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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

by 격암(강국진) 2012. 5. 7.

2012.5.7

최근 삶의 의미에 대한 책들을 몇권 기증받아 읽었다. 그래서 이 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 자신의 답을 얼마간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부분적으로 여기저기 적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이렇게 정리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많고 분명하다. 따라서 따로 길게 논할 필요는 없지만 항상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므로 간단히라도 이야기해 보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뭘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철학적인 사색같은 것에 관심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알게모르게 그런 질문의 답에 대한 이해에 크게 영향받게 된다. 

 

일례로 사상의 구조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레슬리 스티븐슨은 인간본성에 대한 열가지 이론이라는 책에서 고금의 가르침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오래된 가르침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은 세 부분으로 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우선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질문에서 시작하며 그 다음으로 왜 우리는 지금 이런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명하는 부분으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즉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문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이 된다.

나는 이씨가문의 일원이다.  (정체성의 질문)

우리 이씨가문은 세상의 억압때문에 충분히 성장하고 있지 못하다. (문제제기)

따라서 나는 이씨가문의 부흥을 위해 세상의 억압과 싸워야 한다. (해결책)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광고되고 믿어지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들은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우리는 한국인이다라던가 우리는 인간이다라던가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의 일상과 삶의 목표를 결정하는 근원적 이유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가 질문이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는 질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는 누군지가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다른 사람들이 여러다른 설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답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정체성의 질문에 대한 답이 간결하고 단순하다면 그 사람은 어떤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행동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고 만약 그 사람에게 환경적 변화가 생기거나 한다면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어떤 부분에서 누적되어져 왔던 문제가 크게 터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다른 면에서 이 질문을 비판할 수 있다. 즉 이 질문은 그 답이 무한히 길어지므로 애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은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답해 질 수 있다. 이 질문이 나는 아버지고 아들이며 남편이고 친구고 한국인이다 같은 답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검은 머리에 키는 180cm에 몸무게는 75kg 잘생긴 얼굴 운운 하는 것은 물리적 묘사를 하는 답일 것이다. 우리의 성장사를 이야기하면 역사에 대한 것인데 물론 그것도 여러가지 측면에 대해 다른 묘사가 가능하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련된 것은 무한히 많이 있으며 그 것이 모두 답의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답에 대해 아무리 떠들고 들어봐야 도움이 되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지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깊이 매몰되는 것은 심지어 위험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어떤 의미로 우리는 이미 무한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더 떠들필요없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옳을까?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부분은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어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삶의 어떤 부분을 통째로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흔히 그렇게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생명과 의식으로서의 나이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던가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몇번이고 블로그에서 따로 적은바 있으며 (예를 들자면 불확실한 세계를 산책하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094 에서 그렇게 했다) 그것은 자칫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이상의 서론 없이 바로 결론으로 뛰어넘어가 보겠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사실 이 글은 내 스스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기 위해 시작한 글이며 분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나는 나라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이 세상에 대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설명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믿는다. 무슨 영혼같은 종교적인 개념을 들여올 생각은 없지만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나라는 존재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며 분명 이 육체가 아니다. 

 

육체와 나의 문제를 위해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원시인이 텔레비전을 본다고 하자.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볼 때 그 원시인은 그 사람이 텔레비전 안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생각은 옳지 않지만 그렇게 엉터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그 사람이 텔레비전안에 있다고 믿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가 텔레비전의 원리를 알고 있으며 방송국의 존재를 알고 있고 둘째로 여러개의 텔레비전이 똑같은 사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시인의 상식으로 텔레비전안에 사람이 보이면 사람이 텔레비전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텔레비전대신에 원격으로 조종되는 로보트를 생각해 보자. 그 로보트들은 각자 서로 다르게 행동하면서 나와 대화도 나누고 협동도 한다. 그럴 때 이 로보트가 인간에 의해 원격조정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로보트들을 지성을 가진 존재로 생각할 것이며 그 지성을 로보트의 하드웨어와 동일시하기 쉬울 것이다. 즉 그 지성을 가진 로보트는 바로 여기 내 앞에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 로보트가 아닌 사람들을 보자. 우리는 통상 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의 육체와 그 사람을 동일시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그 사람들이 사실은 어딘가에서 원격조정당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사람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결코 무슨 텔레파시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원격조정을 하려면 전자파 수신이 필요하다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따라서 원격조정이 아니며 뇌의 운동을 보면 원격조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라는 설명을 하지는 말기 바란다. 내가 말하는 원격조정은 비과학적인 현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리모콘같은 것에 대한 것도 아니다. 텔레비전수상기의 전자회로를 봐도 당연히 텔레비전 화면의 사람과 전자회로의 활동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뇌사진을 찍고 그걸 근거로 그 사람은 저 뇌안에 있다라고 믿는 것은 과학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민이 부족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저 사람을 저 육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확고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저 육체는 사실 원격조정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이런 것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뇌와 동일시 한다. 즉 저기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란 그 사람의 두뇌를 말하는 것에 가깝다. 외과수술로 그 사람의 장기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간이나 심장이나 손을 따라서 그 사람이 따라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간이나 심장이나 위장을 조종하기도 하지만 조종당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왜 그것은 인간장기에서 멈추는가. 인간은 세상을 바꾸지만 세상에 의해 조종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필 뇌가 있는 부분을 찍어서 그 인간은 저기에 있다고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생명은 파도와 같은 현상이다. 우리 몸은 끝없이 물질을 교환하고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생명은 그 형태를 어느 정도 그리고 일정기간 지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우리는 생명이 물질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파도와 같은 현상이다. 소리가 공기가 아니듯 파도는 물이 아니다. 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신비주의가의 말이 아니라 과학이다. 

 

그런데 현상으로서의 파도에 경계가 있는가? 바다에 생긴 파도 하나를 두고 여기서 부터 저기까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파도에는 경계가 없으며 모든 파도는 바다라는 한 덩어리의 일부다. 나는 이것을 풍선의 예를 들어서 자주 설명한다. 토끼 모양의 풍선이 토끼 모양을 가지는 것은 그 안과 바깥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간에 둥그런 테두리를 치고 토끼모양의 풍선이 이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 풍선을 심해나 우주공간으로 가지고 가면 더이상 고무풍선이 토끼모양을 유지하는 '현상'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놓치면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과 시체를 같은 것으로 보게 된다. 

 

현상으로서의 생명은 엄밀히 말해 공간의 어디에 국한되어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근사일 뿐이며 훌룡한 근사일지 몰라도 근사는 근사이고 모든 근사가 그러하듯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답이 전혀 틀려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쉬뢰딩거나 듀이가 말하는 서구 과학이나 철학의 근원적 문제와도 이어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지적과도 이어져 있다. 우리는 현상을 물질로 착각한다.  

 

현실에 대한 근사는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꽤 훌룡할 때에도 뭔가에 대해서는 전혀 엉터리가 될 수 있다. 좋은 예는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에 의해 주어진다. 쉬뢰딩거는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에 대한 매우 훌룡한 근사인것 같지만 결국 생명의 존재 자체가 양자역학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양자현상이 없었다면 살아있는 우리는 나타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차이가 실은 매우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을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공간에 고립된 존재로서 생명을 파악하는 근사는 마찬가지로 생명과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세상에 이해에 대해 근원적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 잊혀진다.  

 

나라는 의식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은 믿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주장은 이미 흄에 의해 비판받은바 있고 니체도 그러했으며 지금은 철학자라면 별로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나라는게 뭘 말하는지 애매하다.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의식은 사라진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우리를 느낀다.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고 말을 하는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밥을 먹으면 밥이 사라진다. 내가 공을 차면 공이 날아간다. 물론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있다. 잠을 자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나는 여기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단한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것이 가장 간편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우리의 모든 기억은 조작된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모두 금방 만들어진 사기일 수 있다. 실제로 요즘 영화같은 곳에서는 이런 것에 대한 근원적 불안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왜 10분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이어져 있다고 믿는가? 

 

그래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가진다. 특히 깨어나 활동하고 있을 때는 그런 느낌이 더욱 생생하다. 그런 생각은 뭐에 근거하는가. 나는 철학적인 질문이라기 보다는 생물학적 뇌과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느낌은 세상의 어떤 변화, 우리 몸의 어떤 변화에 대처하는 뭔가가 저기 있다는 감각신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지는 감각신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망막에 같은 그림을 계속 비춰주면 그 그림은 의식에서 사라진다. 우리의 눈이 끝임없이 움직여서 망막위에서 다른 그림들이 비춰지기 때문에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감각을 완전히 박탈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실험은 이미 여러번 행해졌다. 예를 들어 장기간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의 사례를 연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시간개념에 대한 거의 영구적 손상을 입는다고 한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환청과 환각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사실 나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다. 팔다리가 중력을 느끼고 혼잣말을 하면 귀에 그 소리가 들리니까. 어떤 수술을 통해 모든 종류의 감각을 모두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내 행동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느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할 때 우리의 의식은 영원히 잠들 것이다. 나라는 것은 세상으로 부터 단절되어 홀로 존재를 이어나갈 수 없다. 흔들리지 않는 물그릇의 표면이 점차 잔잔해지듯 나라는 의식은 흔들리지는 않는 세상에서 결국 점차 사라지고 만다. 

 

우리 내부는 외부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비록 생명의 유한성때문에 그것이 조잡하고 오류가 있는 더러운 거울이 되고 말지만 그래도 거울은 거울이다. 풍선의 내부가 풍선의 외부와 균형을 잡으면서 외부세계를 반영하듯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 일어났던 일들은 우리의 내부에서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현상의 일부가 된다. 세상에서 던져지는 정보와 파문들은 생명의 물질속에서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나'다. 여기서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과  '나'가 구분되는 것을 주목하라. 마치 텔레비전이라는 기계와 거기서 방송되고 있는 티비 프로그램이 같은게 아니듯이. 그 '나'는 그 생명이 받아들인 여러가지 감각신호를 최고로 설명하기 위한 설명의 일부다.

 

여기 앞에 공이 있다. 그런데 발이 공을 찬다. 공이 날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생명은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며 그것이 공을 찬다라는 설명이 최고의 설명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뭔가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이러저러한 것이 보인다. 그러다가 눈이 다른 곳을 볼 때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왜 시각신호가 전혀 달라지는가. '나'라는 것이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감각신호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가 매우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곳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틀린 이해가 아닐 수도 있다. '나'라는 것은 세계를 설명하다보니 우리의 유한성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만약 무한한 복잡성을 지닌 존재가 있다면 그런 존재는 그런 개념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 물론 너무 단순한 존재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움직이지 않는 나무는 뇌도 없고 의식도 -적어도 인간같은 의식은-없다. 

 

다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나는 원격조정되는 로보트를 보면서 사실 그 로보트의 육체는 눈앞에 있지만 진정한 로보트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했다. 텔레비전안에 나오는 사람이 텔레비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이 육체안에 공간과 시간의 제약속에서 여기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나'라는 의식은 온 세계가 인간이라 불리는 생명현상에 비춰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온 세상을 방송국으로 인간의 육체를 텔레비전이라고 했을때 나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육체에서 방송되어지는 방송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할 때 나는 정말 어디에 있는가. 원시인이 화면속의 인간이 텔레비전안에 있다고 믿듯이 우리가 나는 이 육체라고 믿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과 방송국의 예는 한가지, 적어도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과 방송국은 확연히 구분되며 한쪽은 신호를 보내고 한쪽은 신호를 일방적으로 수신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바다 전체의 상태가 만들어 낸 현상이지만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관계는 아니다. 세상과 우리는 서로에게 양방향으로 영향을 준다. 

 

생명현상이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성공한 어떤 것이 유지되는 현상이다. 외부의 것에 반응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간다. 그렇지 못할때 그것은 마치 격류의 흐름속에 생겨나는 무수한 물의 흐름이 각자 이름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서 존재로서 이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뭔가가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될 때 그것에게 이름을 준다. 이 경우 그 이름은 바로 '나'이다. 

 

그 '나'가 누구인지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시간적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서 파악한 생명이나 물질이라는 것은 대단히 훌룡한 근사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큰 진실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닐뿐이다. 

 

맺는 말

 

내가 매우 거칠게 쓴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몇마디는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그 의미를 전부 여기에 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두가지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분명히 우리를 모두 평등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파악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바다라는 한덩어리의 다른 파도다. 작은 파도가 큰 파도를 부러워 해야할 필요도 없고 큰 파도가 잘난 척할 것도 없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감수성이라는 것 혹은 보고 듣는 세계의 넓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있을지 모르나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다른 생명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배우면서 이 세상에 대한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 크고 작은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는 다른 '나'를 가지고 다른 것을 위해 살게 된다. 감수성이 사라진다는 것, 보고 듣는 세계가 작아진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나의 죽음이다. 

 

큰 세계는 더 위대하고 작은 세계는 나쁘다라는 판단은 어리석다. 그러나 삶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라던가 우리가 공존하여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세계, 유지할 수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에 모순이 있는데 그 모순에서 눈을 돌리고 그걸 잊으려고 하고 엉터리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 결과 세계는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재난에 빠진다. 그것은 가족관계에 대한 것일 수 있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으며 어떤 현실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만들어 내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나라는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를 잘 돌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환경의 의미다.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은 아름답지 못한데 그저 내 손에 모든 것을 쌓기만 하면 좋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누가 뭘 독점적으로 가진다는 생각도 어리석다.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내가 아름다워진다. 세상과 나는 나눠지는게 아니다. 우리는 알몸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멀지 않은 장래에 사라질 것이다. 

 

삶의 근원적 문제들은 불확실성이고 죽음이고 무의미함이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불확실성이 우리를 유지하고 만들어 내는 원인이기도 하며 육체적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절대적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고금의 현인들과 성인들이 남긴 메세지를 우리는  조금 다른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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