이씨는 말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독 기반 영어 교육을 보급해온 어도선 교수(고려대·영어교육)는 현재 학교에서 쓰는 영어 교과서가 빈약한 어휘와 설명 일변도의 획일화된 문체·문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아이들이 영어를 점점 더 재미없어하고 싫어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문학작품을 한 권이라도 영어 원서로 읽어본 아이들은 영어에 대한 감수성이 달라진다. 어 교수와 함께 영어 소설을 읽은 ㅈ여고 학생들은 옆에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너무 재미있어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매일 이 정도밖에 읽지 못해 아쉽다. 빨리 읽어서 결말을 보고 싶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책에 반복돼 나타나는 단어와 표현법에 익숙해지면서 읽기 속도가 빨라짐은 물론 이를 응용함으로써 작문 능력까지 향상되는 것은 덤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영어책이 CD를 함께 제공하는 만큼 책을 읽고 주인공들에게 심리적으로 이입된 상태에서 이를 듣다보면 일반 CD를 들을 때보다 듣기 능력 또한 월등히 향상된다고 어 교수는 말했다. 

다독 기반 영어 교육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영어 노출을 자연스럽게 늘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이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 도서관이다. "현 정부 들어 영어 교육을 강화하면서 1000억원 가까운 예산이 풀린 것으로 안다. 지자체도 많은 지원을 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영어마을 만들고 학교에 영어체험센터를 짓는 등 외적 인프라를 갖추는 데 쓰였다"라고 지적하는 권혜경 대표는, 지금부터라도 학교들이 영어도서관을 갖추고 영어 독서 전문 사서를 확충하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예산이 크게 드는 일도 아니다. 기존 학교 도서관에 제대로 된 영어 코너를 갖추고, 원어민 교사를 독서 도우미로 활용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도서관, '영어 격차' 줄이는 최고 해법 

굳이 학교 도서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부산시는 지난해 7월 시내 중심가에 1043㎡ 규모의 영어도서관을 개관했다. 장서 3만여 권을 갖춘 전국 최초의 시립 영어도서관이다. 이곳에 가면 L100, L200 식의 팻말이 붙어 있는 서가가 먼저 눈에 띈다. L은 읽기 수준을 가늠하는 국제 표준인 렉사일(Lexile) 지수의 약자. 이렇게 자신의 읽기 수준에 따라 구분된 서가에 가면 다시금 역사·인문·과학·소설 등으로 구분된 책을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다(읽기 수준 테스트는 도서관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아들 태욱군(7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주부 이은성씨는 "아이가 금방 싫증내는 영어책을 매번 사주기 부담스러웠는데 영어도서관이 생겨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이씨는 영어책을 일주일에 15권씩 꼭꼭 빌려본다고 했다. 남편 책 5권, 자기 책 5권, 태욱이 책 5권이다. 





ⓒ시사IN 조남진 경남 하북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영어책 4700여 권을 자유롭게 열람하고 빌릴 수 있다. 

읽기 중심 영어 교육을 강조하는 이들의 일차적인 꿈은 학교마다, 지역마다 영어도서관을 갖추는 것이다. 권혜경 대표는 좋은 책을 읽히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 방법이고, 계층 간 영어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사회적 합의만 선다면 이것이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말했다. 영어도서관은 과연 영어 공교육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김은남 기자 /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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