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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루이스 레넌드의 메타피지컬클럽 :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3. 10. 15.

2013.10.15

메타피지컬 클럽 :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루이스 메넌드의 책 메타피지컬 클럽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책을 짧은 전기로 재구성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의 구성 자체가 4명의 인물 홈스, 제임스, 퍼스 그리고 듀이의 삶을 통해 실용주의와 미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책이므로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고 유익한 요약이 될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을 위해서는 그냥 이 책을 읽거나 아니면 각자의 전기가 있다면 그것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메타피지컬 클럽은 훌룡한 책이지만 훌룡한 철학책도 또 훌룡한 전기도 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그저 피상적인 이야기만 가득한 책이 된다. 이책은 어디까지나 루이스 메넌드가 쓴 실용주의 탄생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홈스의 것을 쓰고 난 다음에는 확률론적 사고에 대해 썼고 제임스와 퍼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정리했으며 듀이에 이르자 듀이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 나온 것만으로 정리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까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요점으로 바로 뛰어드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실용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느낀 점중  두가지에 집중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독후감을 마치고자 한다. 그것은 실용주의는 주체적 독립의 철학이며 통합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모두 실용주의는 어떤 시대적 요구에 그리고 어떤 질문에 답하고자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결국 질문을 알게 되면 왜 그런 답이 나오는지 가장 잘 알게 된다. 

 

주체적 독립의 철학으로서의 실용주의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실용주의는 무엇보다 주체적 독립의 철학이다. 그 이유는 실용주의가 생겨난 시대적 상황때문이다. 실용주의는 남북전쟁의 참상을 겪었던 미국사람들이 만들어 낸 철학이다. 지금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말해지지만 19세기에는 미국은 유럽의 변방이었다. 사람들은 문화와 학문의 중심으로 유럽을 바라보고 있었고 특히 독일이 그 중심이었다. 독일은 칸트이래 철학과 과학의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미국 사람들이 독일로 유학을 다녀오고는 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에서 자기가 배운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학위를 따가지고 와서 한국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

 

19세기 미국사람의 입장에서 유럽을 본다면 유럽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철학적 문화적 자산을 통해 권위를 형성하고 세계를 주도하던 기성세력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적 독립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기성 사고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결코 변방에서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학문은 물론 사회적 문제가 발발한다고 하자.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이를 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과학적 실험은 왜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학문의 권위를 가진 유럽의 역사와 사회속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하고 유럽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가정과 경험을 통해서 쌓아올린 답이나 그것을 변형한 방법을 쓰려고 할 것이다. 그게 권위다. 세상의 일들이 잘 안 풀리면 안풀릴 수록 우리는 더더욱 기성세력에게 기대게 되고 중독되게 된다. 학문을 하고 싶으면 유럽사람들이 쌓아올린 지식 질서의 맨 끝자락으로 가서 줄을 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며 따라서 무엇이 합리적 판단인가의 기준은 주로 유럽사람들이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실용주의는 무엇보다 우리가 관념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되며 절대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용주의의 출발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것은 체제를 허무는 철학이다.

 

남북전쟁의 참상 뒤 적어도 몇몇 미국인들은 모든 것을 아주 기본부터 생각해 보기로 했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확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용주의가 자라나 나온 토양은 북부의 종교적 개혁 그리고 에머슨의 초월론이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자기안에 답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칼뱅주의에 대한 혁신이 유니타리안이었고 모든 체제에 대한 반항이 에머슨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혁명과 독립의 철학은 기존의 권위와 체제를 거부하고 무엇보다 자기안의 답을 볼 것을 말하는게 된다. 미국은 유럽과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면 독일과는 전쟁을 했다- 미국이 유럽에서 독립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바로 미국의 철학이었다. 미국은 자기만의 삶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야 자기의 가치가 서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행동을 강조하고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인가도 애매한 사물의 본질만 계속 파고드는 관념적 사고와 우리의 삶을 구분하고 한가하게 관념을 논하기 위해 관념을 논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 대한 철학이고 무엇보다 결단과 결정을 위한 철학이다. 그것은 비참한 삶의 현장에서 도대체 내가 배운게 지금 나에게 어디에 쓸데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회의한 끝에 스스로 생각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철학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회의한 끝에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철학이 아니라 어떤 것도 편견이 아닐수 없고 어떤 것도 절대적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경험을 긍정하는 철학, 불확실성앞에서 그래도 뭔가에 의지하려고 하는 철학이다.  

 

예를 들어 법철학자 홈스에게 법이란 우리가 과거의 경험속에서 거듭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 경험은 어떤 절대적 원칙의 예가 아니라 항상 그 경험 그 자체로 남는다. 따라서 법적인 판단은 절대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만들어 낸 우리 자신에 의해서 그때 그때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들자체가 근대과학혁명의 시기에 종교가들에게 과학자 혹은 과학철학자들이 했던 말들과 거의 같다. 성경에 기반하여 수백년간 내려온 사고에 대해 우리 눈으로 직접관찰하고 실험한 것으로 답을 알아보자고 하는게 근대과학혁명이었다. 그 합리주의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적 전통을 유럽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이제 권위가 되었다. 이제 실용주의자들은 다시 말하는 것이다. 절대를 논하는 철학을 뒤로 하고 다시 우리가 되서 직접보고 직접 경험하고 그걸로 선택하자고. 낡은 것을 배워서 나의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듀이는 철학이 가치있어 지는 길은 실질적인 문제로 돌아와야지 관념을 연구하기 위한 관념을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스템으로 만들어 진 복잡한 철학의 지식을 쌓아올리고 실용주의 철학의 역사에 대해 나열하면서 실용주의 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실용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쓸모없는 개념을 가지고 혼돈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삶의 경험을 몇줄로 나열해서 거기서 얼마나 실재가 나올까. 우리가 홈스나 듀이의 삶 그리고 그들의 말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그들의 개념에 대해 혹은 그들의 개념에 대한 해설이나 그 해설의 해설을 자세히 아는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홈스의 경우는 조금 예외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전쟁이라는 극적인 과정을 철학의 전환점으로 삼았다는 간결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임스나 퍼스, 듀이는 모두 남북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망치로 한방 때려서 박을 수 있는 못을 박겠다고 산처럼 거대한 기계를 끌어오는 것은 실용주의의 정신이 아니다. 실용주의는 그래서 해방의 메세지다. 관념도 도구다. 필요이상으로 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삶을 살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관념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누군가가 세운 거대한 사고체계를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가 둘로 넷으로 분열하면서 복잡한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장단계에 맞춰서, 우리의 성장과 생존에 필요한 것을 찾고 쓰면 된다. 거대 시스템에 무조건 투항하는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시스템만 쓰면 된다.

 

실용주의는 통합의 철학이다.

 

실용주의라 하면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저 실리를 따져서 돈많이 버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더더욱 이상하게 들릴 실용주의의 설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실용주의는 노자철학이고 불교철학이다. 적어도 그들과 공통점이 아주 많다.

 

도교건 불교건 출가해서 도를 찾는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같은 것을 다 버리고 사는 사람들로 생각되는데 실리를 따지는 실용주의가 노자철학이고 불교철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테지만 나는 이 한 문장이 적어도 한국사람에게는 실용주의를 가장 쉽고 간단하게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란 말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게 실용주의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란 노자의 말도 대개 안다. 그게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는 개념을 해체시키고 우리가 진짜로 필요한 만큼만 고민하자고 한다. 헛된 분열때문에 싸우지 말자고 한다.

 

실용주의는 분열의 시대에 통합을 고민하는 사람들속에서 만들어 진것이다. 남북전쟁이후 국가적 분열은 더더욱 커졌다. 대공황속에서 국민들은 괴로워 했고 이민자들사이의 분열과 인종적 분열도 여전했다. 분열은 그런데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의 힘이 커지고 체제가 발달할수록 가치와 사실의 분열, 종교와 과학의 분열이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어떤 사람들은 가치와 사실을 마구 섞어서 쓴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적 방법을 쓰는 척하면서 결국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독단적으로 선언하고 만다. 이것이 반진화론자인 아가시같은 경우다. 그는 흑인과 백인간의 차이에 대해 말할 과학적 증거를 찾는다. 과학적 연구라고 하지만 사실은 결론을 내려놓고 증거를 짜맞추는 식이다.

 

그래서 챈스 라이트같은 사람들은 과학과 가치 혹은 과학과 종교를 이번에는 깨끗히 분리한다. 우선 우리가 뭘 안다고 하는 착각부터 깨자고 말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은 그런 허무주의와 분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가치에 대한 개념이 하나도 없이 과학을 한다는것이 가능할까? 과학적 지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그들은 그런 분열을 참고 살 수 없으므로 실용주의는 먼저 관념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도구라는 것 즉 분열과 나눔은 인위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어떤 문맥속에서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관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 때 필요없는 싸움이 생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나 상중하층의 구분이 어떤 때는 쓸모있지만 어떤 때는 필요없는 분열을 만드는 식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진짜가 아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문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듀이는 통상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지는 개념들도 실은 일방적이 아니라 되먹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지만 자식이 없다면 부모는 애초에 부모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어떤 순서로 나열하고 앞의 것 때문에 뒤의것이 생겼다고 하지만 실은 앞의 것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하게 된 것은 뒤의 것때문이다. 따라서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절대를 포기하고 만들어진 종교관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불교나 도교와 비슷하게 들리게 된다. 물론 부처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불상에 절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절대적 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것보다는 세상의 것들은 우리 마음에 달려있다라는 가르침을 전하게 된다. 우리가 혼란스런 세상을 보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세상은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이득이란 대개 개인적인 것도 단기적인 것도 아니다. 내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간다면 나는 당장은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식당에는 다시 가지 못하게 될것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 되므로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전취식을 하지 않는다. 즉 좋다던가 이득이 된다던가 하는 것은 짐승이 배고프면 먹는다는 것처럼 단기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아니다. 나 개인을 넘어서 사회와 세상에 까지 그 시각을 넓히고 나서 말하는 이득이다.

 

맺는 말

 

실용주의는 냉전과 함께 사람들에게 잊혀졌다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시 주목받는 철학으로 돌아왔다. 실용주의는 나누고 분열시키는 것에서 통합과 포용을 말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다르다고 둘로 진영을 나눠서 싸우던 시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냉전이 끝나자 필요한 것은 통합이었다. 미국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지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이 세상은 항상 중국이 중심국가로 남았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질서였다.

 

정신적으로 보았을때 유럽의 쇠락과 미국의 성공은 남북전쟁이후 실용주의와 같은 정신적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대법관으로 오래있었던 홈스같은 인물이 소수의견의 관용을 상징하면서 미국을 참을만한 나라로 만들고 믿을 수 있는 사회로 만들었을 것이다.실용주의의 통합적 기능이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머리로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그 한계는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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