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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스크랩] <정인보> 지조있고 꼬장꼬장한 20세기 최후의 선비

by 격암(강국진) 2010. 8. 24.

<정인보>

지조있고 꼬장꼬장한 20세기 최후의 선비

 

 

정인보(鄭寅普)는 1893년 지금의 회현동 일대인 장흥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동래 정씨는 조선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의 증조부 정원용(鄭元容)은 고종 때까지 3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인물이었으니 그의 가문이 누린 영화는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정인보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아버지인 정은조 혼자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고, 가세는 기울기 시작하여 정인보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와야만 했다. 정인보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지만,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두 팔아서 송금한 이후에는 셋방에 얹혀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한 와중에도 정인보는 학문에 정진하여 강화학파의 이건방(李建芳)에게 수학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 계통이었는데, 실학을 강조하는 정인보의 사상은 여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상해를 왕래하면서 홍명희(洪命熹), 이광수(李光洙), 박은식(朴殷植) 등 당대의 명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강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국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내 친구 육당이 이제 죽었구나”
그는 뛰어난 학식과 재주로 금방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일제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보는 끝끝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아저씨뻘 되는 정만조(鄭萬朝)가 일제가 성균관을 개편하여 만든 경학원의 대제학이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늘 자랑을 하고 다녔다.
“동래 정씨에서 대제학이 된 것은 내가 둘째이다.”
이를 들은 정인보는 아저씨뻘 되는 이에게 면박을 주었다.
“나는 그런 대제학 열 개 주어도 안 합니다.”


또 정만조의 동생인 중추원(일제의 총독자문기구) 참의 정병조(鄭丙朝)가 동래에 있는 시조묘의 부지를 일제에 국립공원으로 팔려고 공작을 꾸며 문중회의에서 통과된 적이 있었다. 정인보는 문중 어른들을 찾아 설득에 나섰다.
“일본은 나라를 뺏어간 것도 모자라 이제 우리의 조상들의 무덤까지 앗아가려 하는데 어찌 이를 허락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1940년에 들어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자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로 돌아섰다. 특히 그의 절친한 친구인 최남선(崔南善)이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자 정인보는 매우 실망한 채 상복을 입고 최남선의 집을 찾아갔다.
“내 친구 육당(최남선의 호)이 이제 죽었구나!”
이렇게 외치면서 그의 집 앞에서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최남선이 반성하는 듯 찾아오자 이를 축하하며 설렁탕을 사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 후 최남선의 친일행각은 계속되었고, 하루는 최남선이 정인보의 집에 들렀으나 정인보가 그를 깨끗이 무시하였다.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일세.”

정인보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글을 써주곤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에게는 절대 글을 써주지 않았다. 한번은 부탁하러 온 사람이 꿀 한 병을 사와서 놓고 가자 대문간에 매달아놓고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후에 부탁한 사람이 비문을 찾으러 오자 그는 매달려있는 꿀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꿀은 저기 걸려 있네. 가져가게.”
결국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을 때, 그는 절대 변절하지 않았던 지조를 인정받아 남조선민주의원을 맡기도 했고, 전조선문필가협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또한 1948년 8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감찰위원장의 직위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강직함을 나라 전체가 인정한 것이었다.


반면 일제시대 친일 행각을 벌였던 최남선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정인보는 그를 변호해주었다.
“내가 일제 헌병에 쫓겨 그의 집에 숨어들었는데, 육당이 마다하거나 고발하지 않고 나를 기꺼이 숨겨주었던 적이 있소이다.”
비록 변절했지만 최남선도 그의 친구였기에 그를 기꺼이 변호해 준 것이다. 그러나 변호는 해주었어도 끝내 그와는 상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민족이 수난을 겪던 일제시대에 총이 아닌 문필을 무기로 삼아 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문학, 국문학, 국사학 등 국학의 전반적인 면에서 광범위한 연구를 거듭했고, 특히 실학에 주목하여 그들의 저작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그는 일제가 이 땅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물들이는 것을 저지하고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회갑도 되기 전인 6.25 때 납북되어 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일제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민족주의 우파를 표방하며 자치제, 참정권 요구 등 일제와 타협적 노선을 걷기도 하고 야합하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항거하였고 민족의 지식인으로의 지조를 지켰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그는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진: 홍보담당관실 하홍순 사무관>

 

출처 : 국민권익
글쓴이 : 국민권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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