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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스크랩] 죽음의 벽 아이거 북벽(Nordwand)의 등반과 조난

by 격암(강국진) 2011. 9. 21.

"안 돼요! 안 돼. 제발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 마세요"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등반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노스 페이스’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벽의 등반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간접 체험했을 것이다. 에베레스트(8,884m) 초등자인 텐징 노르게이가 생전에 미국의 한 산악인과 노멀루트로 아이거 북벽(표고 약 1,800m)을 절반쯤 오르고 나서 “너무 힘들고 너무 위험하다”며 등반을 포기했다. 에베레스트의 ‘인간 증기 기관차’가 이 벽의 등정에 실패했다는 것은, 등반 난이도가 산의 고도와 무관하다는 사실의 명증(明證)이다.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 발터 보나티가 단독으로 아이거 북벽의 ‘아이스호스’를 등반하던 중에 산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돌사태가 발생해 늑골 골절상을 입고, 이 벽의 등반을 영영 포기했다. 알프스 난코스 등반의 달인 보나티의 실패는 아이거 북벽의 등정이 행운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1935년 첫 도전 이후 1991년까지 55명의 클라이머 사망

도대체 아이거 북벽 등반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원형극장처럼 움푹 파인 이 북벽으로 푄현상을 일으키는 기류가 넘나들면서 예고 없이 국지적 폭풍을 유발시킨다. 그 결과 폭우와 눈 녹은 물로 젖은 암벽이 갑작스런 혹한에 의해 베르글라(verglas·살얼음)로 뒤덮이며 암벽의 모든 홀드(hold·손잡이)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폭설이 끊임없는 눈사태로 이어지고, 낙뢰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또한 햇볕이 북벽 상부에 닿으면, 아교 역할을 하던 얼음이 녹으면서 수많은 낙석과 낙빙이 기총 소사하듯 주요 등로인 ‘제2빙원’과 ‘제3빙원’을 강타한다. 그리하여 1991년까지 이 벽에서 55명의 노련한 클라이머들이 등반 중에 낙뢰, 추락, 동사, 부상 등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1935년 독일 청년 막스 제틀마이어(당시 24세)와 칼 메링거(26세)가 최초로 이 벽에 도전했다. 그들은 당시 알프스의 최고 암벽등반 난이도인 VI급 벽을 여러 개 등정한, 극한 등반가들이었다. 당시 등반에 로프와 피켈 사용만을 고집하던 순수 알피니즘 옹호자들이 ‘바위꾼’이라고 경멸했던 극한 등반가들은 절벽의 난코스를 돌파하기 위해서 인공 보조수단의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즉 홀드가 없는 암벽에 피톤을 박아 홀드로 대용했고, 에트리에(3단 또는 4단 줄사다리)를 이용하기도 했다(훗날 등반에서 인공 보조수단의 사용은 일반화되었는데, 오늘날은 피톤을 확보용으로만 사용하고, 등반에 인공 보조수단의 사용을 기피하는 프리 클라이밍 등반법을 선호한다).

두 독일 청년들은 일주일 동안 망원경으로 네 개의 가파른 록밴드와 아이스필드를 자세히 살핀 후, 날씨만 허락한다면 3일 만에 이 벽을 돌파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메링거는 등정 후 야간이나 폭풍설 속의 강요된 하산에 대비해 하산 루트의 지형을 잘 익혀 두려고 혼자 서벽으로 아이거 정상에 올라 비상식량을 비축해 두는 용의주도함도 보였다.

8월 21일 두 사람이 아이거 북벽 등반을 시작하자, 그 소식을 접한 많은 관광객들이 그린델발트와 클라이네 샤이데크의 호텔 테라스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몰려들어, 오늘날 생중계 방송을 시청하듯이 두 독일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두 사람은 첫날 북벽 하부의 ‘퍼스트 필라’와 ‘새터드 필라(Shattered Pillar)’의 좌측 가파른 록밴드 중앙 루트로 오버행을 돌파하고 트래버스를 반복하며 곡예사의 동작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들은 아이거 북벽의 갤러리 윈도(융프라우 등산철도 회사가 아이거 북벽을 관통하는 터널공사를 할 때 뚫어 놓은 5개의 갱도출구로, 벽 밑에서 440여m 위쪽에 위치함)의 위쪽까지 진출해 바위 선반 위의 얼음을 깎아내고, 침낭을 어깨까지 두르고 앉아서 비박했다.

다음날 흐린 날씨 속에 그들은 55도 경사의 제1 빙원에서 여러 시간 동안 스텝(얼음 계단)을 깎으며 전진했다. 당시 안전모가 발명되기 이전이어서 그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낙석의 ‘윙’ 소리를 듣거나 또는 직접 낙석을 목격하면 재빨리 배낭을 머리에 이고 방어태세를 취해 가며 등반했다. 그들은 제1 빙원을 돌파한 후 우측 가장자리의 암벽인 로트 플루(Rote Fluh·높이 305m의 오버행 붉은 바위절벽) 좌측 측면에 피톤을 박아 자일로 확보한 후, 그 밑에서 비박색을 뒤집어쓰고 앉아 두 번째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망원경 관찰자들이 지켜보니, 두 사람은 높이가 제1 빙원의 두 배이고 경사도가 더 가파른 제2 빙원에서 아주 느린 동작으로 등반 중이었다. 그 날 밤 검은 구름이 몰고 온 폭풍설이 이틀간 계속되고 나서야 구름의 장막이 잠시 걷혔는데, 그 사이 한 망원경 관찰자가 두 독일인들이 플래트아이언(Flatiron·다리미) 쪽으로 등반 중인 것을 목격했다. 플래트아이언이란 제2 빙원과 제3 빙원 사이, 아이거 북벽의 3분의 2 지점에 튀어나온 뱃머리 모양의 짧은 아레트(바위 스텝으로 취급하기도 함)로 구식 다리미의 앞모습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등하고 있던 제틀마이어는 활기찬 모습이었으나, 그의 파트너는 동작이 매우 굼떴다. 또 다시 폭풍설이 북벽에서 맹위를 떨치고 난 뒤 두 산악인들은 실종되고 말았다.

한 달이 지난 후 독일의 경비행기 조종사 우데트가 아이거 북벽에서 30m 거리까지 근접 비행을 하면서 정찰, 플래트아이언 상부 암벽을 마주보고 선 자세로 눈 속에 절반쯤 파묻혀 있는 한 명의 클라이머를 찾아냈다(훗날 이곳은 ‘죽음의 비박지’라고 명명됨).

1년 후 제틀마이어의 형 일행이 북벽의 하단 빙벽에서 제틀마이어의 시신을 발굴했는데, 그의 몸에 카라비너와 끊어진 로프 토막이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등반 중 눈사태에 휩쓸려 추락사한 것 같았다. 27년이 지난 1962년 두 명의 스위스인들이 제2 빙원에서 건조된 메링거 대원의 시신을 발견했다.

 ▲ 아이거 북벽 초등루트.

히틀러, 등정자에게 베를린 올림픽에서 특별메달 수여 약속

다음해인 1936년 7월 초에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라이너-앙게러 조가 아이거 북벽에 두 번째로 도전했다. 그들은 퍼스트 필라 우측으로 등로를 잡고, 두 개의 우측 갤러리 윈도 사이로 전진해 새터드 필라 위쪽까지 오른 후, 높이 24m의 가파른 피치인 ‘힘든 크랙’을 돌파하고 오버행 로트 플루 밑에 도달했다. 그 오버행 벽은 등반이 불가능했고, 좌측의 80도 경사 바위 슬랩도 제1 빙원으로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 사람은 퇴각해 벽 밑에서 아이거 북벽 등반을 꿈꾸던 다른 팀인 독일 산악부대의 두 명의 휴가병 힌터스토이서와 쿠르츠를 만났다. 이 두 사람도 노련한 VI급 암벽 등반가들이었고, 특히 영화배우 뺨칠 정도의 미남인 쿠르츠는 자신의 고향 바바리아의 산악 가이드 출신이었다. 독일 청년들이 이렇게 죽음의 벽 등반에 집착한 한 가지 이유는 히틀러가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 아이거 북벽 등정자에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특별 메달을 수여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8월 18일 두 자일 파티는 서로 의기투합해 아이거 북벽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 4명은 로트 플루 밑에서 자일을 묶고, 힌터스토이서의 리드로 80도 경사의 좌측 바위 슬랩 측면으로 40m를 하강 트래버스하는 데 성공했다(나중에 이 피치가 ‘힌터스토이서 트래버스’라고 명명됨). 그들은 등정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곳의 고정 자일을 회수하는 최대의 실책을 범한 후 제1 빙원에 도달했다.

그들은 제1 빙원과 제2 빙원 사이의 유일한 통로인 높이 30m의 스텝(Step) 상의 쿨와르(종종 눈 녹은 물의 수로가 되고, 그 위에 얼음이 덮이기 때문에 훗날 ‘아이스호스’라고 명명됨)를 오르고 있었는데, 망원경 관찰자들은 라이너 대원이 앙게러 대원을 부축하며 등반하는 광경을 보고, 앙게러가 낙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추정했다. 4명은 제2 빙원의 우측 가장자리의 천연 동굴에 도달해 비박했다.

다음날 망원경 관찰자들은 4개의 작은 검은 점이 아주 느린 동작으로 제2 빙원 상부 설사면을 횡단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그들은 부상자 앙게러 대원 때문인 듯 겨우 200m를 오르고 플래트아이언 못 미친 지점의 암벽 레지(ledge)에서 두 번째로 비박했다.

그 다음날 그들이 여러 시간 동안 플래트아이언의 마루 상부, 즉 ‘죽음의 비박지’를 돌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선등조 쿠르츠와 힌터스토이서가 좌측 제3 빙원으로 90m쯤 트래버스했을 때 뒤따르던 오스트리아 팀이 멈추어 섰다. 30분간 두 자일 파티가 꼼짝 않고 서 있더니 마침내 선등조가 하산하기 시작했다. 좋은 날씨가 지속되고 있는데 독일 팀이 오스트리아 팀의 부상당한 동료를 안전하게 하산시키기 위해 아이거 북벽의 3분의 2 지점을 돌파한 위치에서 등반을 포기했을 때는 정말로 커다란 심적 갈등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숙원이었던 등정도 중요하지만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젊은 산 사나이들이 동료의 역경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가파른 제2 빙원까지 순조롭게 하산했는데, 오후 내내 록밴드와 아이스호스 통과에 매달렸다. 폭우가 쏟아지고 어둠이 다가오자 그들은 로트 플루 좌측에서 세 번째 비박을 했다. 밤새도록 찬비가 내렸지만 다음날 그들은 제1 빙원을 무사히 내려왔다. 그러나 밤새 빗물이 냉기에 의해 얼어붙어 암벽의 모든 홀드는 온통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서, 힌터스토이서와 쿠르츠가 교대로 슬랩의 40m 트래버스 구간(그들이 전에 고정자일을 회수했던 힌터스토이서 트래버스)을 돌파하려 사력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그들은 절벽 아래로 곧바로 자일하강을 시도하다가 쿠르츠를 제외한 3명이 먼저 절명했다.

그날 융프라우 철도회사 경비원인 알멘은 선로를 순찰 중이었다. 그는 아이거 북벽 터널 속의 ‘3.8km’라고 불리는 지점에 있는 갤러리 윈도에 도착해, 그곳의 창고 안 난로 위에 물을 끓이려고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는 네 명의 젊은이들이 아이거 북벽을 하산 중이라는 사실을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갤러리 윈도가 젊은이들의 탈출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창문 쪽으로 스위스 요들(Yodel) 송을 불렀다. 그때 창문 위쪽에서 누군가가 “우리는 하산 중이에요. 만사형통입니다”라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생존자 쿠르츠, 자일 매듭에 걸려 5m 놔두고 사망


 

알멘은 젊은이들이 도착하면 따뜻한 차를 대접하려는 생각으로 찻주전자에 물을 넉넉하게 더 부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는 창문 쪽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한 사람이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다른 동료들은 모두 죽었어요”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멘은 즉시 아이거 빙하 역으로 비상연락을 취했다. 그는 그곳에 영화촬영을 위해 3명의 가이드들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시 특별열차가 3명의 가이드들을 싣고 왔다. 3명의 가이드들은 갤러리 윈도 밖에서 아이거 북벽을 갈지(之)자로 기어올라 자일에 매달려 있는 조난자 쿠르츠 아래 60m 지점까지 접근했다. 그 위쪽 절벽이 너무 가팔라서 그들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으나(당시의 스위스 가이드들은 등반에서 안전을 최우선시했고, 극한 등반가들이 아니었음), 유일한 생존자인 쿠르츠와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쿠르츠의 이야기에 의하면 힌터스토이서가 앞장서 내려오다가 루트 개척을 위해 하강 자일에서 자신의 몸을 풀어야 할 경우가 발생했는데, 그때 풋홀드에서 미끄러져 추락사했고, 그 여파로 뒤따르던 부상자 앙게러도 몸의 균형을 잃고 추락하면서 그의 목에 헐거워진 로프가 감기면서(구식 자일 하강에서는 로프가 어깨를 지나감) 질식사해 쿠르츠의 5m 아래쪽 하강자일에 매달려 있고, 쿠르츠와 앙게러 두 사람의 몸무게가 하강 자일을 세게 끌어내리며, 후위의 라이너 대원을 확보용 피톤 쪽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그는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서 곧 동사해 위쪽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가이드들은 자일에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매달아 올려 보내려고, 쿠르츠에게 자일을 내려보내라고 말했다. 쿠르츠는 내려 보낼 여분의 자일도 없거니와, 해머를 분실했으며 피톤과 카라비너도 없다고 소리쳤다. 앞장섰던 힌터스토이서가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 가이드들도 무사히 갤러리 윈도로 귀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이드들이 그곳에서 쿠르츠를 위해서 당장 해줄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가이드들은 쿠르츠에게 새벽에 날이 밝아지면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소리쳤다.

“안 돼요! 안 돼요! 그 사이 저는 여기서 얼어 죽을 겁니다. 제발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쿠르츠가 소리쳐 애원했다. 그 불행한 등반가는 벙어리장갑 한 짝을 잃어버려서 왼손은 동상으로 돌덩어리처럼 굳어 버렸고, 왼팔 전체도 나무토막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3명의 가이드들은 젊은이의 애절한 절규를 외면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안고 갤러리 윈도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구조대는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사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낙석과 눈사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쿠르츠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가이드 조합장이 한 개의 스탠스에서 몸을 옮기자마자 커다란 둥근 돌이 그 스탠스를 강타했지만 그는 구사일생으로 압사를 모면했다.

가이드들은 쿠르츠로부터 30m 아래쪽에 위치한 오버행 밑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들을 수 없으리라 예상하며 쿠르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쿠르츠는 아직 살아 있었고 의식이 온전했다. 가이드들은 쿠르츠에게 로프를 잡고 앙게러의 시신까지 내려와 자일에서 시신을 잘라내고 자일을 잡고 다시 라이너 시신까지 올라가 거기 설치된 앵커 피톤에 쿠르츠 자신을 확보한 다음 길이 12m쯤 되는 자일을 잘라내어, 그 자일가닥을 풀어(당시의 자일은 삼마 가닥을 꼬아서 만든 것임) 연결해 구조대에게 내려 보내라고 말했다.

쿠르츠는 강추위로 얼어서 무용지물이 된 자신의 왼손 대신 이빨과 아이스 액스를 이용해 6시간 만에 가이드들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실행해, 자일 가닥이 바람에 딴 곳으로 날려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줄 끝에 작은 돌멩이를 매달아 구조대에게 내려보냈다. 구조대는 거기에 자일, 해머, 피톤, 카라비너를 매단 후 쿠르츠에게 줄을 끌어올리라고 소리쳤다. 올려 보낸 자일의 길이가 짧아서, 그 자일을 다시 내려보내게 해 거기에 제2의 자일을 연결시키고, 쿠르츠에게 다시 끌어올리게 했다.

쿠르츠는 자신의 몸에 묶은 카라비너(오늘날의 8자 하강기 대용)에 자일을 통과시키고, 조심스럽게 하강을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팔다리를 늘어뜨린 인체 하나가 추락해 가이드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쿠르츠가 아니라 절벽에 얼어붙어 있던 그의 동료의 시신이었다. 쿠르츠가 구조대로부터 5m 거리까지 자일 하강했을 때, 그의 하강 동작이 갑자기 멈추었다. 두 개의 자일을 연결한 매듭이 카라비너에 걸려서 더 이상 자일이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성한 손으로도 작업이 힘들 판인데, 동상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쿠르츠의 언 손으로 어떻게 카라비너에 끼인 그 매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 안타깝게도 구조의 문턱에서, 다시 절망 상태에 빠진 쿠르츠는 “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절명해, 머리와 사지를 늘어뜨리고 자일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생명의 마지막 불꽃이 깜빡거리는 순간까지 용감하게 아이거 북벽과 사투를 벌였다. 또한 그는 등정을 포기해 가면서 부상당한 동료를 도우려다 결국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시킨 위대한 산악인이기도 했다. 후에 가이드들이 칼을 매단 장대를 가지고 오버행 밑까지 올라가 쿠르츠가 매달린 자일을 잘라내어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 제틀마이어 조와 힌터스토이서 팀의 등반루트.

헤크마이어 일행, 구사일생으로 위기 벗어난 뒤 초등 이룩

1937년 오스트리아 산악인 레비치와 푀르크는 아이거 북벽 제3 빙원을 트래버스하고 갈라진 바위틈(후에 ‘람페’라고 명명됨) 아래까지 진출하고, 악천후 속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그들의 공로로 그때까지 부정적이던 아이거 북벽 등반의 가능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38년 7월 초 오스트리아 대학생 하인리히 하러와 그의 친구 프리츠 카스파레크가 아이거 북벽의 제2 빙원 우측의 암반까지 올라 비박했다. 다음날 카스파레크가 아이스 해머로 경사도 55도의 제2 빙원 20피치에 스텝을 깎으면서 리드하고 있을 무렵 12발짜리 최신 크램폰을 착용한 독일 산악인 안데를 헤크마이어와 그의 파트너 루트피크 푀르크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따라 잡았다. 헤크마이어는 당대의 뛰어난 암빙벽 등반가였고, 푀르크도 전년도 아이거 북벽 제3 빙원 위쪽 람페 밑까지 진출했던 유능한 클라이머였다.

처음에 헤크마이어는 등반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카스파레크 조에게 하산을 권유했지만 푀르크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한 팀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들이 경사도 65도의 제3 빙원을 트래버스하고, 경사도 45도 높이 180여m의 람페를 올라서자 눈 녹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 침니(크랙)가 나타났다. 그들이 당장 그 폭포 속을 통과하면, 불가피하게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밤새 강추위에 혹독한 시련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폭포 피치 아래쪽 비좁은 두 개의 레지(바위 선반)에서 2개 조가 따로 비박했다.

다음날 폭포수가 밤새 꽁꽁 얼어붙어 빙벽으로 바뀌었고,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던 암벽은 베르글라(얇은 얼음층)로 뒤덮여 있었다. 헤크마이어가 크램폰을 착용하고 폭포 크랙의 빙벽을 돌파하자 그 위쪽에 높이 9m의 오버행 빙벽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오버행 빙벽에 피톤을 설치해 자일을 통과시킨 후 푀르크에게 그 자일을 당기도록 시키고, 자신은 오버행 위로 꿈틀거려 몸을 끌어올리며 그 위쪽의 홀드를 잡으려다 세 번씩이나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고드름에 슬링을 걸어 그것을 핸드홀드로 삼고 오버행 끝에 아이스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카라비너를 걸어 자일을 통과시킨 후 푀르크에게 다시 자일을 당기게 하며, 아이스 해머와 피켈로 오버행 위의 얼음을 찍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오버행 빙벽을 돌파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그의 확보를 받으며 쉽사리 빙벽 위로 올랐다.

그들은 서로 자일을 묶고 람페 빙원에서 우측의 30m 높이의 가파른 ‘잘 부서지는 바위 크랙’을 올라 북벽 상부의 수평 트래버스 피치(전망이 매우 좋아서 후에 ‘신들의 트래버스’라고 명명됨) 초입에 도달했다. 헤크마이어와 푀르크가 선등하며 오버행 밑으로 긴 트래버스 피치를 통과하고 그 끝의 난코스인 가파른 스텝(Step)을 내려가 제4 빙원 격인 높이 150m의 ‘화이트 스파이더(하얀 거미)’ 밑에 도달했다. 선등조는 프런트 포인팅으로 재빨리 빙벽을 절반쯤 기어올랐다.

그때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며 아이거 북벽은 네 명의 산악인 관객들에게 알프스 고봉 등반의 통과의례 중 한 가지인 무시무시한 빛과 소리의 천둥 번개 쇼(Show)를 공연했다. 번개가 그들 주변의 바위 능선과 절벽에서 연거푸 번쩍거릴 때마다 천둥소리가 북벽을 가로질러 우당탕 쿵쾅 맞장구의 메아리를 쳤다.

크램폰을 착용하지 않은 하러 대원을 위해 카스파레크가 빙벽에 스텝을 깎으며 등반하느라, 오스트리아 조는 뒤처져서 화이트 스파이더의 우측 가장자리를 절반쯤 오르고 있었고, 선등조는 이미 화이트 스파이더의 상부 끝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쉿 소리를 내며 먼저 낙석과 낙빙이 첨병이 되어 빙벽 위로 쏜살같이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눈사태가 눈구름을 일으키며 쏟아져 내렸다.

두 번째 눈사태 후 마지막으로 얼음 조각들이 그들 옆을 스치며 쏟아져 내렸는데 하러 대원은 무사했지만 카스파레크는 손등에 낙석을 맞아 살갗이 크게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첫 번째 눈사태가 발생했을 때 선등조의 헤크마이어는 빙벽에 재빨리 아이스액스를 깊이 박고, 바로 뒤쪽에 서 있던 푀르크의 목덜미의 칼라를 움켜잡아 친구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가루 눈사태에 휩쓸려 내리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난 네 사람들이 서로 자일을  묶고 엑시트 크랙에 들어섰을 때 날이 저물고 있었다. 헤크마이어-푀르크 조가 좁은 레지에서 비박 준비에 들어갔고, 그 아래쪽의 레지에서는 카스파레크-하러 조가 자일로 확보한 후 비박 색을 뒤집어썼다.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가루 눈사태 소리가 요란했다.

다음날 그들이 엑시트 크랙 속의 가파른 침니 크랙, 즉 난코스 ‘쿼츠 크랙’을 오를 때 폭설이 내렸다. 그들은 침니 크랙을 어렵사리 돌파하고 나서 가루 눈사태가 간헐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쿨와르(걸리) 루트로 들어섰다. 그들은 눈사태가 쏟아질 때는 등반을 중지하고 빙벽에 납작 붙었다가 눈사태가 멎으면 등반을 다시 계속하기를 반복했다.

헤크마이어가 난코스 오버행을 돌파 중에 피톤이 빠져 추락하면서 확보를 보고 있던 푀르크를 덮쳐 두 사람이 함께 추락했는데, 헤크마이어가 본능적으로 번개처럼 빙벽에 크램폰과 아이스액스를 박아서 구사일생으로 그들의 추락이 멎었다. 헤크마이어가 추락할 때 그의 크램폰 발이 푀르크의 엄지손가락을 꿰뚫어 그 상처에서 심한 출혈이 일어났다. 그들은 엑시트 설원과 정상 설원을 지나 미텔레기 능선으로 정상을 밟고 역사적인 아이거 북벽 초등을 이룩했다. 그들은 이 등반으로 올림픽이 이미 지났지만 특별 메달을 수여받았다.

테레이와 라쉬날 천둥과 번개, 우박과 빗속에서 제2등


 

1946년 2명의 스위스 가이드 쉬루네거(1936년 쿠르츠 구조대의 일원)와 크레헨뵐은 아이거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신들의 트래버스 쪽으로 오르지 않고 람페 빙원 위쪽으로 계속 등반하며 여러 개의 크랙을 돌파했는데, 맨 나중에 돌출한 오버행 때문에 북벽에서 북동벽으로 넘어가는 루트 개척에 실패했다. 만일 그들이 이 루트 개척에 성공했다면 훗날 아이거 북벽에서의 많은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1947년 당시 알프스 극한등반에서 독일,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뒤떨어져 있던 프랑스의 산악인 리오넬 테레이와 루이스 라쉬날이 자신들의 조국의 명예를 걸고 아이거 북벽의 플래트아이언과 제3 빙원의 낙석과 낙빙의 포화 속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후 람페 위쪽 홍수 상태의 ‘폭포 크랙’ 밑에 도착했다.

그들은 폭포수 속으로 등반하다가 익사하거나 옷을 흠뻑 적시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테레이가 우측 암벽에 어렵사리 변형 루트를 개척해 폭포 크랙 상부에 도달했다. 그 위쪽의 오버행 빙벽에서는 해빙이 시작되고 있어서 테레이는 아이스 해머로 구멍이 뻥뻥 뚫리고 무른 빙벽에 핸드홀드와 풋홀드를 쉽사리 깎으며 올랐다.

그때 우박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신들의 트래버스 초입에 닿았을 때 낙석의 일제 포화가 시작되는 시각이어서 그곳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이 스파이더의 위쪽 ‘엑시트 크랙’에 들어섰을 때 뇌우(雷雨)가 북벽 상부를 강타했다. 그들 주변의 바위는 전기 충전으로 윙윙거렸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철물은 전기 유도체로 변해 아이스액스 날, 크램폰, 피톤, 카라비너 등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거리며 탁탁 소리를 냈다.

그들은 천둥소리와 사방에서 덜컥대는 낙석소리에 휩싸인 채 공포에 떨며 우박과 비가 얼어붙어 살얼음판으로 도금된 절벽으로 살금살금 등반을 계속했다. 번갯불과 동시에 낙뢰가 주변의 바위를 때릴 때마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천둥소리와 함께 공중에 유황냄새가 감돌았다. 다음번 벼락 때 그들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심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들이 낙뢰를 맞아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면 그들의 시신을 받아 줄 1,200m의 검은 심연이 아래쪽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테레이는 빙판 위에서 먼저 눈을 쓸어내고, 크랙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곳의 얼음을 깨내고 피톤을 설치한 뒤 자일을 통과시키며 전진했다. 그들은 난코스 오버행을 넘어 자갈이 들어찬 걸리로 들어섰다. 후등자 라쉬날은 선등자의 느린 진행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확보는 뒷전으로 미루고 선등자와 동시에 등반을 계속했다. 그래서 성질이 불 같은 그들 사이에 서로 욕설이 오갔지만, 그들은 엑시트 설원과 정상 설원을 지나 오후 3시 아이거 북벽의 2등에 성공했다.

1952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과 요흘러, 독일 대학생 오토와 제프, 프랑스의 가스통 레뷰파 일행 5명 이렇게 도합 9명이 아이거 북벽의 신들의 트래버스 초입에 도달했을 때 폭풍설이 엄습했다. 낙석의 포화 속에서 절벽등반의 달인 가스통 레뷰파도 머리에 낙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가루 눈사태를 무릅쓰고 화이트 스파이더를 돌파했을 때 엑시트 크랙에서도 눈사태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 헤르만 불은 엑시트 크랙에서 우측으로 40m가량 트래버스해 변형루트를 개척했고, 독일 조가 그 뒤를 따랐다. 가스통 레뷰파는 후위에서 추위를 참아가며 너무 오랫동안 무료하게 기다리기가 거북해 눈사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팀을 이끌고, 노멀 루트상의 엑시트 크랙에 설치된 고정 피톤에 의존하며 수직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사태가 급행열차의 기적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빙벽에 납작 붙어서 가루눈을 뒤집어썼다. 눈사태가 멈춘 사이엔 사람을 날려보낼 듯한 태세의 강풍이 눈보라와 함께 얼굴을 강타했고, 또 다시 눈사태의 시달림이 이어졌다. 가스통 레뷰파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등반에서도 폭풍설 속의 아이거 북벽 등반에서처럼 수천 톤의 가루 눈사태를 뒤집어쓴 적이 없었다.

가스통 레뷰파는 더 이상 눈사태의 시달림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우측 20m 위쪽의 독일 팀에게 자일을 내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독일 팀이 내려준 삼마 자일은 눈이 엉겨붙고 얼어서 유리 막대꼴이 되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잡고 쿨와르를 횡단한 후 빠른 속도로 독일 팀을 따라잡았다. 등반 도중에 날이 저물어 오스트리아 팀은 한 피치 위쪽에서 비박했고, 독일 팀과 프랑스 팀은 얼음이 얼어붙은 프랑스 대의 나일론 자일로 줄사다리를 급히 만들어 그 위에 걸터앉아 비박 천을 뒤집어썼다. 눈보라의 가루눈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 녹았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해 그들은 저절로 얼음 갑옷 차림이 되었고, 차가운 강풍에 떨며 악몽 같은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그들은 ‘강철 끈’으로 변한 로프를 잡고, 쿨와르 루트로 되돌아가 등반을 계속해 아이거 북벽을 8번째로 등정했다.

롱히, “배고파요. 추워요” 애원한 뒤 절벽에서 절명


 

1957년 이탈리아의 VI급 암벽 등반가 코르티(Corti·29세)가 노련한 파트너를 구할 수 없어서 등반기술이 좀 미숙하고 체중이 90kg 넘게 나가는 롱히(Longhi·44세)와 아이거 북벽을 등반 중에 22세의 독일 대학생 노트두르프트-마이어 조를 만나 함께 등반했다. 독일 대학생 노트두르프트는 헤르만 불이 4시간 30분 만에 단독 등정한 피츠 바딜레 북동벽을 3시간 30분 만에 단독으로 돌파한 노련한 암벽 등반가로 2개월 전 단독으로 아이거 북벽의 제2빙원까지 진출하고 악천후로 인해 실패를 한 번 경험했다.
그는 재도전에서 병이 났는데도 하산을 거부하고 약을 복용하며 등반을 강행했다. 선등자 코르티가 람페 빙원에서 우측의 ‘잘 부서지는 바위 크랙’ 초입에 있는 레지(바위선반)를 지나치는 바람에 그들은 신들의 트래버스로 진입할 기회를 놓쳤다. 결국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신들의 트래버스와 나란한 상부 트래버스를 통과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피치는 70, 80도 경사의 단속적인 레지들로 이어지는데, 고도의 등반 기술을 요하는 루트로 화이트 스파이더 상부로 연결된다.

선등자 코르티가 이 피치에 중간 확보물(피톤)을 설치하며 트래버스의 끝 화이트 스파이더 상부가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건너갔다. 그가 자일을 자신의 어깨 위와 다리 사이로 통과시켜 확보자세를 막 취했을 때 후위에서 피톤을 회수하고 있던 롱히가 갑자기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추락하면서 “추락! 빌레이(확보)”라고 소리쳤다.

두 대학생은 안전한 스탠스(발 디딤)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여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고, 코르티 혼자 가속이 붙은 체중이 90kg 넘는 롱히의 추락을 저지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미끄러지는 자일의 강한 마찰로 그의 장갑이 연기를 내뿜고 타면서, 그의 양 손바닥에 움푹 파인 깊은 상처를 냈다.

코르티가 사력을 대해 롱히의 추락을 저지시키자 오버행 아래 허공에 매달린 롱히가 자신의 아래쪽 좁은 레지에 닿을 수 있도록 자일을 2m쯤 풀어 달라고 요구해, 그렇게 해주고 암벽에 두 개의 피톤을 박아 자일을 견고하게 확보시켰다. 코르티가 자일을 잡고 15m 아래쪽 오버행까지 내려가 보니 롱히는 오버행 너머 약 14m 아래쪽의 겨우 발을 디딜 만한 레지에 서 있었다.

롱히는 자신의 동상 걸린 양손으로 허공에 걸린 자일을 잡고 혼자 올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와 코르티는 프루지크 매듭(오늘날의 주마르 역할)법도 몰랐다. 코르티는 방금 양손에 상처를 입었고, 노트두르프트는 약을 복용하는 환자였고, 15m 위쪽에 확보되어 있던 마이어 대원 혼자의 힘으로 오버행 위에 걸쳐져 제동이 걸린 상태의 자일 끝에 매달린 체중 90kg 이상 나가는 롱히 대원을 끌어올릴 재간이 없었다. 코르티는 식량과 약품이 든 배낭을 롱히에게 내려보내고, 그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자일의 길이를 여유 있게 풀어준 다음 자신이 구조요청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정상으로 향하던 코르티가 엑시트 크랙의 3분의 1 지점에서 낙석에 맞아 머리에 파열상을 입고 거꾸로 20m쯤 추락하다가 마이어 대원의 확보로 추락이 멎었다. 그 과정에서 코르티는 무릎이 삐어 걸을 수조차 없었다. 부상자 코르티는 오버행 밑의 비박 텐트에 홀로 남겨지고, 두 대학생들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정상으로 향했는데, 결국 그들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코르티는 여러 날 굶주림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주변의 모든 얼음을 갉아먹고, 심지어 자신의 크램폰의 가죽끈까지 잘라 삼켰다.

스위스의 유명 산악인 자일러 일행은 실종된 산악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북릉을 통해 윈치(권양기)와 강철 케이블을 아이거 정상으로 운반했다. 캐신, 보나티, 테레이 등 여러 나라의 유명 산악인들이 서벽을 통해 아이거의 정상으로 모여들었다. 구조대가 케이블을 잡고 코르티의 비박지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고함을 질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 롱히가 절명한 것으로 판단했다. 독일 산악인 헬레프르트가 안전벨트를 착용한 코르티를 업고 케이블을 잡고 정상에 설치한 설동까지 올라왔다.

캐신이 서벽으로 하산하면서 롱히 쪽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죽은 줄 알았던 롱히가 “배고파요. 추워요”라고 대꾸했다. 악천후가 시작되어 폭설이 퍼붓고 있었고, 구조대도 체력의 한계점에 이르러 구조는 불가능했다. 롱히는 아이거 북벽 신들의 트래버스 위쪽, 접근이 어려운 절벽에서 절명해 2년 동안 자일에 매달려 있다가 시신이 어렵사리 수습되었다. 그 등반사고가 발생한 지 4년 만인 1961년, 행방불명되었던 두 명의 독일 대학생들의 시신이 아이거 서벽의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디레티시마 초등자 존 할린 로프 절단으로 추락사

토니 킨스호퍼 일행의 동계 초등, 독일 여성 다이지 포크의 여성 초등에 이어, 1966년 동계에 미국대와 독일대가 합동으로 아이거 북벽에 최초의 디레티시마(존 할린 루트), 즉 제2 루트를 개척했는데, 미국의 존 할린 대장은 고정로프가 끊어지며 추락사했다.
1968년 폴란드 팀과 이탈리아 라인홀트 메스너 팀이 아이거 북벽의 좌측 가장자리, 즉 노스 필라로 제3루트와 제4루트를 개척했다. 1969년 일본대가 250개의 볼트를 사용하며 ‘존 할린 루트’의 우측에 오버행 로트 플루를 통과하는 직등루트 제5루트를 개척했는데 등정자 6명 중에는 여성 산악인 미치코 이마이도 포함되었다.

1991년 동계에 미국 클라이머 제프 로가 단독으로, 볼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일본대 직등루트 좌측에 ‘메타노이아’라는 루트를 개척했다. 1992년 동계에 프랑스 여성 클라이머 카트리느 데스티벨이 17시간 만에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단독으로 등정했다. 1999년까지 아이거 북벽에는 모두 25개의 루트가 거미줄처럼 개척되었다.(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ㆍ월간산 2010년 9월호)

 

출처 : 죽음의 벽 아이거 북벽(Nordwand)의 등반과 조난   Daum 티스토리 | 작년, 2010년 9월 25일

출처 :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의 꿈을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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