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크리스토퍼 코흐의 의식의 탐구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3. 8. 16.

2013.8.16

 

최근에 크스토퍼 코흐가 쓴 의식의 탐구를 읽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읽은 다음에 독후감을 쓰지 않으면 읽은 것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책을 읽은 소감을 간략히라도 써볼까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통상의 다른 책들과 같이 독후감을 쓸 책은 아니며 사실 일반독자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사실 젊은 뇌과학 전공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독자에게는 대부분 매우 따분한 책이 되고 말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책 말미의 가상인터뷰같은 부분만 읽고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아마 백해 무익일 것이다.

 

 

 

 

 

의식의 연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뭐가 가능한건지, 이런 연구가 종교라던가 자유의지 같은 것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코흐는 과학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일반독자는 좀 실망스럽겠지만 - 소박한 목표를 세운다. 그것은 바로 의식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인 NCC(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를 찾는 것이다. 

 

NCC를 찾는 작업은 우리가 수천년전에 처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바로 뇌를 찾는 작업이다. 뇌를 찾는다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수천년전에는 머리안에 뇌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식으로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이란 걸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력한 답으로 등장한 것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그들은 사람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 큐피트가 사랑의 화살을 뇌가 아니라 심장에 쏘는 이유는 과거의 이런 역사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생각이란 것을 뇌가 한다는 것을 안다. 생각은 발이나 손이나 심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에도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심장을 교체하거나 기계로 바꾸는 일도 있다. 생각이 뇌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뇌에 질병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사고가 엉망이 될거라고 기대하고 정신병의 원인을 뇌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정신병들은 아직 치료법이 찾아지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신경관련 질병이라고 부르고 신경계통을 연구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뇌를 찾았는데 NCC는 또 뭘까. 손이 아니라 뇌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은 손을 자르는 것이다. 손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생각은 손이 아닌 몸의 특정부분에서 생기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NCC란 우리의 의식이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의 뇌가 전부 의식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는 증거를 주로 시지각분야에서지만 코흐는 많이 보여준다. 

 

의식의 연구는 인식의 연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지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게 아니라는 것을 즉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세상 그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거듭해서 알게 되었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다. 눈은 뇌의 일부다. 그런데 눈이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이 다르다. 눈의 신호를 뇌는 해석하고 왜곡해서 우리라는 의식체가 그걸 보게 만든다. 이 책은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실험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착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리는 여러가지 시각적 착시현상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착시는 눈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보다 상위의 뇌 깊숙한곳 혹은 전두엽같은 뇌의 앞부분에서 생기는 것일까. 실험에 따르면 우리가 착시를 일으킬 때도 우리의 망막에서 발생하는 신호 자체는 같다. 그러므로 착시는 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더 상위과정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흐는 이러한 논증을 계속해서 시상을 거쳐 초기시각피질(V1)까지 그것을 연장한다. 즉 우리의 후두부쪽에 있는 뇌의 한 부분인 V1이 보는 것도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말은 V1은 NCC의 일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의식과 외부세계와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실험에는 양안경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 개의 눈에 각각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상 우리는 두개의 눈으로 같은 것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본다. 그런데 각각의 눈에 전혀 다른 신호를 넣어주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한눈에는 마차를 한눈에는 눈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전혀 다른 이 두 그림을 중첩한 것을 보게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각의 그림이 번갈아서 시간을 두고 보이게 된다. 즉 양쪽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같은 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이것은 마치 양쪽눈이 자기가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같은데 그래서 이것을 양안경쟁이라고 부른다. 

 

코흐는 신경계통이 하는 일을 의식 작용과 단순 반사작용 혹은 좀비과정으로 나눠서 해석한다. 그래서 NCC가 켜지지 않을때 인간은 단순 반사작용을 하면서 의식없이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많은 일들이 좀비과정을 통해서 처리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땀을 흘리거나 숨을 쉬거나 심장을 뛰게하는 것을 창자가 소화를 하고 시각피질이 정보를 해석하는 것을 의식적 명령을 통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중에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은 극히 일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연구는 바로 NCC를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코흐는 말하는 것이다. 뇌가 생각을 하는 부분이듯이 NCC가 의식을 가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뜻 생각하면 NCC라는걸 쉽게 찾을 수 있을 것같지만 여전히 NCC는 애매한 상황이다. 쉬웠으면 코흐는 보다 간결하게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코흐의 책은 답을 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질문과 추측을 나열하는 책이다. 젊은 과학자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기를 기대하면서 쓴 책이다. 그 추측은 철학자의 추측처럼 근거없는 추측들은 아니지만 그 대신에 세부사항은 엄청나게 많고 그것들이 해결되어도 우리가 의식에 대해 뭘 배울 수 있는지조차 아직은 희미하다. 

 

NCC의 개념이 보다 확실해 진다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와 안 가진 존재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뇌가 없는 배추는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을 안다. 배추를 씹으면서 배추가 아파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NCC의 개념을 잘 알게 된다면 미래에는 NCC가 없는 생물들은 기계처럼 의식없이 좀비로 살아가는 존재이고 NCC가 있는 생물들은 의식이 있다고 믿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거나 원숭이 실험을 하는데 있어서 더 큰 윤리적 문제를 겪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인간만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것은 일종의 차별적 장벽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모든 인간은 의식이 있고 인간이 아닌 것은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평등하고 동물들은 우리의 실험대상이 되거나 먹이가 되거나 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의식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의식에 1단계 2단계 100단계하는 식으로 단계가 있거나 의식의 양이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배추도 의식이 있다고 믿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할 때 그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한 상태냐에 대한 내용이 없다면 단순히 배추가 의식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고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반대방향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눈을 뜨고 서로 대화를 하니까 모두 의식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에 양이 있고 수준이 있다면 어떤 의미로 우리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어있고 우리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수 있을 것이다. 이것역시 섯불리 철학이나 종교적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에 의미를 주는 문맥이고 그 문맥의 과학적 연구는 아직 나와 있지 않으니까.

 

코흐가 소개하는 연구결과들을 보면 깨어있다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뇌의 일부가 문제가 생겨서 시야의 특정부분이 컬러가 아니라 흑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컬러티브이의 화면 한쪽에 필터를 씌워놓은것처럼 괴상해 보이는 세상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전혀 그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시각이 이상하다는 것을 별로 눈치채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뇌의 절반이 잘려나가고도 생존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그 사람이 생존했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상태는 어떻게 말하면 뇌 혹은 지각의 상당부분이 잠자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말하는 핵심은 그렇게 되도 그 당사자는 본인이 깨어있고 의식이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멀쩡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우리는 깨어있는 것일까? 모든 인간들은 같은 만큼 깨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절반이 자고 있어서 우리가 제대로된 우리가 못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흐의 연구에 대해 한가지 이야기만 하고 이 감상문을 끝내도록하자. 과연 코흐가 진행하는 방향은 옳을까? 물론 누구도 모르고 코흐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지적해야 겠다. 코흐는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측정가능하고 만질 수 있는 것에 관련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는 어쩌면 의식에 대해 말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들에 질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만 할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진도를 나갈 수 있는 것을 찾자라는 생각의 끝이 바로 NCC를 찾는 일을 하는 것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론과 실험 혹은 이론과 관찰은 서로 맞물려 있다. 실험없는 이론은 공허하지만 이론없는 실험은 불가능하다. 마치닭과 달걀처럼 양쪽은 서로는 서로를 요구하기에 항상 새로운 발전의 시작은 비약적 사고가 필요하다. 데이터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뉴튼의 중력법칙을 생각해 보자. 물건들이 서로를 당긴다는 사실, 예를 들어 지구가 사과를 당긴다는 사실은 사과를 떨어뜨려보면 안다. 그럼 사과를 당기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이 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이것이 지당한 질문같다. 그런데 뉴튼의 천재성은 바로 그 지당한 질문을 피해간 것이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중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중력은 있는데 그 중력이 이러저러한 법칙을 따른다는 선언일 뿐이다. 왜 그런가? 왜 중력이 존재하는가? 모른다. 설명하지 않는다. 당연해 보이는 질문을 거부하고 법칙을 선언하는 것은 비약이고 터무니 없는 생각같지만 뉴튼이래의 과학발전은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왜 혹은 뭐가 중력을 만드는 가를 고민했기에 뉴튼 역학같은 것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의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끝없이 의식이 어디서 생기나, 왜 생기나를 물으면 우리는 그저 제자리를 맴돌고 큰 진전은 이루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의식이 어느 장소에 있는 기관에서 생기는가를 찾는 질문보다 의식이 만족하는 법칙을 상상하는 일이 의식의 이해에 대한 더 결정적인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연한 것이고 코흐가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겠지만 코흐가 제안하는 의식의 연구방식이 의식을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다른 것들이 황당해 보여도 그것들이 왜 필요한가를 잊지 않고 의식을 보다 큰 문맥에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댓글