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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루이스 레넌드의 메타피지컬클럽 3 : 제임스와 퍼스

by 격암(강국진) 2013. 10. 7.

2013.10.7

메타피지컬 클럽 : 제임스와 퍼스

 

들어가며

 

월리엄 제임스와 찰스 샌더스 퍼스는 무엇보다 철학자였지만 각각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였고 뛰어난 논리학자였다.  퍼스는 오늘날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만년에 자신이 프래그머티즘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하버드에서 1872년에 있었던 한 모임 때문이라고 기록을 남기는데 그 모임의 이름이 바로 메타피지컬 클럽이었다. 이 메타피지컬 클럽은 제임스와 퍼스는 물론 홈스도 회원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들보다 연상이면서 40대에 요절한 첸시 라이트와 니콜러스 세인트 존 그린도 회원으로 있었다. 홈스는 제임스와 퍼스보다 라이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철학에 영향을 준 인물로 그를 기억했다. 퍼스는 자신이 고민한 문제에 대해 답을 해준 사람은 바로 메타피지컬 클럽 시절의 그린이었다고 말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스스로 오랜간 영혼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 영혼의 병이 치유되었다고 말해지는 시기도 바로 이 1872년, 메타피지컬 클럽의 시기와 겹친다. 월리엄 제임스는 방황하듯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이 시기이후 강사와 조교수를 거쳐 하버드의 심리학, 철학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다. 1876년에는 결혼도 했다. 즉 그의 이력을 보면 철학적 안정감이 그의 삶의 안정을 만들어 낸것처럼 보인다. 그 철학이란 물론 오늘날 우리가 프래그머티즘이라고 부르는 철학이다.  

 

홈스나 퍼시, 라이트, 제임스의 사교는 1872년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홈스와 제임스는 남북전쟁후 친구가 되어 그가 독일로 떠나는 1868까지 매주 토요일 8시반부터 철학적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라이트와 퍼스의 경우에는 이미 1857년, 퍼스가 아직 18세일때부터 당시 27세이던 라이트를 만났다. 라이트는 퍼스의 아버지 벤저민 퍼스의 하버드 제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 기대어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은 퍼스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빌려온 말이라고 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도 어떤 것을 믿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는 자신의 진단을 100% 확신하지 못해도 어떤 진단을 내리고 그것을 시험해 봐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프래그마틱 빌리프 즉 실용적 믿음이라고 그는 불렀다. 프래그머티즘의 주장은 칸트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믿음은 실용적 믿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월리엄 제임스 (1842-1910)

 

좀 과장을 해서 말하자면 윌리엄 제임스와 그의 아버지 핸리 제임스 시니어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의 이름도 헨리 제임스인데 그는 저명한 소설가였다.)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그것은 사고의 전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크게 바꿨다는 점에서 그렇다. 부자였던 할아버지덕에 집안은 부유했지만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엄격한 칼뱅주의에 반항했으며 그의 방탕함에 월리엄의 할아버지가 유산을 주지 않으려고 해서 재정적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운동이었던 제2차대각성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말할수 있다. 그는 칼뱅주의를 넘어서서 형식을 파괴하는 종교를 만나고 복음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 한다. 방탕한 자식에 불과했던 그는 많은 종교적 저술을 남기고 훗날 세터데이클럽이란 모임을 통해서 미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정도가 돤다. 이 세터데이클럽은 퍼스의 아버지인 수학자 벤자민 퍼스는 물론 훗날 윌리엄 제임스의 스승이 되는 저명한 반진화론자 아가시, 홈스의 아버지인 올리버 웬드 홈스 박사도 회원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에머슨과도 깊은 교류를 가져서 윌리엄 제임스의 양부가 바로 에머슨이었고 그를 통해 시인 채닝과 월든의 저자로 유명한 소로우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월리엄 제임스의 아버지는 그들사이에서 그렇게 높은 평판을 얻었던 것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 성취가 어떠했건 그의 아버지는 주관이 뚜렸한 사람이었고 그 주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었다. 행동과 이론이 서로 맞지 않는 때도 많았지만 신학적 이론에 골몰하고 집필하는 남자였다. 체제에 대한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자식이 한 학교에 오래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수없이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월리엄이 공부를 하게 한다. 월리엄은 이것을 싫어했지만 한해에 여러번 이사를 하는 것은 물론 뉴욕주안에서만 이사를 하는게 아니라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등 여러나라를 전전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이때문에 월리엄은 나는 교육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그는 걸핏하면 공부하는 내용을 바꿨는데 말하자면 화가공부를 하다가 화학공부를 하고 의학공부를 하고 법과대학원도 다니고 박물학 공부도 하는 식이었다.

 

월리엄은 1961년 하버드의 로렌스 과학학교에 입학면서 비로소 비교적 한 곳에 정착해서 공부를 하는 삶을 시작한다. 그래봐야 전공바꾸기는 계속 되었지만 말이다. 하버드의 로렌스 과학학교는 아가시를 위한 학교라고 할 정도로 아가시의 영향력이 있던 학교였다. 월리엄은 1865년에 아기시를 따라서 브라질 탐사여행도 같이 다녔기 때문에 월리엄은 적어도 한동안 아가시라는 과학자를 존경하고 그에게서 뭔가를 배우려는 태도를 지녔었다. 그러나 브라질 탐사여행의 말기쯤에는 아가시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고 후일 다윈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월리엄 제임스는 홈스는 물론 여러명사를 만나고 하버드 로렌스 과학학교에서 퍼스와 만나서 친구가 되는등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를 했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었고 우울증에도 자주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3살 연상인 퍼스와의 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그의 말을 노트에 적어가면서 그의 논리를 쫒아가려고도 했지만 적어도 1870년대가 오기전에는 그는 항상 퍼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월리엄 제임스는 타고나길 그랬던건지 아니면 그의 성장배경때문인지 우유부단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점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변한게 있다면 자신의 그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의견정도였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혼돈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신감없이 흔들리는 그 자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아버지와 아가시라는 두 예를 통해서 얼핏보면 엄밀한 논리와 과학적 방법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그 결과는 결국 매우 독단적인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브라질 탐사를 통해서 매우 예의바르게 이야기하는 토착민들도 보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도 문명인들은 예의바로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무식하다는 선입견을 흔드는 예였을 것이다. 여러나라를 전전하면서 살았던 그는 그와 같은 경험이 아마도 많았을 것이다. 즉 사람들이 확실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장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일이 많았을 것이며 장소뿐만 아니라 예술과 여러 다른 학문분야를 섭렵하면서도 그런 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결국 과학이라는 말이 남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뭘 독단적으로 가정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행해지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인종적 차이를 강조하던 아가시의 반진화론적 주장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결론을 미리 설정하고 그에 맞는 증거들만 수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9년 6월 여러 분야를 전전하던 그는 마침내 하버드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지만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든다. 영혼의 병이라고 말했던 이 우울증에서 그는 1872년이 가까워져서야 벗어난다. 그의 우울증은 그보다 연상이었으며 메티피지컬 클럽의 중심인물이었다고 말해지는 챈시 라이트의 1875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같다.

 

챈시 라이트는 이미 1857년에 퍼스와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그 시기에 바람과 날씨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의 일관된 주장은 항상 모든 것은 변화하며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자연스레 메타피지컬 클럽의 회원이었던 사람들에게 1872년 이전부터 흘러들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모든 독단론의 폐해를 경험한 젊은이들에게 챈시 라이트의 철학은 매력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월리엄 제임스도 찰스 퍼스도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고 할 수가 있다. 그 질문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뭔가를 안다고 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캠브리지의 소크라테스로 말해지는 챈시 라이트는 네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그들이 모든 지식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도록 했을 것이다.

 

첸시 라이트는 무엇보다 실증주의자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가치와 사실을 구별해야 하고 우리가 뭘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과 실제로 본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는 버클 같은 역사학자의 주장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말하고 성운가스설같은 것을 통해 우주가 더 질서있는 상태로 진화해 왔다라고 하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의 불확실성은 확고해 보였고 오히려 식물과 초등동물이 발전하는 원인이 날씨의 불확실성에 있지 않나하는 주장을 펼침으로서 불확실성의 긍정적인 면까지 생각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열정적으로 읽고 다윈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외로운 남자였고,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학술모임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말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을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격식을 차린 강의의 경우에는 평이 매우 좋지 않아서 그가 죽은 1875년 무렵에는 하버드의 강의가 폐지되는 일도 생긴다. 듣는사람의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켐브리지의 소크라테스 다웠던 것같다.  

 

이런 첸시 라이트가 월리엄 제임스에게 분노하는 일이 생긴다. 그것은 1875년의 일로 그가 발작 후에 죽은 때의 일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어떤 이론을 평하면서 이 이론은 그럴듯하지는 않지만  공상적이고 증명불가능한 것이라도 불합리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회의적인 입장에 대해 회의론을 편 것처럼 보였고 첸시 라이트는 이에 대해 자신에 대한 인신 공격이라면서 분노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월리엄 제임스가 자신의 우울증을 벗어나고 철학의 안정을 찾은 계기는 결국 어떤 믿음과 가설없이는 우리가 뭔가를 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모르는 것을 기반으로 아는 것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첸시라이트가 말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조차 믿음이고 가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편견없는 시각이라는 말을 쓰지만 편견이 없는 시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이런 편견이 있는가 하면 저런 편견이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우리의 편견위에서만 해석된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믿는 편견을 고쳐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첸시 라이트의 철학은 결국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거나 필연적으로 허무해 진다. 모든 것을 회의하면 결국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뭔가를 믿지 못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지성을 마비시킨 것이라고 말한다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그 해에 첸시 라이트는 하숙집 주인에 의해 죽어서 누워있는 채로 발견된다. 퍼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는 그린도 이듬해 마약남용으로 죽었다. 앎의 기반을 고민한다는 일은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운 일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월리엄 제임스는 자신의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그는 우선 자신은 자유의지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가 1887년 전쟁 영웅 로버트 굴드 쇼에 헌정된 기념식에서 행한 연설은 이를 잘 말해주는 것같다. 그는 전쟁에 이기도록 힘쓴 로버트 굴드 쇼를 그가 잘 싸웠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라는 전쟁으로 지켜지는게 아니라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은 행위인 합리적인 말과 글 그리고 투표에 의해서, 부패를 청산하고, 당파간에 유지되는 균형에 의해서, 진실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의해서 지켜진다. 그가 로버트 굴드 쇼에게서 높게 평가하는 것은 흑인연대를 인솔하기 위해 영광스런 자신의 지위를 희생하기로한 결단때문이었고 이를 위한 발휘한 고독한 용기때문이었다. 윌리엄 제임스에게 모든 것이 들어나지 않은 불확실한 상황속에서의 선택과 결단의 용기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교육은 그를 고난에 찬 삶을 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를 역사적 철학자로 만들었던 면도 있다. 그는 어느 고정된 체제에도 소속되지 않았기에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 근거해서 생각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따라서 의심하고 바꾸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찰스 샌더스 퍼스 (1839-1914)

 

퍼스는 여러면에서 제임스와 반대였다. 하버드의 저명한 수학교수, 벤자민 퍼스의 아들이었던 그는 천재였고 일찌감치 하버드에 입학해서 학위를 받았다. 그가 1861년에 월리엄 제임스를 만났던 때에는 이미 그는 학사학위를 하나 가지고 있었고 월리엄보다 한 학년위였다. 그 아버지는 아가시등과 함께 강력한 학계의 인맥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그는 학계에서 누구보다도 강력한 후광을 가지고 있었다. 벤저민 퍼스는 24살이 되던때 수학및 자연철학교수로 하버드에 임용된 사람이었고 미국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린 수학자였다. 다만 아들이었던 찰스는 자신은 아버지처럼 고결한 성품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을 자제하지 못했으므로 그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찌감치 챈스 라이트를 만나서 그와 토론했던 퍼스는 챈스를 우리들의 권투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감없었던 제임스와 달리 자신의 논리와 지식을 매우 과시하는 성격이었는데 오직 몇몇 사람만이 퍼스의 논증을 쫒아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챈스 라이트는 그 중의 하나였고 퍼스는 그가 우리를 많이 두들겼으며 특히 내가 많이 맞았다라고 기억한다.

 

퍼스는 저명한 수학자였던 아버지와 회의론자였던 챈스 라이트 사이에서 그 양자를 통일하는 일에 골몰하게 되었던 것같다. 아버지는 수학자로서 이 세상은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수학이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반면에 챈스 라이트는 그에게 세상의 혼돈과 요동을 끝없이 가르쳤다.

 

퍼스 부자의 일화중에 당시의 세상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엄청난 유산의 상속에 관련된 유언장에 있는 사인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벌어진 재판에 대한 것이었다. 벤자민 퍼스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사건에 대해 수학자의 답을 하는데 그 답은 확률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걸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오늘날 우리는 합성사진에 익숙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두개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하나의 사진속에 있는 인물이 다른 사진 속에 있는 인물과 너무 똑같다면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도 둘중 하나의 사진은 합성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모든 세부사항까지 다 똑같이 사진이 찍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퍼스의 답은 두개의 사인이 서로 틀린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똑같아서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1/5^30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 사인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지극히 쉬운 논리인 이 주장은 당시에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인간의 행동에 확률론을 적용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챈스라이트가 퍼스부자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할 정도였다고 하니 큰 소동이 난 것같다. 당시에는 아직 사람들이 확률론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퍼스는 달랐다.

 

퍼스와 제임스, 퍼스와 홈스의 차이점은 퍼스는 수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 모든 생각을 해냈을 수도 있지만 제임스나 홈스 그리고 라이트, 그린등의 생각을 흡수해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수학적으로 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퍼스는 죽을때까지 기호에 관한 이론과 관계논리학을 연구한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늘 빗나갈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서 하나의 진술이 정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프래그머티즘의 주장은 유명론이 아닌가하는 비판이 일자 퍼스는 그것은 오직 개인적으로만 그렇고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명론이란 오직 이름만이 있을 뿐이라고 해서 우리는 믿고 싶은 걸 맘대로 믿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맘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즉 우리는 자기만의 판타지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만 사는게 아니라 사회적 편견내지 상식의 세상속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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